682화
“리지나? 그 사람 알아요. 우릴 여기로 이끈 사람이었어요.”
그 말 이후로 소년 각성자들은 저들끼리 재잘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제랑 오늘 봤던 그 사람 이름이 리지나잖아. 맞지? 우리한테 각성자 격투장이 있다는 걸 설명해 주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본 사람.”
“아. 격투 시작 전에 마지막 점검도 했던 그 사람?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격투장에 오라고 말할 땐 친절했었는데, 오늘은 좀 무서웠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런 곳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더는 친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이는 유더와 격투를 할 뻔했던 곱슬머리 소년, 재크였다. 재크의 말을 들은 뢰네브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 가던 찰나, 소년의 친구들이 고개를 저으며 조금 다른 말을 했다.
“그건 아니야, 오늘 갑자기 무서워진 게 아니라 사실 어제부터 느낌이 이상한 사람이었어. 우리가 정말 여기서 싸워도 괜찮을지 걱정했던 것 기억 안 나?”
“맞아. 재크 넌 돈을 벌고 싶단 생각에 신나서 그 사람 말도 제대로 안 들었지? 난 아니었어. 그 사람이 계속 우리한테 무서운 얘길 하고 겁을 줘서 솔직히 이건 우리 같은 어린 녀석들은 오지 말란 뜻인가 싶었다고.”
“나도 그렇게 느꼈어! 지원서에 서명하는 걸 망설이니까 그 사람이 귓속말로 겁나면 그냥 가라고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서명하긴 했는데 그냥 그러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아까 들더라.”
“……그랬나? 난 그냥 위험할 수도 있는 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길 엄청 길게도 한다 싶었는데…….”
재크가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렸다.
유더는 두서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리지나가 격투 직전 마지막 점검을 하다가 도착하지 않는 동료들 때문에 초조해하던 와중 내뱉었다는 말에 대한 정보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녀가 소년들을 향해 내보인 냉정한 태도. 그리고 자신에게 허락된 곳은 여기까지이기에 직접 내려가 동료들이 오지 않는 이유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듯 말했다던 이야기.
일견 가차 없는 이인 듯 느껴지지만 리지나가 사실 큐릴이며,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 지금은 그 정보에서 느껴지는 감상이 달라졌다.
유더는 거기까지 들은 뒤 뢰네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복잡하게 가라앉은, 그러나 진실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유더를 마주 보았다.
“…이제 알려 주세요. 큐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부 다요.”
“알겠습니다.”
유더는 누키조와 그 주변을 통해 듣고 추측한 사실들을 간결히 담담하게 입에 담았다.
리지나가 투명화 능력을 지닌 각성자로서 누키조의 명에 따라 격투장에서 탈출하려 하는 각성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었다는 것.
그 외에도 누키조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그 이유는 승진하여 지하 3층으로 내려갈 권한을 받기 위해서라 말했다는 것.
그러나 누키조 본인은 뢰네브와 리지나가 만날 경우 손을 잡고 탈출할까 우려하여 만나게 해 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는 정보와 그 외의 사항들까지 모두 듣고 난 뒤, 뢰네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지만 바보가 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도 누키조가 그들을 어떤 식으로 농락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작용하여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는지를 단숨에 모두 깨달았다. 그토록 찾았던 친구의 생존 소식을 들었으나 조금도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
뢰네브는 그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절망과 충격에 빠진 탓에 타인이 건네는 말도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는 듯 보였다.
그사이 현장을 정리하던 각성자들이 누키조가 들어서려던 비밀 통로의 입구를 발견하고 앞을 막은 잔해를 치웠다. 검게 입을 벌린 통로 내부는 급하게 귀빈들이 빠져나가면서 찍힌 수십 개의 발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는 모두 함께 그곳으로 들어설 것을 명했다.
그리고 탈출의 희망으로 부푼 각성자들 앞에서 드디어 마도구를 비틀어 본래의 얼굴도 온전히 드러냈다.
“어, 얼굴이……?”
“이제야 진짜 얼굴로 제대로 된 소개를 하게 되었군.”
눈을 의심케 하는 엄청난 외모에 놀라 얼어붙은 각성자들은 그가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라고 소개한 순간 겁을 먹은 와중에도 벅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여기까지 누구 한 사람 다치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힘을 보태 주었기 때문이지. 마지막까지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믿고 따라와 주게.”
“무, 물론입니다.”
각성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비밀 통로를 따라 올라가는 와중에도 뢰네브는 가장 뒤에서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유더는 그녀의 모습을 흘긋 돌아본 뒤 키시아르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붙잡힌 이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본래 예정했던 대로 할 생각이네.”
본래 계획대로라면 누키조나 그 잔당들은 체포 즉시 법에 의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불법으로 인신매매에 가담하고 내기 격투장에서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으니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누키조만 따랐을 뿐, 격투장 일까지는 참여하지 않은 부하들이라 해도 전부 엮어 여태까지 저지른 죄를 조사하고 그에 맞는 벌을 내리는 게 이치에 맞았다. 제대로 된 처벌을 해야 누키조 이외에도 불법 격투장을 운영하던 놈들을 전부 때려잡을 명분이 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큐레이지나 같은 경우는 다소 복잡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누키조를 따른 게 아니라 해도 저질러 온 죄는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각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누키조 밑에서 활동하는 와중에도 나름대로 다른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맞다면 더 입맛이 쓰군.’
모든 이를 상황에 맞추어 구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단장으로서 보내 온 긴 시간 동안 유드레인 아일이 배운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죄를 지었다면 그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누키조라는 원인 제공자가 분명했다는 게 영 기분이 나빴다.
‘그놈이 살았더라면 쥐어짜서 이 일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확보해 좀 더 시비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었을 텐데.’
정황만으로 일을 판단하는 건 극히 까다롭다. 그게 죄에 대한 처벌이라면 더 그랬다. 이대로라면 큐레이지나는 극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더가 고민하는 사이, 키시아르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신경이 쓰이나?”
“네.”
유더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확실히 복잡한 건이지. 하지만 어디에나 길은 있는 법이야.”
“뭔가 생각이 있으십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지은 이들을 잡아들이기 전, 내부에서 정의를 위하여 전향하고 수사에 도움을 준 이가 나올 시에는 거래를 통해 감형이 가능하다는 법이 존재하지. 누키조를 죽이고 목숨을 살려 달라 요구한 아까 그자처럼 말이야.”
“…….”
“큐레이지나가 정말 진심으로 누키조를 따른 게 아니며, 상황이 따라 준다면 충분히 황제 폐하를 따르고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이라는 걸 증명할 기회가 아직 한 번 남지 않았던가?”
그 말에 유더는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곳은 귀빈들이 빠져나간 비밀 통로였다. 계획대로 마병단이 이곳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면 그들은 나가자마자 잡혀 조사와 벌을 받게 되리라.
그 과정에서 큐레이지나를 비롯한 누키조의 부하들은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누키조를 따르고 귀빈들을 보호하며 죄를 확정 짓거나.
혹은 전향하여 마병단에게 협조하고 정보를 넘겨 감형받을 기회를 얻거나.
“…최대한 빨리 올라가 보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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