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저 사람이……?’
나그란의 별 거점에서 지내는 동안 2성 각성자를 여럿 보았다. 때문에 2성을 지닌 이들이라고 딱히 뭔가 특별한 게 존재하지 않으며, 알파 각성자든, 오메가 각성자든 겉만 보아서는 구별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호명되어 앞으로 나서는 저 각성자는…… 진짜 2성을 지닌 사람이 맞기는 할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그만큼 분위기가 흉흉했고, 또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유드레인이라 불린 이의 곁에 서 있던 키가 엄청나게 크고 인상이 흐릿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런, 아쉽군. 내가 첫 순서이길 바랐는데.”
……이거, 대놓고 시비를 거는 건가? 재크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사이 유드레인이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제가 첫 번째가 아니었더라도 첫 번째가 되도록 만들었을 테니 상관없습니다.”
맙소사. 이쪽은 한술 더 떴다.
그러나 다행히도 키 큰 사내는 그 말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던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흐음. 그러면 상대라도 내가 되길 간절히 바라야겠는데.”
……아예 노골적으로 싸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재크는 격투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싸움박질을 시작할까 싶어 온몸을 긴장시켰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두 사람에게 쏠린 게 암암리에 느껴졌다.
유드레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 큰 사내를 응시했다. 재크는 그 모습이 마치 상대를 한입에 씹어 삼킬 수 있는지 아닌지 재 보는 무시무시한 맹수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러길 바라십니까?”
나와 싸우고 싶었느냐? 가소로운 놈. 결투 제안은 언제든 받아 주마. 재크의 머릿속에서 그 말은 이렇게 해석되었다.
“나야 늘 바라고 있지. 이런 장소에서 함께할 수 있는 게 보통 기회는 아니잖나? 물론 내가 줄 건 칼과 주먹 같은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그래. 늘 싸우고 싶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면 좋겠군. 아무나 사용하는 보통의 평범한 무기 따위로 네놈을 상대하진 않겠다. 목 씻고 기다려라! 키 큰 사내의 말도 이렇게 해석되었다.
유드레인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렸다.
“그렇게 말하시니 다음 순서가 조금 기대되려고 하는군요.”
“그래. 어디…… 내 운이 어떻게 발휘될지 지켜볼까.”
그것으로 그들의 대화는 곧 마무리되었다.
재크는 그들이 본래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발 저 유드레인이란 작자의 상대가 자신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을 따름이었다.
‘딱 봐도 엄청 강해 보여. 절대 저 사람 상대는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운명은 재크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소년은 옛날부터 꼭 이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불운에 어김없이 꼭 당첨되었던 편이었다.
“그의 상대가 될 이는 누구인가- 첫 공을 뽑아 본 결과는-! 오오!”
과장된 목소리와 함께 무대 바깥에서 큰 소리로 유드레인의 상대가 될 각성자의 이름이 불렸다.
“2성 각성자와 함께 오늘 무대의 첫 시작을 열 이는 바로~! 오늘 처음 이 격투장에 도전장을 낸 젊은 신예! 개의 귀와 꼬리, 이빨과 발톱을 자유자재로 드러낼 수 있는 짐승 같은 힘을 지닌 각성자! 그 이름은- 재크!”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온갖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재크는 깜짝 놀라 바닥에서 그대로 튀어 오를 뻔했다. 주변에 서 있던 친구들이 재크를 향해 불안과 걱정의 시선을 던졌다.
“재크! 너야!”
“…괜찮겠어? 힘들 것 같으면 기권하는 게…….”
재크는 사냥감을 확인하듯 자신에게로 향한 유드레인의 시선에 겁을 집어먹었다. 금방이라도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역시나 여기서 이겨서 받을 돈을 쥐고 돌아갔을 때 기뻐할 다른 동료들의 얼굴이었다.
“…….”
재크는 결국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막 무대를 향하여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등 뒤쪽에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서 들어온 건 웬 해골처럼 깡마른 꽃무늬 드레스 차림의 여자와, 반대로 아주 특이한 생김새를 지닌 날개 달린 남자였다.
‘뭐지? 참가할 각성자들은 이미 다 들어온 게 아니었나?’
재크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들어온 첫 참가자들이 어리둥절해했으나 아래층에서 올라온 각성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모르겠다. 문제가 없으니 지금 온 거겠지…….’
재크의 짧은 의문은 곧 사라졌다. 지금은 제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재크는 뻣뻣한 팔다리를 움직여 무대로 향했다. 자신과 함께 발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는 유드레인의 뒤쪽에서 아까 시비를 걸던 키 큰 사내가 슬쩍 말을 걸었다.
“내가 상대가 아니라 아쉽게 되었군.”
정말 징한 놈이었다. 한결같이 유드레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원수를 져도 거하게 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따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그래…… 조심하게. 다시 볼 때 혹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었다면 내 마음이 정말 많이 아플 테니까.”
내 손에 죽을 때까지 다른 놈 손에 죽는 일이 없도록 건강 보전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흔히 쓰이는 증오의 욕설이다. 왜 저런 자에게 기회가 가지 않고 제게 먼저 기회가 온 걸까. 재크는 조금 울상을 지었다…….
다행히 유드레인은 그쯤에서 그자에게 더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재크는 그를 뒤따라가듯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무대로 올라가는 밝은 빛과 환호성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심장이 쿵쾅대며 갈비뼈가 부서질 것처럼 뛰어 댔다.
“너. 몇 살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유드레인이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 질문은 분명 재크를 향한 게 맞았다. 벌써부터 기선 제압을 하려 드는 걸까. 재크는 움찔 놀랐다가 애써 당당히 어깨를 펴고 최대한 강하고 사납게 보이도록 대답했다.
“열여덟이다! 왜!”
“그것밖에 안 되었으면서 굳이 왜 여기서 돈을 벌려고 하지? 다른 일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 그걸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 남이사!”
“네가 여기 와 있는 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나?”
……뭘까. 이건 마치 재크에게 가족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이 있는 걸 알고서 묻는 것 같지 않은가? 뭔가 이상했지만 재크는 애써 그 묘한 위화감을 지우고 더욱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일이 허락받을 사람 따윈 없어! 그냥 한번 이기고 나면 돈만 받아서 갈 거라고!”
“허락도 안 받고 몰래 나왔단 소리군. 눈치는 한없이 어둡고.”
“……지금 날 욕하는 거지?!”
“그래.”
“그러는 당신도 돈 벌려고 여기 와 있는 건 똑같잖아!”
재크가 씩씩대며 항의하자 유드레인이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서늘한 표정이 그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글쎄…….”
“뭐, 뭐야?”
“여긴 살인도 허용되는 격투장이야. 그 무게를 알고 있나?”
“…….”
“네가 죽은 다음을 진지하게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더라면 이런 곳엔 오지 않았겠지. 어제 계약하고 나서 돌아갈 수 있었던 게 마지막 기회였을 텐데, 그걸 굳이 걷어차고 오다니. 본래대로였다면 넌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죽었을 거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유드레인의 분위기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눈앞에 있는데도 존재감이 너무나 희미하여 보이지 않는 칼이 목젖 바로 위에 드리운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것만으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재크는 대체 제가 어제 계약했다는 걸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해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서 함께 걸음을 멈춘 유드레인이 한 발짝 앞에서 그를 돌아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를 가르친 사람이 말하기를,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지. 중요한 건 그다음이라고 말이야.”
“…….”
“그러니 오늘 네가 저지른 실수가 무엇인지 잘 보도록 해라. 이런 기회가 살면서 또 주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까.”
그가 재크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몇 살도 안 될 적은 차이에 불과할 터였다.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대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처럼 세월의 무게를 품은 저 눈빛은 뭘까.
높으신 분들을 앞에 둔 것처럼 반박하기 어려운 이 무서운 기분은 또 무어란 말인가.
재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유드레인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급한 욕설과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하여 먼저 나아갔다.
“나왔다!”
“드디어 나왔어! 저자가 그 2성 각성자인가?”
유더는 수많은 각성자들의 목숨을 앗아 갔을 무대에 드디어 섰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무대는 주변을 화려한 끈과 울타리로 장식해 두어 마치 케이크를 올려 둔 접시를 연상케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군.’
머리 위로 드리운 촛불들에서 자극적인 향이 났다. 목소리를 크게 키우는 마도구를 손에 든 이가 유더가 선 무대 바깥을 빙글빙글 돌며 무어라 분위기를 돋우는 말을 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의 구조만 빠르게 훑어보았다.
관중석은 무대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앉은 형태였으며, 가장 높은 곳은 무대에서 보기 어렵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는 걸 보아 그곳이 바로 귀족들이나 돈 많은 이들이 앉는 ‘귀빈석’인 듯했다.
여기저기 칼을 찬 누키조 패거리들이 눈을 번득이며 유더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더는 그 속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누키조를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위치. 기억해 두어야겠군.’
잠시 후, 재크가 빠져나와 그의 앞에 섰다. 아까 들은 말 때문인지 주근깨가 어린 소년의 얼굴은 다소 걱정스럽고 창백해 보였다. 유더의 정체와 뜻을 가늠할 수 없어서인지 의문과 공포에 찬 눈빛이었다.
‘뭐, 걱정 마라. 여기가 오늘 네 무덤이 되진 않을 테니까.’
“-옷을 벗어라! 옷을 벗어!”
경기 시작 전, 유더가 걸치고 있는 후드를 향해 야유가 쏟아졌다. 유더는 짧게 숨을 내쉰 뒤 후드를 벗어 내던졌다. 재크가 입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옷이 드러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이 옷을 별로 입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지.’
어차피 잠시 후면 다 끝날 일이다.
유더는 격투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가쁘게 울려 대는 종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재크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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