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유더가 지하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구멍을 뚫어 버린 덕에 내려가는 길 곳곳은 부서지고 무너져 엉망이 된 상태였다.
등불조차 없어진 어둠 속에서 초행길을 더듬어 나아가야 하는 상황은 마병단 측에 결코 유리하다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간 뼈에 새겨질 만큼 독하게 받아 온 훈련과 능력으로 그 모든 걸 순식간에 극복했다. 물론 거기에는 협업 중인 각협부대원들의 도움도 컸다.
가장 큰 도움이 된 이는 당연히도 투시 능력자인 선즈였다. 유더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힘은 어둠 속에서 앞을 밝게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묻힌 길의 구조와 그 너머에 숨어 있는 적의 머릿수를 세고 상세 위치를 파악하는 것까지도 가능할 만큼 발전한 상태였다.
그가 제일 앞에 나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멀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의 유무를 판별하고 위치를 언급하면 나머지는 미리 대응 준비를 했다. 어디서 적이 나타나도 먼저 대응이 가능하다는 건 정말 편한 일이었다.
선즈의 옆에 있는 에몬 또한 부싯돌을 튕기는 것처럼 짧고 빠른 불꽃을 순식간에 수십 개씩 터트리며 적을 상대하곤 했는데, 그 정확도와 속도가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을 정도라 시선을 끌었다.
물론 단체 대 단체로 보자면야 더 오랫동안 훈련을 거듭하고 그간 여러 경험을 해 온 마병단원들 쪽이 더 노련했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각협부대원들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각성자로만 이루어진 특수부대라는 말에 내심 그들의 실력을 궁금해했던 마병단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각협부대원들 또한 선즈와 에몬에게 전해지는 말로만 들어 왔던 마병단의 실력에 연신 놀라는 중이었다.
‘마병단은 어떻게 서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서도 적과 아군을 완벽하게 파악하며 저리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는 거지? 눈을 감고도 어떤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처절하게 굴렀다는 게 진짜인가 봐.’
‘각협부대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기에 당연히 우리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굉장한걸. 방심하면 안 되겠어. 여기서 혹시 저 사람들에게 뒤처지기라도 했다가 유더에게 들키면 훈련 3배감이다.’
그들이 서로의 실력을 곁눈질하면서도 빠르게 나아가는 사이, 사실 이곳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사람인 나단 주커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그들을 따라갔다.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이 힘을 써도 좋다고 허락한 때는 마병단의 힘만으로 도무지 처리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고 판단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저 모든 것을 지켜보며 키시아르가 없는 곳에서 그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게 부관의 역할이었다. 얼핏 보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호받아 가는 듯한 형상이지만, 실상은 반대라는 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음?”
거침없이 앞서 나아가던 선즈가 문득 고개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는 그를 향해 에몬이 물었다.
“왜 그래? 앞에 또 누가 숨어 있어?”
“아니……. 앞에는 아무도 없어. 다만…….”
미세한 아지랑이에 덮인 그의 눈동자가 누구도 볼 수 없을 어둠 너머를 꿰뚫어 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길이 아닌 벽 안쪽 너머에서 누군가 오고 있는 것 같아서.”
“벽 안쪽 너머라고?”
“비밀 통로인가.”
쿠르가가 혼잣말처럼 답을 말했다. 벽 너머를 계속해서 훑던 선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말대로입니다. 비밀 통로가 맞는 것 같아요. 이쪽 벽 안에 몇 겹으로 새로운 벽을 만들어 두어서 저의 힘으로도 금방 알아보기 어려웠네요. 사람의 모습이 보이니 이제야 알겠어요.”
선즈는 벽으로 다가가 서슴없이 눈을 감고 집중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땀이 맺혔다. 그는 통로로 진입하려면 아주 두꺼운 벽을 뚫어야 한다는 사실과, 현재 그 통로를 이용하여 다가오고 있는 이들이 이 위치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는 말을 하며 중요한 정보도 알려 주었다.
“통로를 이용해 탈출 중인 이들이 제법 많아요. 적어도 20명 정도는 될 것 같군요. 속도가 느리고 움직임이 혼란스러운 걸 봐서는 훈련받은 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맨 앞에 인도하는 자들이 있어요.”
현재 볼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끝이었다. 힘을 거둔 선즈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뒤로 물러났다. 마병단원들은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상황에 비밀 통로로 모시고 올라올 사람들이면 뻔하지. 단장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잡아 두라고 명하신 놈들 아니겠어?”
“벽쯤이야 뚫으면 그만인데, 누가 할래?”
“나. 내가 할 거야!”
“네 능력은 후폭풍이 너무 커. 벽 부수려다 건물 전체를 폭삭 주저앉게 할 일이라도 있어? 이런 건 내가 전문이거든?”
짧은 의논 끝에 마병단원 한 사람이 벽 앞에 섰다. 그가 빠른 속도로 벽의 몇 곳을 툭툭 두드리자 놀랍게도 손가락이 닿은 위치의 돌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불쑥불쑥 사라졌다가는 등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강제로 깨트렸을 때 일어날 충격 하나 없이 순식간에 사람이 지나갈 만한 구멍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각협부대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쿠르가가 간결히 설명해 주었다.
“건드린 물건의 위치를 이동하는 능력입니다. 처음엔 고작 나뭇잎 하나를 앞에서 뒤로 옮기는 정도밖에 못 했는데, 이젠 제법 쓸 만해졌죠. 저 힘으로 팔다리 관절을 움직여선 안 될 위치로 옮겨 버리는 것도 잘하거든요. 당하면 상당히 아픕니다.”
“…….”
쓸데없는 설명까지 추가한 덕에 절로 고통이 상상되어 오금이 저렸다.
‘아무리 봐도 실제로 당해 본 것 같은 설명 아냐? 훈련 과정에서 서로 그런 무자비한 공격까지 하는 건가?’
‘소름이 끼치는군……. 마병단은 정말 독하지 않으면 못 버티겠구나.’
“다 됐어! 가자!”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구멍을 뚫은 마병단원이 해맑게 외쳤다. 그들은 잡생각을 거두고 곧 통로로 진입했다.
선즈가 미리 투시로 보았던 통로의 탈출자들과 마주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구냐!”
귀빈들을 인도해 올라오던 누키조의 부하들이 경계하며 외쳤다.
몹시 힘겨운 얼굴로 시종들에게 업혀 올라오던 귀빈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 마병단원들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이야. 옷만 봐도 귀하신 분들 같은데 이런 곳에서 산책이라니. 요즘 산책로 유행이 먼지 가득한 비밀 통로로 바뀐 모양이네요?”
그들은 이제 예전처럼 귀족을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유롭게 빈정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누키조의 부하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버럭 소리쳤다.
“네놈들. 누구냐니까!”
“우린 마병단이다. 이곳에서 각성자를 상대로 불법 내기 격투장을 운영 중이라는 신고가 들어와 구출을 위해 왔다.”
쿠르가의 덤덤한 답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다채롭게 변했다. 맨 앞에 있던 누키조의 부하 한 사람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귀빈들을 보호해라! 탈출로를 뚫어!”
“그렇게는 안 되지.”
좁은 통로 내에서 누키조의 부하들과 마병단이 맞붙었다. 마병단원들은 이번에도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으나, 이번에는 그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존재했다.
그 변수는 능력을 조금 과하게 쓴 덕에 숨을 헐떡이며 뒤쪽에서 쉬고 있던 선즈가 별안간 고함을 지르면서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몬! 뒤에 조심!”
“뭐?”
에몬이 친구의 고함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그의 어깨와 가슴팍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공격당하듯 쭉 찢어져 나갔다. 다행히 안에 단단한 가죽 조끼를 입고 있었던 덕에 가슴은 보호되었으나, 팔은 어쩔 수 없이 피를 흘렸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물러나! 오른쪽!”
선즈의 외침과 함께 이번에는 에몬의 오른쪽에 있던 마병단원이 옆구리를 찌르는 공격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후에도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칼이 날아다니기라도 하듯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여러 사람이 나란히 서기 힘든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별안간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오다 보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피해가 상당했다.
“젠장!”
“대체 뭐야?”
선즈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아지랑이 같은 기운으로 덮어씌워졌다. 그는 곧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이 미지의 공격의 정체를 파악했다.
“우리 말고도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요!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는 보이는 것 같네요! 하지만 너무 빨라서…… 윽!”
말을 하다 말고 선즈가 별안간 들어온 공격을 피해 황급히 몸을 굴렸다. 그는 다행히도 제대로 피할 수 있었다. 선즈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빠르게 그를 감싸 분리했다.
“괜찮으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아무튼 저쪽에도 각성자가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은신한 상태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능력 같으니 모두 조심하세요!”
마병단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쿠르가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일단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먼저다. 선즈 대장님과 각협부대 분들께서는 뒤를 맡아 길을 막고 놈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상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각협부대원들은 이 예상치 못한 공격이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상당히 많이 다친 상태였다. 반면에 마병단원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뼛속 깊이 물든 훈련이 성과를 발휘하여 거의 멀쩡했다.
힘들기만 했던 훈련의 진가는 이런 데서 드러나는 법임을 모두 깊이 체감하며 신속히 쿠르가의 명에 따라 위치를 이동했다. 언제 날아올지 모를 보이지 않는 공격에 긴장감이 통로 안을 가득 채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즈가 또다시 무언가를 본 듯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저쪽에서 또 누군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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