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화
뭔가가 이상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그란의 별 남부 거점에서 머무르다 빠져나와 이제는 마병단의 1차 시험 합격자가 된 소년, 재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나름대로 일이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뭔가 이상하지?’
소년에게 있어 어제는 정말 모든 고생이 싹 씻기고 성공만 남은 것 같은 날이었다.
서부에서 함께 지냈던 형, 누나들과 함께 거점에서 빠져나와 샬로인까지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오는 데 성공했고, 마병단원 지원서도 태연하게 잘 제출했다. 지부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엔 정말 많이 떨렸었지만 1차 합격을 받고 나자 그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 이후에 돌아간 숙소에서 주인이 별안간 갑자기 ‘도시를 방문한 이들이 많아져 자리가 모자라다. 돈을 더 내든가, 아니면 나가 주어야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돈이 부족해지긴 했지만 다행히 그걸 해결할 만한 좋은 곳도 찾아냈다.
이 번화한 남부의 대도시에선 누구나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내기 격투장이라는 게 존재했다.
지켜야 할 어려운 규칙도 없고 그저 이기기만 하면 돈을 벌어 갈 수 있다니! 그간 서부의 험난한 대삼림에서 살아가며 나름대로 몬스터 상대까지 해 본 그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느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곤 형을 비롯한 다른 형, 누나들이 그간 우릴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가 갚을 차례야! 2차 시험에 최종 합격할 때까지만 머물 돈이 필요할 뿐이니 두어 번만 싸우면 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무도 모를 거야.’
재크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지닌 비슷한 나이 또래의 각성자 서너 명과 함께 그곳을 찾아갔다. 그들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격투장 측에서는 각성자 전용 격투에 참여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들어 보니 비각성자와 각성자가 싸우면 비각성자 쪽이 훨씬 위험할 수 있어 각성자 전용 격투장을 따로 만들었다는데, 이길 때마다 받는 돈도 그쪽이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이거라면 한 번만 싸워도 충분하겠어!’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젊은 각성자들은 흥분하여 당장 그쪽으로 참가하고 싶다고 밝히고 계약서에 이름을 썼다. 그들이 계약하는 데 도움을 준 리지나라는 관리인은 어쩐지 그런 모습을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여겼는지, ‘정말로 싸울 수 있겠느냐’고 은근슬쩍 몇 번이나 물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그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 느끼게 될 테니까.
‘그래서 오늘 숙소 주변을 돌아보고 온다는 핑계로 여기까지 시간 맞춰 온 건 좋았는데 말야…….’
그들 같은 첫 참가자들을 지하에 있는 격투 대기실까지 데리고 가 준 건 어제 만난 리지나였다. 리지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는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여기까지 왔으면 뭐, 다음은 알아서 해야겠죠.’ 하고 말하고는 이내 앞장을 섰다.
그때부터 재크의 감은 미묘하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그들은 마치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조금 부끄럽게 생긴 의복을 받았다. 오늘 격투의 설정이 고대 시절의 전투이기에 그걸 입어야 한다고 했다. 가슴과 배, 다리가 훤히 드러난 복장이 요상했지만 딱 한 번뿐이라 생각하며 입었다.
그들이 난생 처음 입어 보는 옷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리지나도 무척 바쁘게 주변을 돌아다녔다.
“지금쯤 올라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왜 아직 안 오지? 이상한데…….”
대기실 안쪽 문을 바라보며 자꾸만 뭔가 이상하다 말하는 그녀에게 재크는 슬쩍 다가가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요?”
리지나가 깜짝 놀라 휙 돌아보았다. 일순 그녀의 모습이 잠시 흐릿하게 일그러지다 다시 선명해지는 듯 느껴져 재크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뭐였을까. 하지만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그녀가 전에 없이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
“미안한데, 지금은 아주 바쁜 시간이에요. 기척 없이 다가오는 건 좀 자중해 주시겠어요? 깜짝 놀라게 하는 바람에 찔려 죽을 수도 있는 곳이 이곳이거든요.”
“어어,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죠. 지금까지도 안 오고 있는 참가자들 쪽이 문제일 뿐.”
“아……. 저희가 끝이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죠. 문제가 생겼다면 연락이 왔을 텐데 그런 것도 없고…, 나는 이곳 이상은 아직 넘어갈 수 없는데…….”
머리를 짚은 채 무어라 중얼거리는 리지나의 눈빛이 일순 몹시 어두워졌다. 재크가 어딘지 모르게 싸한 기분을 느끼던 찰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아무튼 당신들 같은 첫 참가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재크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저와 친구들은 이 대단히 멋지고 웅장한 장소에서 딱 한 번 싸우고 돈만 받고 나가면 그만인데, 저 리지나라는 관리인의 태도를 비롯해 이 공간 자체가 뭔가 영 묘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 찝찝한 기분을 친구들에게 막 말하려 했을 때였다.
대기실 안쪽 문이 열리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섰다. 한눈에 보아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 노련한 각성자들의 모습에 첫 참가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와……. 저 사람들하고 우리가 싸워야 되는 건가?’
갑자기 사라인 대삼림에서 상대했던 몬스터가 별것 아닌 듯 느껴졌다. 재크와 친구들이 기가 죽어 있는 사이, 리지나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말했던 ‘아직 오지 않은 참가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던 듯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듯 참가자들 뒤쪽을 훑다가 짜증스레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또 참가자들만 올려보내고 술을 처먹으러 갔나…….”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을 인솔해서 데려와야 할 또 다른 관리자가 오지 않아 그리 짜증이 난 듯했다. 리지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착한 이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몹시 어둡고 지쳐 보였으며, 살기 등등했다.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다문 이들을 보며 재크는 또다시 무어라 말하기 힘든 싸한 감각을 느꼈다.
‘……진짜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람? 이 격투장…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그때, 문득 어디선가 뺨을 찌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건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각성자들 중에서도 유독 어두컴컴한 후드를 뒤집어 써 음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에게서 날아온 듯했다.
‘뭐…… 뭐지? 왜 날 노려보는 거야?’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마치 여기 있어서는 안 될 놈을 잡아낸 것만 같은 진득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재크는 난생 처음 느껴 본 그 진득하고 무서운 시선에 기가 죽어 슬그머니 다른 이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부디 자신이 싸우게 되었을 때 상대가 저 시커먼 각성자만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전부 다 왔군요.”
참가자의 머릿수를 다 센 리지나가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그녀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미리 외워 둔 것처럼 아무 감정 없이 쏟아지는 말은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포장된 듯 보여도 안에는 ‘여기서 죽어도 격투장 측은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 은근슬쩍 내포되어 있었다.
“이곳 바로 옆에는 무기 창고가 있어요. 무기가 필요한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골라 나갈 수 있으니 가서 고르도록 하세요. 격투가 시작되면 호명된 이부터 나가면 됩니다. 따로 진행을 돕는 이들은 여기 없고, 나가면 알아서 다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제 역할도 여기까지군요.”
리지나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녀는 참가자들을 등지고 이렇다 할 인사 하나 없이 걸어 나갔다.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쌀쌀한 태도였다.
마치 두 번 다시는 볼 일 없는 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참가자들만이 남겨진 대기실은 깊은 바닷속처럼 조용해졌다. 재크는 바지 자락에 땀에 젖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지금이라도 참가를 취소할 수는 없을지 조금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 되지. 다곤 형이 얼마나 노력해서 우릴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재크는 그간 다곤을 비롯한 다른 형과 누나들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져 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번 돈을 가져갔을 때 기뻐할 그들의 얼굴 또한.
‘부모조차 괴물 같다고 버린 나를 형과 누나들만은 받아 주었어. 도망치면 안 돼. 여기서조차 도망칠 정도의 근성으로…… 마병단원은 어떻게 되겠어?’
주먹을 꽉 그러쥐며 옆을 보자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듯한 나그란의 별 출신 다른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호흡을 하며 서로의 무운을 빌었다.
이윽고 가려진 무대 앞쪽에서 큰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꽃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엄청난 환호성이 대기실 문까지 뚫고 들려왔다.
재크는 깜짝 놀랐다가, 이내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가라앉혔다.
‘내가 첫 순서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첫 순서는~!! 이곳에 와 주신 특별한 귀빈들께서도 기대하고 계실~ 바로 그~! 2성! 2성 각성자입니다~!!!”
놀란 감정을 토해 내는 감탄사. 환호성. 박수.
그리고 재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2성 각성자? 그게 누군데?’
그 답은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알려 주었다.
“-그가 오메가인지, 알파인지는 지금부터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그 이름은, 유드레이이이인!”
“…….”
바깥의 환호는 딴 세계의 일인 듯 싸늘하기 그지없는 대기실 속에서 한 사람이 낮고 짧은 숨소리를 흘렸다. 마치 비웃음 같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재크는 그가 아까 자신을 이유 없이 노려보았던 바로 그 각성자임을 깨닫고 어깨를 흠칫 굳혔다.
‘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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