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지하 3층으로 내려갈 권한. 뢰네브와 큐레이지나의 능력……. 그래. 이제 대충 짐작이 가는군.’
아까 누키조는 듀번에서 온 두 사람이 모두 각성한 게 문제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뢰네브가 각성했던 그날, 각성을 한 건 사실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친구 큐릴, 즉 큐레이지나도 각성을 했던 것이다.
뢰네브의 능력은 각성자의 힘을 억제하는 것인데 그녀의 친구 큐레이지나의 능력이 몸과 무기를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투명화 은신 능력이라면 이보다 여기서 탈출하기 좋은 조합이 또 있을까?
큐레이지나가 살아 있으며 그런 능력을 지녔다는 걸 알았다면 뢰네브는 이렇게 오래 얌전하게 갇혀만 있지 않았을 터다. 주변 방에 갇혀 있는 이들과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하여 그들의 힘을 억누르던 능력을 해제하고 단체로 탈출을 시도하는 그림이 곧바로 그려졌다.
‘누키조가 뢰네브에게 자나 깨나 힘을 사용하라고 강요한 게 이제 보니 3층에 가두어 둔 각성자들 때문만은 아니었겠군. 혹시 큐레이지나가 참다못해 몰래 뢰네브를 만나려 할지도 모를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해 버린 거야.’
큐레이지나가 투명 능력을 사용해 몸을 숨긴 뒤 지하 3층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려 해도 그곳에 뢰네브의 무력화 능력이 펼쳐져 있다면 발을 들이자마자 은신이 풀리게 된다.
큐레이지나가 그런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도 지하 3층에 들어갈 권한 하나를 얻기 위해 누키조의 밑에 들어가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누키조는 아마 그 두 사람이 아무리 말을 잘 듣고 복종해도 절대로 서로를 만나게 해 줄 생각이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둘 중 한 사람만 각성했더라면. 아니면 하다못해 큐레이지나의 능력이 은신한 채로 공격까지 가능한 투명화만 아니었더라도 이 정도 상황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얄궂은 운명이었다.
‘너무 편하게 죽었어.’
유더는 누키조의 시체를 싸늘히 응시하다 문득 어깨 위로 내려앉는 천의 감촉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 망토를 얹어 준 키시아르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휘어 웃었다.
“이제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따뜻한 걸 걸쳐야지.”
“……감사합니다만, 이건 단장님의 옷이 아닙니까?”
그들은 현재 고대부터 제국 건국 초쯤에 소년 소녀들이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에서 입었다는 옷을 걸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맨살이 많이 드러나고 천이 헐렁한 데다 단추 따윈 없이 꼬아 만든 금색 끈 몇 개로만 묶어 고정하는 의복이었기에 겨울에 입기에는 영 좋지 않은 의상이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마음대로 움직여도 걸리적거리지 않는다는 장점 하나 정도는 존재했다.
그 옷의 존재와 탈의실을 알려 준 건 무대 뒤에 있던 누키조 패거리를 모두 제압한 뒤 합류한 엘포킨스와 다른 각성자들이었다. 무대 뒤에 있는 공간 중에는 그날그날 격투 때마다 새로이 만드는 컨셉 의상을 두는 간이 탈의실이 있었다. 오늘의 참가자들이 오면 바로 입을 수 있도록 그곳에는 이미 갈아입을 옷이 놓여 있는 상태였다.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무대에 올라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어쨌든 입어야 했다.
그나마 디자인이 엘포킨스가 본래 걸치고 있던 걸레짝처럼 치부만 겨우 가리는 옷보다는 좀 나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그 현실성 없는 옷도 무서울 만큼 잘 소화해 냈다. 얼굴을 흐릿하게 변용한 상태라지만 몸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늘씬한 허리는 그 어떤 거적도 마치 그를 위해 일부러 맞춤 제작 된 듯 보이게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각성자들의 말로는 오늘 첫 참가를 하는 이들은 옷 위에 로브나 망토 정도는 걸치고 있어도 크게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기에, 그들은 천 옷 위에 본래 입고 왔던 겉옷을 둘렀다. 그 외의 다른 옷은 엘포킨스처럼 거적을 입고 있던 각성자들이 입을 수 있도록 나누어 넘겼다.
키시아르는 여태까지 그 겉옷을 잘 걸치고 있었지만 유더는 아까 진작에 벗어 던진 상태였기에 전신이 여기저기서 튄 피로 얼룩덜룩했다. 이런 상태에서 깨끗한 키시아르의 망토를 덮어쓰려니 오염이 될까 신경이 쓰였다.
“저는 괜찮으니 그냥 가져가십시오.”
“피가 너무 많이 묻었어. 이대로 밖에 나가면 체온도 떨어질 테고.”
어차피 제 피도 아니고, 추우면 불을 불러내면 되니 상관없다 여겼지만 키시아르는 그렇게 생각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 아까 벗어 던진 제 옷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이것 말인가?”
대체 언제 주워 왔는지, 키시아르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새카만 천 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갈가리 찢기고 온갖 액체와 먼지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아까 오면서 보았지만 이미 밟혀서 엉망이 되었더군.”
“…….”
“그 망토에는 네 장갑처럼 마법이 걸려 있어. 더러운 것들에 쉽게 물들지 않는 천이니 걱정 말고 입어 주게. 그러려고 계속 입고 있었던 거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유더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은 기색이 느껴져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싸우는 동안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사실은 어지간히 유더의 상태가 신경이 쓰였던 걸까.
“하지만 제가 이걸 입으면 오히려 단장님이 추워지실 텐데요.”
“내가 검의 극의를 봤다는 걸 잊지 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나가는 도중 나단을 만날 텐데, 그 녀석이라면 계획을 들은 이상 겉옷 하나 정도는 당연히 가져왔을 거라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유더 쪽이 나단 주커만의 옷을 입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키시아르의 표정은 그런 말을 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듯 단단하고 화사했다.
‘음……. 경험상 이건 절대 거절을 들어주지 않을 분위기군.’
여간해서는 유더가 하는 일을 가로막지 않는 사내이지만, 그는 필요하다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유더를 설득할 수 있는 이다. 서부의 대삼림에서 부상을 입어 눈이 보이지 않던 시기에 내비쳤던 나긋하고도 완고한 태도와 지금의 반응이 몹시도 비슷했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키시아르가 웃음지으며 망토 끈을 완전히 여몄다. 망토를 입었다고 전신에 뒤집어쓴 피가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들이 보자마자 흠칫 놀라 물러설 정도는 아닐 듯했다.
그때, 겨우 승리의 흥분을 가라앉힌 각성자들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죽어 있는 누키조를 보고는 깜짝 놀랐으나 이윽고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놈, 죽었어요?”
“진짜 죽은 거예요? 이렇게 쉽게?”
누키조는 이 격투장 내부의 권력 구조 최상층에 있었던 자였다.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듯했던 자가 이토록 허망히 죽었다는 사실에 각성자들은 허탈함과 분노, 그리고 시원함을 동시에 느꼈다. 여태 저지른 짓에 비해 지나치게 쉽게 죽은 건 아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시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 모든 악몽이 끝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남은 누키조의 부하들도 그저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자신들을 이끌었던 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었기에 누키조의 시체는 눈조차 감지 못한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항전할 의지도 보이지 않는 누키조의 부하들을 한곳에 모아 꽁꽁 묶었다. 이따가 합류할 마병단원들이 처리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 유더는 가장 뒤쪽에 서 있던 뢰네브를 불러 그녀가 그토록 찾았던 친구의 행방을 알려 주었다.
“누키조가 죽기 전, 다행히 친구분의 생사 여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살아 있었더군요.”
“큐릴이… 살아 있었다구요? 정말인가요?”
큐릴이 완전히 죽었다고만 여겼던 뢰네브가 어리둥절함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으나, 유더는 그녀의 기쁨이 오래가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기에 감정을 가라앉혔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친구분의 본명이 큐레이지나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군요.”
“아… 맞아요. 큐릴이란 이름은 듀번식 애칭이에요. 본명은 쓸 일이 없었어서……. 그런데 그건 왜요?”
역시 큐레이지나가 큐릴이 아닐 확률은 없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쪽도 당신처럼 이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키조의 부하로 지냈고, 리지나라는 이름을 썼다고 하더군요.”
“누키조의, 부하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뢰네브가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서 그 애가 계속 여기서 일을 했다구요? 이런 끔찍한 곳에서?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여기서 일을 했으면… 그놈들이 큐릴의 생사를 아예 알려 주지도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대체…….”
“진실은 본인에게 확인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이유는 아마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짐작됩니다.”
“저를요?”
뢰네브가 멍하니 반문하는 사이, 주변에 있던 나그란의 별 소속 젊은 소년 각성자들이 귀를 쫑긋대며 고개를 돌렸다.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 그들의 귀를 잡아끈 것이다.
“리지나? 그 사람 알아요. 우릴 여기로 이끈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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