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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78화 (678/805)

678화

“주커만 경! 괜찮으세요?”

뒤에서 나단 주커만을 도우려 했던 마병단원들이 놀라 소리를 쳤다.

자신이 남들의 눈에 보이고 있단 걸 깨달은 은신 각성자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몸을 두르고 있던 능력이 모두 끊어졌다. 다시 은신하려 시도해도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만천하에 드러난 은신 각성자의 모습은 나단 주커만이 짐작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가 작고 늘씬한 체형. 긴 머리칼을 묶어 올린 여자가 부상을 입은 팔을 감싸 쥐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짐작치 못해 잔뜩 긴장감이 부푼 상황에서, 마병단원들에게 너무나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다행히 늦지 않고 때를 맞춘 모양이군.”

“단장님!”

단원들이 일제히 잃어버렸던 부모를 만난 아이처럼 소리쳤다.

잠시 후,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즈가 처음 투시 능력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아보았을 때는 모두들 당연히 그게 누키조 측 인물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맨 앞에 서서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키시아르가 단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눈에 띄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뒤를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따르는 각성자들 때문일까. 그들의 등장은 마치 신화를 다룬 그림의 한 장면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탈출하던 귀빈들과 누키조의 부하들조차 일순 현실감을 잊었을 때, 마병단원들이 또다시 다른 곳을 보며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유더!”

사람들은 그제야 키시아르의 곁에 긴 망토를 두른 채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인지했다. 그는 낯빛이 유령처럼 창백한 데다 몸 이곳저곳이 피범벅이라 엄청나게 으스스한 모습이었다.

보통은 큰 부상을 입었나 착각할 법도 한 모습이지만 유더를 잘 아는 이들은 그런 착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 몇 명을 상대했길래 저렇게 피가 많이 묻은 거야? 백 명쯤 상대했나?”

“난 한 놈 잡아서 죽기 직전까지 팼다는 데 건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닐 텐데.”

귀도 밝게 단원들의 쑥덕거림을 들은 유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릿발 같은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단원들은 그 즉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어어. 죄송합니다, 남작님. 우리가 상황 정리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그래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거든…… 아마……. 아직……?”

믿고 있는 이들이 왔다고 긴장이 풀려 농담까지 해 대는 단원들의 얼굴이 몹시도 해맑았다. 유더는 결국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작게 숨을 내쉰 뒤 시선을 돌렸다. 그건 ‘지금은 일단 넘어가겠다’는 신호였다.

유더의 시선이 향한 곳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공을 넘겨받듯 입을 열었다.

“크게 다친 이가 없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부상자가 없는 건 아닌 듯하니 빠른 정리가 필요하겠군. 그러기 위해선 우선…….”

붉은 눈동자가 누키조 패거리들과 모습이 드러나 버린 은신 각성자,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격투장의 각성자들을 천천히 훑었다.

“여기 있는 이들의 처리가 급선무일 테고.”

누키조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통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쪽 사람들뿐일 텐데… 대장은… 아래에 있던 이들은 전부 죽은 건가?”

“이곳의 주인은 스스로의 목숨만을 구하려다 자멸했다. 다른 이들은 전부 죽지는 않았으나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

“말도 안 돼……!”

키시아르의 간결한 설명에 누키조의 부하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충격을 받은 건 귀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키조가 죽었다고?’

도망을 치려 해도 앞과 뒤에 모두 마병단이 있으니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은 결국 앞다투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을 부르짖으며 난동을 피웠다.

“나는 누키조인지 뭔지 그놈이 누구인지도 몰라! 여기, 여기 있는 놈들이 나를 납치한 겁니다!”

“그래. 나도 그저 협박을 당했을 뿐이지 여기가 뭔지 몰라요! 정말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리지나! 뭐 하고 있는 거야! 너라도 어서 힘을 써서 길을 뚫으라고!”

개중 누군가가 멍하니 서 있는 은신 각성자를 향해 호통을 치기도 했지만 그녀는 누키조가 자멸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넋이 나간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리지나!”

“저 각성자를 다그쳐 봤자 얻는 건 없을 거야. 지금 이곳은 무력화 능력이 펼쳐져 있어 그 어떤 각성자도 힘을 쓸 수 없는 장소가 되었거든.”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대신 대답해 주자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아까 들었던 멈추라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완벽하게 은신 중이었던 각성자의 모습이 갑자기 드러나게 된 건 바로 그 목소리 이후부터였다.

바로 그 일을 해낸 무효화 각성자, 뢰네브가 키시아르의 손짓을 따라 각성자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계절에 조금도 맞지 않는 화려한 옷과 산발이 된 머리칼, 해골처럼 깡마른 몸.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도 투박하고 큰 장화를 신은 그녀의 시선은 나서기 전부터 어느 한 곳에만 못 박힌 듯 고정된 상태였다.

뢰네브는 리지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리지나 또한, 팔다리에서 흐르는 피는 아랑곳없이 뢰네브만을 보는 중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로만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들을 향해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뢰네브. 그리고 큐레이지나. 서로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랫동안 붙잡혀 있어야만 했던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어 다행이군. 내 보좌가 아니었더라면 진실을 온전히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그 말에 마병단원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누키조의 다른 부하들과 귀빈들을 먼저 포박할 것을 명했다.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해도 그 정도는 이 자리에 있는 마병단원 모두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유더는 아수라장이 된 풍경 속에서 넋이 나간 듯 서로를 보고 있는 두 여자를 응시하며 이곳에 오기 직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끄아아악!”

“대장!”

엘포킨스가 구멍 속으로 막 날아 들어가기 직전, 유더는 그를 향해 쏘아진 화살의 방향을 꺾어 누키조의 어깨에 처박는 데 성공했다. 누키조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자 그의 부하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괴… 괴물…….”

더 이상 공격해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만이 그들의 머리를 지배했다. 유더는 하나둘 무기를 늘어뜨리고 자신을 공포스레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 알아서 항복한다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

“…….”

“나는 마병단이다. 곧 바깥에서 지원이 도착할 테니 너희가 탈출시킨 귀빈들도 집에 돌아갈 기회는 얻지 못할 거야. 좋게 말할 때 포기하고 항복해라.”

정말일까. 눈치를 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유더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무기를 툭 떨구었다가는 발작적으로 무릎을 꿇고 웅크렸다. 유더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놈이었다. 유더는 그를 흘긋 쳐다본 뒤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변의 놈들도 하나둘 무기를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지 않는 놈도 있기는 했지만, 유더는 그런 놈은 변명 한마디 듣지 않고 단번에 두들겨 팬 뒤 날려 보냈다. 그 무엇도 그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괴물의 발걸음이 자신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누키조가 화살이 관통한 어깨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마병단이었다고……? 저놈이?”

그저 멍청한 호구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저놈은 애초부터 이곳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기에 잠입했던 것이다.

대체 새로운 단원 모집을 받느라 바쁘다고만 생각했던 마병단이 언제부터 이곳을 노렸던 걸까. 그걸 대체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누구 하나 언질해 주지 않았단 말인가.

비장의 무기를 귀빈들을 위해 보낼 게 아니라 제 곁에 붙여 두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모든 불운이 사실 계획적으로 자신을 노린 듯 여기게 마련이다. 누키조 또한 그러했다. 그는 억울해 미칠 것만 같은 심경으로, 자신의 적 중 누군가가 마병단에게 이곳의 정보를 몰래 빼돌려 알려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 돈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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