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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72화 (672/805)

672화

무대 위에서 난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기묘하게 인상이 흐릿한 장신의 사내가 외부에서 들어온 첫 참가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모두 여기까지 온 건 돈 때문이란 소리군. 그렇지?”

“뭐… 그렇죠…….”

재크의 친구이자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젊은 각성자들, 그리고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용기를 낸 각성자 몇 명. 사연은 다양해도 결국 목적은 같았다. 돈이었다.

큰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왔음에도 정작 당일 마주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눈앞의 사내는 참으로 뛰어난 언변으로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으며 나이는 몇이고 고향은 어디인지까지 줄줄 말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와 이렇게까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눠도 되는 걸까? 약간의 의문이 고개를 쳐들긴 했지만 장신의 사내는 그런 걱정조차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사실 그다지 특별한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말이야, 목숨과 돈 중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장신의 사내는 사용하는 말투도 기묘했다.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고대풍 옷차림 위에 허름해 보이는 외투만 하나 둘렀는데도 지체 높은 귀족 같은 말투가 마치 평생 써 온 듯이 잘 어울려 더더욱 나이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재크와 함께 여기까지 온 이들 중 한 사람이 쭈뻣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목숨이죠.”

“다른 이들은?”

“저도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목숨이지만…….”

“살아야 돈도 벌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죽은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당연히 모두 목숨 쪽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장신의 사내는 바로 그 답을 바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음. 정말 좋은 답이야. 우리가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건 대체 왜 물어보는 겁니까?”

“간단해.”

사내가 편안히 기대어 앉아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무대 위로 올라가는 길 쪽을 향하여 가 닿은 순간, 대기실까지 들려오던 온갖 소음들이 별안간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뭐지? 첫 참가자들이 모두 의아해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는 동안, 사내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오늘 격투를 하지 못할 예정이거든. 이곳이 곧 폐업할 예정이라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

“헥스! 바우트! 어디 있어? 이 자식들!”

그때, 문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대기실로 뛰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침묵 속에서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기존 참가자들이 사내를 따르듯 일제히 벌떡 일어나 섰다. 첫 참가자들이 당황하기도 전, 장신의 사내가 어깨에 대충 기대고 있던 낡아 빠진 검을 순식간에 유려하게 한 바퀴 돌려 바로 잡았다.

“뭐야 이놈들. 헥스와 바우트는 어딜 가고 너희들만 여기 있어?”

“잠깐… 저놈들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놈들이잖아!”

당혹한 누키조의 부하들 중 누군가가 구석에 서 있던 뢰네브와 엘포킨스를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누키조 패거리들의 머릿속에 일제히 이 사태를 알게 되면 눈이 뒤집힐 대장의 환상이 떠올랐다.

‘이놈들이 단체로 탈출한 걸 들키면 우린 다 죽는다!’

개중 가장 권력이 강한 부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네놈들… 미친 거냐? 감히 탈출을 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어느 놈이냐. 누가 너흴 여기까지 풀어 데려왔어!”

“난데.”

장신의 사내가 손을 들었다.

“강제로 격투에 참가하면서 갇혀 있는 게 고통스럽고 싫다기에 풀어 주었는데, 그러면 안 되나?”

“뭐……?”

“누구도 자유로운 이들을 여기에 강제로 가둘 권리는 없을 텐데 말이야.”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기가 막히게 분위기를 우습게 만들었다. 누키조의 부하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겨우 다시 소리를 쳤다.

“알고 있겠지만 너희가 여기서 빠져나갈 길 따윈 없어! 저 미친놈 빼고 나머지는 지금이라도 도로 돌아가면 봐준다! 죽기 싫으면 빨리 돌아가! 특히 너, 여자! 친구 보기 싫어? 엉? 말을 잘 들어도 될까 말까 한 걸 왜 사고를 쳐! 비실한 년 혼자 여길 나갈 수나 있을 것 같아?”

“…….”

“좋게 말할 때 이쪽으로 와! 당장!”

그들은 당연히 뢰네브가 말을 들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뢰네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키조의 부하는 그녀가 혹시 귀가 멀었나 의심하며 다시 한번 ‘친구 얼굴을 보기 싫느냐’는 말을 들먹였다. 그건 어차피 그녀의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래야 말을 잘 듣기에 하는 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이 ‘친구’를 들먹이면 언제나 얌전해지곤 했던 뢰네브는 처음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그 말에 반문했다.

“너흰 지금까지 한 번도 큐릴을 보여 준 적 없잖아. 그런데 내가 뭘 믿고 지옥 같은 곳으로 다시 가야 하는데?”

“뭐?”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뼛속 깊이 축적된 분노가 엉긴 처절한 고함이 대기실 내에 울려 퍼졌다.

뢰네브는 분노로 떨며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채 외쳤다.

“나는 너희들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 사람을 납치해 여기로 데려와 강제로 싸우고 죽이게 만든 너희 같은 쓰레기들의 말은 더 이상 안 들어. 그래. 죽일 테면 죽여 봐! 죽는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난 나갈 거야! 나갈 거라고!”

누키조의 부하는 이제 뢰네브도 단단히 미쳤다고 판단했다.

“저년이 기어이 정신이 나갔군. 됐다. 그냥 모두 잡아 죽여 버려! 대장한테 가서 당장 알리……!”

그 순간, 대기실을 가르며 빛이 한번 번득였다.

누키조의 부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그는 다른 부하들에게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그대로 급소를 베여 쓰러졌다.

“…으, 으아악!”

쓰러진 이를 본 다른 부하들이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아비규환 속에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다시 부드럽게 돌려 어깨에 걸친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각성자들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자, 이곳이 폐업해야 하는 이유는 이 정도쯤 되었으면 충분히 모두 이해했으리라 믿네. 그러면 이제 탈출해 볼까?”

분위기를 파악할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이곳이 정상적인 격투장이 아니라는 건 이제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첫 참가자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와 충격이 대기실까지 뒤흔들었다.

“으으윽!”

“뭐, 뭐야?”

누키조의 부하들이 당황하는 동안 장신의 사내는 이전과 조금 다른 눈빛으로 무대 위쪽을 바라보았다. 보는 이가 절로 눈을 의심할 만큼 부드럽고도 다정한, 한편으로는 염려와 신뢰가 담긴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닿은 건 찰나였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내 단단하고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되돌아와 입을 열었다.

“자, 엘포킨스. 앞장서게. 이제 자네의 차례니까.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알겠습니다!”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 속에서 엘포킨스가 힘차게 고함을 지르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무대 쪽으로 달려 나갔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저놈 잡아!”

누키조의 남은 부하들이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이미 쓰러진 걸 보았음에도 크게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의 인식 속 각성자들은 언제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빚과 돈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리숙한 약자였기 때문이었다.

쓰러진 이도 검에 당해서 쓰러졌을 뿐이니 그 미친놈만 조심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익숙해진 인식은 함정을 만든다.

이곳은 지금 지하 3층이 아니며, 억제의 힘이나 협박은 더 이상 각성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고 달려든 대가는 곧 뼈저리게 치르게 되었다.

“누가 누굴 잡는다고?”

“너흰 절대 못 가.”

여태까지 조용하기만 했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각성자들이 울분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누키조 패거리들이 휘두른 검 따위는 육체적으로 훨씬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고함을 지르면서 마음껏 누키조 패거리들을 때려 부수는 각성자들의 울분이 한참 동안 대기실을 울렸다.

승리는 당연히도 그들의 몫이었다.

다른 각성자들을 뒤로하고 힘차게 달려 나간 엘포킨스는 때마침 대기실 쪽으로 내려가던 재크와 스쳐 지나가며 곧 무대 위에 당도했다.

그곳에 설 때 그는 언제나 차라리 죽고 싶다고 소망했다. 고통과 피 냄새만이 그가 기억하는 격투장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기억했던 모든 광경이 송두리째 무너진 곳에서, 당당하게 검 한 자루를 들고 남의 피로 주먹과 얼굴을 물들인 유더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왔군.”

아무런 감정도 없는 한마디. 그런데도 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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