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왔군.”
아무런 감정도 없는 한마디. 그런데도 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엘포킨스가 북받치는 감정에 울컥하는 와중에도 주변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유더는 무어라 거칠게 고함을 지르는 누키조와 사방에서 달려드는 살기, 그리고 허둥지둥 탈출을 위해 움직이려 드는 귀빈석의 움직임을 빠르게 훑은 뒤 무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엘포킨스. 준비되는 대로 시작해라.”
그가 걸친 옷에는 현재 몸을 단단히 보호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으나 유더는 그것을 딱히 큰 방해 요소라 느끼지는 않았다. 갑옷을 입은 자가 알몸으로 싸우는 자보다 꼭 더 유리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무대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퍼부어지는 공격을 자연의 힘과 검, 그리고 온몸을 이용하여 손쉽게 막아 냈다. 일대 다수를 상대하는 중임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데다 오히려 때때로 달려드는 자들을 압도하기까지 하는 움직임을 보며 엘포킨스는 초식 동물 사이에 뛰어든 맹수를 떠올렸다.
누군가 도망치며 바닥에 쏟은 술을 순식간에 얼렸다가 녹이며 누키조의 부하들을 서로 미끄러져 부딪치게 만들고, 그 틈을 타 뒤통수를 내리치려 하는 자를 보지도 않고 뒷발질 한 번으로 날려 보낸다. 포위망을 만들면 손을 한 번 휘둘러 철로 만든 무기를 죄다 꺾어 버리거나 혹은 날아온 단검을 잡아채 주인보다 더 정확한 움직임으로 되돌려주니 도무지 가둘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뒷골목 잡배들답게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여 날카로운 깨진 유리 조각을 흩뿌리거나 무작정 달려들어 발목이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눈을 찌르려는 자들도 존재했다. 유더는 그런 공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악착같은 공격에는 두 배로 더 악마 같은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을 뿐이었다.
허공에서 유더를 노리고 날려 보낸 비수 여러 개가 별안간 방향을 꺾어 주변에 있던 다른 부하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누키조의 부하들이 기겁하여 탁자 아래로 몸을 굴려 도망치는 광경을 보면서 엘포킨스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살아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어제 유더가 언급한, 오직 엘포킨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어제 이렇게 말했다.
‘너, 내일 날 수 있겠어?’
‘네?’
‘내일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겠냐는 소리야.’
엘포킨스에게는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있었다. 그 날개는 탈출을 우려한 누키조 패거리 때문에 날갯죽지가 한번 크게 부러졌고, 이후 여러 번의 전투를 거치며 여기저기 비틀리고 금이 가 흉측한 꼴이 되었다.
재생 능력이 있다 해도 어쩌면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만큼 심했던 그 부상을 키시아르는 겉보기에는 거의 문제가 없어 보일 만큼 완벽하게 치유해 주었다. 하지만 뼈가 전부 본래 위치로 되돌아오고 깃이 다시 자랐다고 해서 곧바로 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엘포킨스는 날개가 생긴 이래 제대로 날아 본 적이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다 각성했던 그 첫 번째 순간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자신에게 날개가 생겼다는 사실도, 필사적으로 날아서 도로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각성 이후에는 그의 모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더더욱 날개를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신호가 떨어지면 곧바로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겠느냐고?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엘포킨스는 슬쩍 날개에 힘을 주어 보았다. 뼈가 붙은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져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해 볼게요.’
어디를 향해 날아야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은인들이 원한다면 반드시 해내고 싶었다.
‘그래. 네가 알려 준 대로라면 내일의 첫 시합은 아마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되겠지. 우린 격투가 시작되자마자 그 즉시 모든 걸 중단시키고 지하에서부터 바깥까지 일직선으로 통할 수 있는 통로를 뚫을 예정이야. 그리고 너는…….’
새카만 심연과 같은 눈으로, 유더가 말했다.
‘그 통로를 이곳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이용할 수 있는 한 사람이지.’
그렇기에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유더의 설명에 엘포킨스는 전율을 느꼈다.
아무도 그의 날개를 쓸모 있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엘포킨스는 지하 3층에 갇힌 뒤 처음으로 편안한 밤을 보내며 밤새도록 날개를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뼈가 굳어 버린 듯 아주 조금 움찔거리다 말았고 오늘 아침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끈질기게 노력하니 점차 반응이 생겼다. 힘을 주어 날개를 움직이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깃이 펄럭였다.
엘포킨스는 심호흡을 하며 유더가 뚫어 둔 천장의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하게 딱 사람 한 명 정도가 통과할 만한 구멍이었다.
‘날 수 있어. 해야만 해!’
그의 날개가 날아오르는 연습을 하려는 새들처럼 점점 더 크게 펄럭이는 동안, 유더는 누구도 엘포킨스가 있는 무대 위로 갈 수 없도록 버티고 선 채 쏟아지는 공격을 상대했다.
일대 다수의 전투는 보통 한 명 쪽이 불리하게 마련이지만 그의 상황은 다소 달랐다.
급소만을 정확하게 가격하는 주먹. 저보다 훨씬 큰 상대의 무기를 손쉽게 흘려보낸 다음 순식간에 힘줄만 베어 무력화하는 검술.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난무하며 예상치 못한 사이 적의 움직임을 뒤흔드는 불과 물, 바람과 땅.
유더는 온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전신을 모두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바로 그런 모습일 터였다. 그의 움직임만 보면 마치 어디서 무슨 공격이 이루어질지 모두 알고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그야말로 싸우기 위해 태어난 놈이 아닌가?
한시도 쉬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부분은 전혀 없이 완벽하게 절제된 움직임을 보며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점잔을 빼며 예쁘게 얌전 떠는 칼질이나 하는 기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저 괴물은 이런 규칙 없는 난전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기절하여 쓰러진 놈의 뒷덜미를 가차 없이 붙잡아 퍼부어지는 공격 앞에 대고 방패처럼 휘두르는 포악함 앞에서는 그 누키조조차 오금이 저렸다. 저건 누가 보아도 악마에 가까웠지, 정의의 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절대적인 강함. 망설임도, 자비도 없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
누키조의 부하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점차 유더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초식 동물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을 잡아먹는 맹수 하나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저 검은 머리칼의 괴물은 타고난 맹수였고, 그들은 그저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한번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자 공포와 불안감이 집단 전체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빌어먹을! 물러나지 마! 왜 저놈 하나를 못 잡는 거야! 상처 하나 못 입히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주춤대며 기가 꺾여 물러나는 부하들을 보던 누키조가 기가 막혀 고함을 질렀다.
“버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려! 물러나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귀빈들이 몸을 피할 틈은 어떻게든 벌어야 한다. 그들을 탈출 통로로 피난시키기 위해 ‘비장의 무기’까지 함께 보내 둔 상태라 그놈이 돌아올 때까지 더더욱 시간 벌이가 필요했다. 설령 오늘 여기서 부하들을 모두 잃는다 해도 그들의 신뢰만 잃지 않는다면 누키조는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
‘지붕까지 뻥 뚫렸으니 지금쯤 바깥이 시끄럽겠지. 그쪽에 있을 놈들이 들어오려는 놈들을 잘 막아 주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마치 그런 누키조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신들린 움직임으로 싸워 대던 유더가 고함을 질렀다.
“엘포킨스! 아직인가?”
“아뇨! 이제 되었습니다!”
되다니, 뭐가?
유더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누키조는 그제야 엘포킨스의 존재를 인지했다.
‘저! 저놈이 왜 여기 있어?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다 뒤져 가고 있었는데?’
끔찍한 상처투성이였던 몸은 간곳없이, 엘포킨스의 몸은 마치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던 그날처럼 깨끗하고 건강했다.
단단한 깃털이 빽빽이 들어찬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엘포킨스의 등 뒤에서 기지개를 켜듯 쭉 펼쳐졌다. 모두가 그 광경에 잠시 넋을 잃고 시선을 향했을 때,
“으아아아아!”
엘포킨스는 비로소 땅을 박차고 뛰며 힘껏 날개를 펼럭였다.
그의 발이 붕 떠오르며 제대로 날아올랐다.
휘청이면서도 목표를 향하여 상승한 그의 몸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누키조는 곧 알아차렸다. 놈은 천장에 뚫린 구멍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저, 저……! 쏴, 쏘라고!”
누키조가 고함을 지르자 각성자용 쇠뇌를 유더에게 열심히 쏴 댔던 이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어어. 화살을 저쪽 놈에게 다 써 버렸는데……!”
“뭐라고? 벌써?!”
누키조의 경악 속에서 엘포킨스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날개를 펄럭이면 펄럭일수록 그의 움직임은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하나 찾았다!”
“빨리 쏴!”
멀리서 겨우 남아 있는 쇠뇌 화살 하나를 찾아낸 누키조의 부하가 그것을 겨누었으나, 엘포킨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막 온 힘을 다하여 유더가 뚫어 둔 구멍에 다다른 순간, 장전된 화살이 발사되었다.
엘포킨스는 격통을 예상하면서도 방향을 바꾸지도, 날개에 준 힘도 풀지 않았다.
“……으아악!”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비명이 들려온 건 다른 쪽이었다.
천장의 구멍을 막 통과하며 고개를 내린 엘포킨스는 그를 향해 쏘아진 화살이 방향을 돌려 누키조를 꿰뚫은 것을 보았다.
그것을 해낸 이는 당연히도 한 손에 바람의 힘을 휘감은 유더였다.
“올라가!”
엘포킨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입 모양으로 명령했다.
엘포킨스는 그 명에 화답하여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위만을 쳐다보며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다. 부서진 천장과 바닥 조각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지하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보는 하늘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다가는… 곧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엘포킨스는 이제 검은 범고래 술집 지붕 위에 있었다.
“저게 뭐야?”
“세상에. 날개 달린 사람이야!”
아래서 손가락질을 하며 경악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엘포킨스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날갯죽지가 부러질 듯 아팠지만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너무나 차고 달콤한 바깥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 뒤, 크게 외쳤다.
“나는 각성자입니다! 이곳 아래의 불법 격투장에서 방금 탈출했습니다! 도와주세요!”
그건 키시아르와 유더가 그가 바깥으로 나가는 즉시 외치도록 시킨 한마디였다.
드디어 전부 해냈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자신만의 임무를 성공했다는 엄청난 감각에 떨면서, 엘포킨스는 눈물을 흘렸다.
비로소 탈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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