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79화 (679/805)

679화

“…도, 돈을 줄게!”

발악하듯 흘러나온 외침에 유더의 발걸음이 잠시 우뚝 멈추었다.

“얼마면 그냥 가 줄 수 있지? 금화 십만 개? 아, 아니. 오십만 정도는 어때. 그 정도면 상부상조하기 좋잖아. 마병단 쪽에도 나쁜 이야긴 아닐 텐데?”

누키조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사람을 구슬려 자신들이 하는 일에서 눈감도록 만드는 건 그에게 아주 쉬운 일 중 하나였다. 병사들도, 기사도, 관리와 마법사들도 모두 그의 제안을 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고 유더의 눈도 천천히 가늘어졌다. 피로 얼룩진 손끝에서 핏방울이 뚝 떨어지는 모습이 공포스러웠으나 아무튼 움직임을 멈췄으니 누키조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다른 제안도 시작했다.

“들어 봐. 단번에 받는 게 좀 그렇다면 매달 우리가 버는 돈에서 조금씩 떼어 가져가도 돼! 여자를 원하면 여자를 보내고 남자를 원하면 남자를 보내 주마! 그거 말고도 마병단이 샬로인의 높은 분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우리가 다리를 놓아 줄 수도 있어!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새카만 무저갱 같은 눈이 누키조를 응시했다.

잠시 후, 유더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까짓 돈과 친분 따위로 각성자를 위해 생긴 마병단이 눈감아 주길 바란다…… 꿈이 큰 것 같은데.”

뭐? 각성자? 누키조의 머리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각성자? 아아, 그래. 각성자가 문제라면 이 각성자 격투는 하지 않겠어. 바로 폐지할게. 그러면 되나?”

유더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이, 이것 봐. 어차피 여긴 요즘 공급… 아니, 참가하려는 실력 좋은 이들 찾기가 영 어려워서 돈이 그리 벌리지도 않았어. 위험 관리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해서 힘들고, 이대로라면 휴장해야 하나 싶었단 말이야. 오죽하면 내가 지하 2층과 3층을 더 지으라고 조언했던 놈들을 찾아내서 죽여 버리…… 책임지라고 할 생각도 했을까.”

공급이라 말하려다 유더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단어를 바꾸는 모습에서 노련함이 느껴졌다.

“…….”

“일반 격투장에 가끔 스스로 꼭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는 각성자가 끼어드는 것까지 우리가 막을 순 없지만…… 그것도 싫다면 막도록 할게. 우리도 쉬운 일을 하는 쪽이 낫다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속이기 위해서라면 못 할 말이 없었다.

“꼭 참가하고 싶다는 각성자라. 여기 갇혀 있던 이들이 들으면 웃었겠군.”

“갇혀 있던 놈들? 누굴 말하는 거야. 날개 달린 놈? 그놈이 여기에 빚을 얼마나 졌는지 알아? 빚을 진 놈들은 돈을 갚기 싫으니 당연히 내 욕을 했겠지! 난 원래 굉장히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

누키조는 자신이 망가뜨린 엘포킨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유더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 네가 1년 넘게 이곳에 가두어 둔 무력화 각성자를 기억하나?”

“무력화……? 아! 그 듀번 계집. 가두어 두다니 무슨 소리야. 월급도 주고 비싼 옷과 방까지 내어 주면서 일하게 해 주었는데.”

직접 뢰네브가 지내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누키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확신 넘치는 목소리였다.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함께 온 친구를 찾았다던데. 왜 보여 주지 않았지? 이미 죽어서?”

“죽어? 누가 그래. 그 계집들 모두 다 잘 살아 있는데.”

유더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누키조는 그가 이 사안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돈에도, 인맥에도 이렇다 할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가 여기서 반응했다면 이게 바로 그의 목숨과 격투장을 구할 열쇠가 될 수 있겠다는 눈치 빠른 판단이 들었다.

“그래. 이게 그리 궁금하셨나? 듀번에서 온 계집 두 사람은 모두 살아 있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살아서 각자 여기서 일도 아주 잘했지.”

“그런데 왜 보여 주지 않았지?”

“왜냐하면…….”

누키조는 출혈로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쥔 채, 한편으로는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비밀 신호를 보내 명을 내렸다.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를 열겠다. 그때 탈출할 테니 도와라.’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부하들의 얼굴이 잠시 희게 질렸다. 누키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불거렸다.

“하필 두 계집이 다 각성을 한 게 문제였지. 알겠지만 직원 관리란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을 다 하지 않고 딴생각을 할 계기가 생기면 곤란하거든. 하필 한 년은 힘을 없애는 능력이고, 다른 한 년은…….”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누키조는 품 속을 더듬어 마법으로 만든 장치 버튼을 누르면서 부하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지금!’

덜컹.

큰 소리와 함께 유더의 뒤쪽, 무대 옆의 통로 하나가 열렸다.

“으아악!”

“안 돼! 저긴……!”

누키조의 부하들이 경악과 공포에 질린 소리를 내질렀다. 무릎을 꿇고 항복했던 놈들이 일제히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통로 안쪽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차갑고 어두운 기운. 코를 찌르는 기이한 악취와 피비린내. 눈과 오감보다 먼저 각성자로서의, 그리고 수도 없이 비슷한 상황을 많이 맞이해 본 본능이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대장이 몬스터 우리를 전부 열었어!”

통로에서 기어 나온 건 문어처럼 구불대는 수없이 많은 다리를 지닌 몬스터들이었다. 온갖 불길한 색으로 얼룩져 번들대는 다리가 얼마나 많고 형태는 또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대체 본체와 머리는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것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고 속도도 느려 보였는데, 누키조의 부하들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도망쳐 댔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아아악!”

구불대던 몬스터의 다리가 별안간 쭉 늘어나더니 작살처럼 쏘아져 날아가 도망치던 사람 중 하나를 붙잡았다. 붙잡힌 누키조의 부하가 살려 달라며 몸부림치고 몬스터의 다리를 쥐어뜯었으나 소용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계속해서 늘어난 다리가 희생자를 쭉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꿈틀대는 다리 뭉텅이 사이로 빨아들였다. 몸부림치느라 비져 나온 손발이 꿈틀거리며 몬스터의 다리 사이에서 발광하다가, 잠시 후 순식간에 체액이 모두 빨려 나가는 것처럼 쭉 말라비틀어졌다.

유더는 거기까지 본 뒤 빠르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불을 휘감은 검에 베인 몬스터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꿈틀댔으나 삼킨 희생자를 뱉지는 않았다. 유더의 힘이 보기에만 컸을 뿐, 몬스터에게는 그리 위협적으로 발휘되지 못한 탓이었다.

힘보다 효과를 발휘하는 검으로 여러 개의 다리를 잘라 내고 나서야 몬스터는 겨우 삼켰던 희생자를 뱉어 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에 찔린 듯한 구멍투성이가 된 채 해골처럼 메마른 시신이 된 상태였다.

“…….”

유더의 등줄기를 타고 위험한 감각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누키조는 이미 부하들에게 부축당하며 멀리 사라지는 중이었다.

‘격투장에서 사용하려 들여온 몬스터를 모조리 풀었나……. 이런 짓을 하면 제 놈도 멀쩡하진 못할 텐데.’

“살려 줘!”

“으아아악!”

비명 속에서, 유더의 곁에 있던 또 다른 몬스터가 그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유더는 몸을 날려 그것을 타 넘었으나 몬스터는 한 마리가 아니었고, 다리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굶주린 이들처럼 몰려든 몬스터들이 끝없이 다리를 뻗었다. 놈들은 간혹 자기들끼리 엉키는 다리가 생겨도 개의치 않고 거칠게 끌어당겨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저 잡히면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 끌어당겨 피와 진액을 빨아 먹고, 먹을 것이 사라지면 뱉어 대니 그야말로 격투장에서 끔찍한 시각 효과를 주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몬스터라 할 만했다.

‘전에 본 적 없는 몬스터지만… 소리를 인식해 사냥감을 잡고 있다는 건 알겠군.’

간만에 이전 생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몬스터의 종류가 워낙 많으니 보는 것만으로 정보를 바로 알 수는 없다지만 경험이 쌓이면 잠깐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지닌 성질이 어느 정도 짐작 가능했다. 유더는 계속해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한편, 누키조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땅의 힘을 뿜어냈다. 몬스터는 처치하기 어려워도 다른 걸 부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순순히 도망가게 둘 것 같으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향하던 방향 앞쪽의 문이 부서지며 앞이 가로막혔다. 누키조의 부하들이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쪽 방향을 인식한 몬스터들 또한 다리를 거침없이 쭉 뻗어 내며 새로운 희생자를 쫓았다.

“으아악!”

모처럼 먹이를 잔뜩 먹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갈수록 빨라지기 시작했다. 베어 내도 또다시 등장하는 수많은 다리 때문에 유더가 슬슬 이곳 전체를 무너뜨리는 게 낫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등 뒤로 소리 없이 쇄도한 다리를 그가 베어 내기도 전에, 무언가 반대쪽에서 그것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휙 찢겨 나가면서 누군가가 그의 곁에 착지했다.

“괜찮나?”

키시아르가 착지하느라 굽혔던 다리를 펴며 유더를 위아래로 살폈다. 멀리서 뛰어오다 말고 몬스터를 보고서 놀라 멈추는 다른 각성자들을 보아하니, 무대 뒤쪽 정리를 다 끝내고 오던 도중 키시아르가 상황을 보고 이곳으로 먼저 뛰어든 듯했다.

유더는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살피는 사내를 향해 빠르게 설명했다.

“당연하지만 제 피가 아닙니다. 다친 곳도 아직은 없습니다.”

“여기 찰과상이 있는데.”

“그 정도는 손톱으로만 긁어도 생깁니다.”

무뚝뚝하게 반박하자 그제야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서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거의 다 끝냈고 누키조만 제압하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하는 사이에 놈이 몬스터 우리를 열었습니다.”

“몬스터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는 대상이지. 열면 본인도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 잠깐의 탈출에 눈이 멀어 부하들을 제물로 삼는 최악의 선택을 했군.”

“그래도 빠르게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유더의 힘만으로 몬스터를 해결하려면 몬스터 자체에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는 쪽이 빠르기에 어쩔 수 없이 기물을 파손해야 한다. 이미 지붕을 꿰뚫는 구멍을 내 버린 상태이기에 이 이상 더 부수는 건 위험하다 여겨 망설이는 중이었는데, 키시아르가 왔으니 이제 그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최대한 이 이상 건물을 부수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정리하도록 하죠.”

“그러지.”

키시아르가 큰 소리로 멀리서 겁먹어 멈춰 서 있는 각성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메르, 데일라! 처크! 벳!”

“네, 네?”

정확하게 이름으로 지목당한 이들이 깜짝 놀라 반응했다.

“이 몬스터는 소리에 반응하니 그곳에서 각자의 능력으로 최대한 소리를 내어 교란하도록. 그리고 뢰네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다리에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몬스터를 상대한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줄 테니…….”

키시아르의 명은 빠르고 신속했다. 그는 잠깐 사이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각성자들의 이름과 능력까지 모두 파악하고 기억한 상태였다. 그가 각성자 하나하나를 부르며 그가 어떻게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지 알려 줄 때마다 각성자들의 겁에 질렸던 얼굴이 점차 변화했다.

그 정도면 한번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덕이었다.

“혼자 떨어지는 일은 자제하고, 다리에 붙잡히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게 중요하니 방심하지 말도록.”

“네!”

반사적으로 대답한 각성자들이 어리둥절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이내 용기를 내어 뛰쳐나왔다. 그리고 키시아르와 유더 또한 약속이나 한 듯 등을 맞대고 섰다.

유더는 등을 통하여 느껴지는 키시아르의 체온을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의 약점이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사내는 그에게 물러나라 말하지 않았다. 어려울지언정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뢰와 감정이 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선명하게 흘러 들어왔다.

‘해낼 수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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