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유더는 격투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가쁘게 울려 대는 종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재크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머리 위로 개의 귀가 불쑥 솟아난 소년이 허둥지둥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유더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제 손에 쥔 검, 그리고 그것을 감싼 뭉툭한 검집 끝이 가리키는 격투장의 천장이었다.
내기 도박을 하러 온 이들은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무엇을 뜻하는 줄도 모르면서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죽여! 죽여 버려!”
“짐승 놈이 2성 각성자를 찢어 범해 버리는 꼴을 보여 줘!”
“내 돈을 네놈에게 다 걸었어! 토해 내지 못하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유더가 행한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제일 먼저 눈치챈 이는 누키조였다.
“저 녀석, 불 쓰는 놈이잖아? 검은 분명 치워 놨던 것 같은데 누가 저놈한테 검을 써도 좋다고 한 거야?”
“그건 잘…….”
“아니 잠깐. 저 검…… 다시 보니 어제 팔아 치우라고 했던 그거잖아! 저 빨간 보석!”
분명 빼앗아서 팔아 치우라고 말했던 겉멋 든 싸구려 검을 유더가 어디서 찾았는지 부득불 들고 나왔다는 사실에 누키조는 눈이 튀어나올 듯 충격을 받았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 검은 분명 어제의 그 물건이 맞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후드를 벗어던지고 드러난 유더의 모습을 보고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때는 음울하고 볼품없어 보였던 놈이, 고대 성화풍 옷을 입고서 얼굴을 드러낸 채 시선을 마주하자 마치 오래된 그림 속의 소드 마스터라도 된 것처럼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건 그의 몸이 의외로 공들여 단련한 듯 단단했고, 보기 드물게 몸 선과 자세가 무척 곧았기 때문이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놈들을 보아 온 누키조의 눈에도 그놈의 육신은 제법 값이 나가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쭉 뻗은 싱싱한 젊은이의 몸에 누구나 흥분하게 마련이다. 특히 그 몸에 알 수 없는 음란한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곧 피투성이가 될 예정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저따위 검이 오늘의 역사적인 첫 무대에 같이 오르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누키조는 몹시 분노했다. 그가 상상했던 오늘의 첫 격투는 불꽃과 짐승의 치열한 대결 끝에 불꽃 쪽이 패하여 흥분한 손님들 앞에서 옷이 찢기고 팔다리가 바스러지는 피의 축제였지, 검을 들고 어설프게 설치는 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쓰지도 못할 검을 무슨! 어떤 멍청이가 저걸 다시 준 거야!’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2성 각성자의 치부를 피가 튀는 뜨거운 싸움 끝에 만천하에 드러내어야 한다. 그 과정이 최대한 아슬아슬하고 수치스러우면 수치스러울수록 좋았다. 자극적인 무대를 위하여 의상까지 공들여 지정해 두었는데, 볼품없는 칼싸움에 그 정성이 다 바스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올랐다.
혹 호구 2번에게 어제 약을 너무 먹여서 불꽃이 안 나오게 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저 검을 어디서 다시 주워 왔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알려 준 게 아니고서야…….
“누구야! 어느 빌어먹을 놈이 저걸 가져다준 거냐고! 헥스와 바우트, 지금 어디 있어? 그놈들이 오늘 지하 3층 담당이잖아!”
“아직 안 돌아왔어. 아직 무대 뒤쪽에 있는 게 아닐까?”
“당장 오라고 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누키조의 부하들이 허둥지둥 무대 뒤를 향해 달려갔다. 누키조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주변의 다른 이들을 향하여 바쁘게 손짓을 보냈다.
“저 검, 쓰면 안 된다고 해! 반항하면 막아서라도 빼앗아!”
시합 시작을 알리던 종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사회자까지 입을 다물자 평소였다면 제자리를 지켰을 부하들이 누키조의 흥분한 모습을 보고 웅성거리며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리 조금씩 흐트러지니 귀와 발톱을 내밀고서 유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망설이던 재크가 당혹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왜 저러는 거지?”
“시작 안 해? 아직이야?”
손님들마저 무언가 평소와 다른 기색을 느끼며 불만의 속삭임을 토해 내던 바로 그 순간.
유더가 고개를 돌려 누키조가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누가 보아도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비웃음이었다.
“……!”
누키조는 머리가 띵해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저, 자식이 지금 날 비웃어……?!”
이제 모두의 시선이 쏠릴 만큼 쏠렸고, 대장인 누키조가 흐트러지면서 다른 부하들 또한 평소의 평정이 깨져 버렸다. 유더가 노린 건 바로 이 작은 틈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부드럽게 움직여 한 바퀴를 돌렸다. 검집에 싸인 검이 교본에나 나올 법한 정확한 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가, 재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끝이 다시 한번 천장을 찌르듯 겨눔과 동시에, 검 손잡이 쪽에서부터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온 불줄기가 검의 몸체를 타고 위를 향해 폭발적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물론 그 불꽃은 평범한 나무 정도의 높이를 넘어가지 못했다. 반투명한 보호의 마법진이 무대 주변에서 일제히 발동되며 그것을 막아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힘이 맞부딪치는 충격으로 인해 일어난 소요였다.
보통 각성자들의 힘은 무대 안쪽에서만 발휘된다. 가끔 무대 밖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힘이나 탈출 시도자가 나오면, 주변에 설치된 보호 마법진이 그것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처음에 알려 준 엘포킨스도 말했듯, 이 마법진의 힘은 어느 정도 강한 각성자의 힘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유더는 당연히도 자신을 억누르는 보호 마법진의 힘을 깰 자신이 있었다.
그가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쥠과 동시에, 보호막에 막혀 일그러진 모양대로 휘몰아치던 불꽃이 이전보다 더욱 사납게 보호막을 뚫고 나갈 듯 몸부림쳤다.
엄청난 광경에 모든 이들이 아연해하기 무섭게 기어이 보호막에 금이 가다가는, 끝내 거대한 파동을 피처럼 토해 내며 깨져 버렸다.
보이지 않는 힘이라지만 그것이 깨져 나갈 때의 충격은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었다. 막혀 있던 힘이 사라지며 자유로워진 불꽃이 거침없이 더욱더 높은 곳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으아악!”
“보호 마법이 깨졌어!”
놀란 도박꾼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누키조는 황급히 손을 뻗어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빌어먹을, 누가 막……!”
- 콰아앙!
그 순간, 불꽃이 기어이 관중석을 넘어 천장을 꿰뚫었다.
태양신이 쏘았다는 빛의 화살처럼 천장을 뚫고 나간 불꽃은 이어서 그 다음 층을, 또 그 다음 층을 향해 가차없이 진군하는 기마병처럼 덤벼들었다.
쾅. 쾅. 쾅. 연속하여 세 층을 뚫고 올라간 불꽃이 마침내 진짜 천장에 닿았다.
그리고는 기어코…….
- 쿠와아아아!
아무것도 막지 않을 하늘까지 뚫고야 말았다.
마치 이 지하에서부터 입을 쩍 벌리고 하늘을 삼킬 듯이 쏘아져 날아가는 찬란한 불꽃. 그것에 나선형으로 휘감긴 검. 마치 신검의 재래처럼 보이는 그 광경을 인간의 몸으로 재현해 낸 호구 2.
너무나 엄청난 광경을 보고 나면 사람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누키조는 당당히 불꽃에 휘감긴 검을 들고서 서 있는 놈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진이 깨졌다고…? 저번에 비싼 돈을 주고 보강한 이후로는 단 한 놈도 못 뚫었던 그걸… 형체도 없는 불꽃 따위로 깨? 심지어 천장이 뚫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그건 바야흐로 동부에서 유더가 나한의 환상을 깰 때 사용했던 불꽃 기둥의 작은 축소판이었다. 범위를 축소하여 크기는 더 작았지만, 이전보다 유더의 힘이 강해진 만큼 위력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졌다.
유더는 이만하면 검은 범고래 술집 주변은 물론이고 샬로인의 어디에 있어도 그 불꽃을 볼 수 있을 거라 확신할 만한 틈이 지난 뒤 힘을 거두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되찾은 누키조가 외쳤다.
“손님들을 보호해! 저놈을 잡아! 경기는 중단한다!”
“알겠습니다!”
누키조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엄청난 광경을 목도하고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부하들도 그제야 떨리는 팔다리를 움직여 달려 나갔다.
‘어딜.’
유더는 무대를 넘어 올라오는 누키조의 부하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들고 무서운 척 설치기만 할 뿐,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뒷골목 잡배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유더가 검집을 뽑지조차 않고 휘둘러 댈 때마다 검을 내리치려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가거나 얻어맞아 뒹굴었다. 어떻게 검과 검집이 서로 맞부딪치는데 검 쪽이 튕겨 나가는지 모를 노릇이었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유더는 검집으로 한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 한 발로 달려드는 놈을 걷어차 날려 보내는 한편, 다른 한 손으로는 힘을 발휘해 적들이 든 철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뭐, 뭐야! 내 검이 왜……!”
“아아악!”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검 때문에 놀라 손을 놓아 버리는 놈들이 속출했다. 멍청하게도 빈손이 된 놈들은 유더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무대 위로 기어 올라온 놈들을 거의 다 처치했으니 슬슬 주변을 두른 띠 밖으로 나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구석에 몸을 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재크가 보였다. 유더는 달려드는 마지막 한 놈의 발을 걸고 안면에 주먹을 꽂은 뒤 겁을 집어먹은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이 재크에게는 마치 죽음의 선고처럼 보였다.
“대, 대체 누구세요. 전 그냥 여기 돈만 벌러 온 거예요…… 죽이지 마세요.”
“그럴 말을 할 정신이 있으면 눈 똑바로 뜨고 무대 뒤로 돌아가 친구들을 챙겨.”
유더가 혀를 차며 바닥에 쓰러진 누키조의 부하들 중 한 놈의 칼을 수거해 소년에게 던졌다. 재크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여긴 이제 오늘로 문을 닫을 예정이다. 자기 목숨은 알아서 챙기고, 올라가는 길에 마병단원들을 만나면 보호를 요청해.”
“예?”
“제국군이나 기사들도 괜찮고.”
“예?”
“마병단에 합격하면 다시는 이런 곳에 발 들일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럴 시간도 없겠지만.”
“……네?”
“가!”
재크는 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더 물을 틈조차 없이 엉덩이를 찔린 강아지처럼 놀라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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