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며칠 전, 키시아르 라 오르는 유더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예상한 바 있었다.
“샬로인은 오랫동안 남국과 전투를 치러 온 남부의 배타적인 기질과 오랫동안 외지인과 거래를 하며 발달해 온 무역의 거점다운 기질. 두 속성이 묘하게 섞인 곳이라 할 수 있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만연하며, 한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편인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하고 외부의 참견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 샬로인의 영주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내보이고 있는 태도였다.
“그들은 불법 내기 격투장과 마약에 연루된 이들이 잘못했다는 걸 알아도 확실한 명분 없이는 이쪽이 움직이도록 놓아두지 않을 거야. 불법과 결탁한 이들이 자신들의 내부에 있는 이상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이라 판단하기 때문이지.”
“네. ‘이전 게임’에서 이미 상대해 본 바 있습니다.”
남부 인간들의 그 짜증 나는 태도라면 유더도 할 말이 많았다. 이전 생의 마병단 지부를 남부에서도 특히 구석진 시골에 처박고, 내기 도박장과 마약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자신들의 일은 자신들이 해결해야 한다며 죽어도 외부 단체에는 문을 열지 않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던 건 마약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너무 커져 기어이 카치안 황제에게까지 불똥이 튄 이후였다.
유더는 그때의 그 짜증 나는 사건들을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이미 상대해 본 적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눈치챌 사람이었다.
과연 유더의 심경을 헤아린 듯 미소를 지은 사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억지로 밀고 들어가 쓸어 버린 뒤에 수습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러고 나면 마병단 남부 지부가 이후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가 몹시 어려워지겠지? 그래서 나는 사전 작업을 조금 해 두는 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네.”
“사전 작업이라면…….”
“명분을 세울 상황을 만드는 거지.”
명분을 세운단 말은 언뜻 느리고 쓸모없는 겉치레 행위처럼 느껴진다. 말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게 현실이 아니던가?
하지만 키시아르는 그 느리고 쓸데없는 행위의 필요성과 효과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그 작은 명분 하나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이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살리기도 했네. 저들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 꺼내 들 명분은 오래도록 이어진 관습과 권리에 대한 법일 확률이 높아. 그렇다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똑같이 우리가 가진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을 만든다. 반박할 수 없이 완벽한 명분은 우리에게 최고의 칼이자 방패가 될 거야.”
과연 키시아르 라 오르의 판단은 이번에도 옳았다.
샬로인의 일은 샬로인에서 처리하는 것이 법도이며, 이 술집과 이 땅은 자신들의 것이니 외부인에게 문을 열지 않을 권리가 있다 주장하던 이들이 엘포킨스의 외침 앞에서 일제히 조용해졌다.
엘포킨스의 외침은 마병단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완벽한 명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마병단이 그 어떤 타 단체보다도 우선 처리권을 가질 수 있는 각성자였으며,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확실하게 토해 냈다. 동시에 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스스로 언급한 이상 더는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샬로인의 치안 경비대 병사들이 말문이 막혀 멈칫한 사이, 마병단 남부 지부의 책임자 쿠르가는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각성자가 나타났으니 이제부터 이곳은 우리의 담당이다! 저 각성자를 내려오도록 하여 돕고, 나머지는 아래로 진입한다! 막는 이가 나타나면 황제 폐하와 단장님의 명을 거역한 것으로 간주하고 밀어 버려도 상관없다!”
“좋아!”
“주커만 경과 각협부대 여러분께서도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즈를 비롯한 남부군 각협부대의 병사들이 힘차게 외쳤다. 나단 주커만 또한 그들의 곁에서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각협… 뭐? 지금 저놈들이 뭐라는 거야?”
“빌어먹을. 그냥 일단 막아! 절대로 못 들어가게 하란 말이야!”
악을 쓰는 소리와 함께 누키조의 부하들이 체면을 걷어차고 무기를 뽑았다. 그들이 사납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병단원들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하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의 놀란 비명과 함께 두 집단이 그대로 맞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인 격차가 나는 싸움을 보게 되었다.
“자.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날개에서 힘을 빼고 이제 접으면 될 것 같네요. 좋아요. 구조 끝.”
엘포킨스는 자신을 돕기 위해 반쯤 무너진 지붕 위까지 올라와 능력을 사용해 준 마병단원들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땅에 발이 닿으니 그제야 날개에서 기다렸다는 듯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심장이 쿵쾅대도록 흥분한 감정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그는 그것을 고통이라 느끼지 않았다.
주변은 그야말로 지하에서 보았던 광경과 다를 바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마병단원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을 막아서는 누키조의 부하들을 아주 화려하게 제압하고서 주변을 지킬 몇 명만을 남겨 둔 채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 몇 명은 상황을 수습하는 한편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누키조의 다른 부하들을 상대했는데, 분명 이쪽의 수가 훨씬 적은데도 너무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나서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으아아악~!”
또다시 마병단원의 공격에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누키조 패거리의 비명을 배경 삼아, 엘포킨스를 구출해 준 이들이 날아서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며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단장님과 유더가 신호가 될 분을 선택해서 보낼 테니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했을 땐 사실 좀 상상이 안 되었었는데, 이렇게 확실하게 신호를 주는 분을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 날개가 아직 아프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괜찮, 아요. 그보다 다른 분들은…….”
“다들 내려갔으니 이제 곧 다 끝날 거예요. 당신이 할 일은 다 했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엘포킨스는 격투장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의 생김새가 다른 각성자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눈에 띄는 편임을 알게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병단원들은 그런 그를 보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유더를 처음 봤을 때와도 비슷했다.
‘하, 하긴. 같은 마병단이라니까… 당연한 거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마병단원들이 유더에게 감화된 쪽에 가깝다. 하지만 엘포킨스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는 각성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된 듯한 감격에 울컥 목이 메면서도 힘겹게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그럴까요……? 제가 여러분께 도움이 된 것… 맞겠죠?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금방 구출되어서 올라올 수 있겠죠?”
엘포킨스가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레 묻자 마병단원들이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럼요. 아래에 누가 있는데요. 진짜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훈련받은 사람들도 지시받은 대로 움직이기 힘든데 당신은 그걸 단번에 끝까지 해낸 거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아, 혹시 유더가 마병단에 들어오란 소린 안 하던가요?”
“하긴 해, 했는데…….”
“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마병단원들이 흥분한 얼굴로 각자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는 이내 엘포킨스를 훑어보았다. 그건 격투장에서 언제나 겪었던 상품을 판단하는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할 이를 바라보는 친밀한 이웃 같은 시선에 더 가까웠다.
“흠. 마침 시간도 남으니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설명 좀 듣고 지원서를 써 볼래요?”
“그게… 저는 글도 모르는데요.”
“괜찮아요. 저희도 마병단에 처음 지원할 때까진 글 같은 건 하나도 몰랐어요. 다 여기 들어와서 배운 거예요. 지원서 작성은 저희가 도와줄 테니 대답만 해 주면 돼요. 지원할 거죠?”
이제 그만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엘포킨스는 또다시 뜨거워진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지원하고 싶어요…….”
끄아아악. 그들의 뒤에서 또다시 마병단원의 공격에 당해 도망치던 누키조 패거리의 고함과 욕설이 주변을 수놓았다. 그들을 어떻게든 비호해 보려던 샬로인의 치안 경비대는 이미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지 오래였다.
누키조 패거리의 등쌀에 밀려 강제로 돌아갈 뻔했던 샬로인 사람들은 이제 그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자리까지 잡았다.
“허. 살다 보니 누키조네 놈들이 당하는 걸 보는 날이 다 오네.”
“저래도 되는 거야?”
“황제 폐하의 명을 어겼다잖아. 치안 경비대도 아무 말 못 하고 가던걸.”
“꼴 좋다.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저번에 아들을 저기서 잃은 사람이 뭐라고 하다가 붙잡혀 가서는 사라졌었잖아. 그때도 처벌을 안 받더라니, 기어이 이렇게 천벌을 받네그려.”
“저 사람들이 마병단이라고 했지?”
여태까지 마병단 남부 지부를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금기처럼 여겼던 이들이 구경을 하며 한마디씩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남부에서 마병단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 소리였고, 동시에 계획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 새끼들. 어딜 감……! 억!”
부서진 통로 사이에 숨어 있다 막 기운차게 달려들려던 누키조의 부하 몇 사람이 쿠르가의 주먹 한 방에 날아가 벽에 부딪쳐 기절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숨어 있던 걸 미리 알 수 있어서 편하군요.”
“아, 뭘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마병단에게 미리 숨어 있는 이들의 위치를 알려준 선즈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지하 격투장이 있는 아래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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