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다음날, 누키조 패거리가 유더가 있는 방문을 열기 위해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가 가만히 눈을 뜨자 이미 눈을 뜨고 있던 키시아르가 마주친 시선 사이로 입술 위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대며 ‘쉿.’하고 장난스런 미소를 흘렸다.
‘이놈의 문. 우그러져서 더럽게 안 열리네. 저번에 뒈진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젠장. 새로 들어온 놈은 뒈질 때 뒈져도 얌전하게 좀 갔으면 좋겠구만.’
‘아. 어제 들어온 놈들은 2성 있는 놈들이잖아. 이 방에 있을 놈이 아마 오메가일 것 같다고 그러던데, 대장 기대가 엄청난 모양이더라.’
‘아, 그래서 내보내기 전에 몸 검사를 꼼꼼하게 하라고 그러셨구만.’
‘솔직히 궁금하긴 하거든. 들어가면 아랫도리 검사부터 해 볼까?’
노골적으로 저질스러운 억양을 담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무표정하게 열릴 듯 말 듯한 문짝을 응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아, 열렸다.”
그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누키조 패거리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 보자. 약을 그리 먹었다는데 설마 벌써 뒈진 건 아니겠…… 뭐, 뭐야?!”
검은 머리칼의 각성자, 호구 2가 혼자 죽은 듯 늘어져 있을 줄 알았던 방 안에는 한 사람만 있지 않았다. 분명 옆방에 따로 잘 가두어 두었던 호구 1이 당당하게 호구 2와 함께 드러누워 있는 광경을 보며 누키조 패거리들은 기절할 듯 놀라 뒤집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놈들이 왜 같이 있어!”
“글쎄? 깨어 보니 여기 있던데.”
호구 1이 뻔뻔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그런데 누키조 씨가 그리 자랑하던 숙소치고는 너무 시설이 열악해서 마음에 안 들더군. 장기 숙박을 할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대체 어떻게 호구 1이 여기에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누키조 패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마주쳤다.
“……일단 제압해!”
“어딜.”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쥔 주먹을 휘두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이 호구 1의 미친 발언에 집중하는 사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호구 2가 날 듯이 다가와 턱 아래를 올려붙였기 때문이었다.
-뻐억.
골이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두 사람이 사이좋게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작게 휘파람을 분 키시아르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깔끔하군. 저 턱들로 빵을 씹는 건 앞으로 포기해야겠어.”
“가시죠.”
유더는 쓰러진 이들의 몸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빼앗았다. 열린 문 너머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키시아르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쓰러진 두 사람을 가뿐하게 넘어 우아하게 걸어온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손은 괜찮나?”
“이 정도로는 문제 없습니다.”
누키조 패거리는 물건을 보는 눈이 더럽게 없었다. 그들은 유더의 검은 가져갔을지언정, 정작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인 장갑은 그대로 두었다. 약과 뢰네브의 힘만 믿고 제대로 묶지도 않고, 손을 보호해 주는 마법의 힘이 걸린 장갑까지 그대로 두고 갔으니 이 정도쯤이야 나무토막을 맨주먹으로 쪼개는 것보다도 쉬웠다.
그들은 빠르게 주변을 돌며 잠긴 문을 열었다. 제일 처음으로 연 문은 당연히도 엘포킨스가 갇혀 있던 방이었다.
“아…….”
“약속했던 대로 왔다. 사슬을 풀어야 하니 손 내밀어.”
“정말로 와 주셨군요.”
엘포킨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묶여 있는 손발을 내밀었다. 그는 힘없이 풀려 바닥으로 추락하는 굵은 사슬에서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는 이내 사납고 힘찬 얼굴로 유더의 뒤를 따랐다.
“몸상태는 어때.”
“어제 치료해 주신 덕에 아주 좋아요. 날개도 다 붙었고… 어제 시키신 일을 하는 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엘포킨스가 힘차게 날개를 펄럭거리자 깃털이 날렸다. 본래의 색을 되찾은 그의 깃털은 비수로 써도 될 만큼 크고 억센 모습을 자랑했다.
“그래. 좋아. 다른 이들이 모두 풀려나면 그 다음은 알고 있겠지.”
“네!”
잠시 후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풀려났다. 그들이 긴장감과 환희에 찬 얼굴로 자유로워진 손발을 움직이며 감격을 만끽하는 사이, 유더와 키시아르는 마지막 남은 중앙 계단 바로 앞쪽의 방으로 향했다.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듯 뻑뻑한 열쇠구멍 속에 열쇠가 꽂혔다. 그대로 힘을 주어 비틀자 곧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뢰네브의 모습이 드러났다.
“…….”
뢰네브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문 너머에 선 유더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더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능력은 거두고, 이제 그만 나오시죠.”
그제야 꿈에서 깬 것처럼 뢰네브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쇠약해진 몸을 움직여 침대 끝을 잡고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문 가까이로 다가왔다.
문 안쪽과 문밖을 가르는 가느다란 한 줄의 선.
한참 동안 그것을 노려보던 뢰네브는 마침내 입술을 꽉 깨물고는 그 선을 성큼 넘어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깊은 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눈물을 참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깨달았는데요. 능력을 안 쓰고 다니는 건 이런 기분이었군요. 엄청, 편안하네요.”
“…….”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바깥에 나올 땐 신발이 꼭 필요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발이, 엄청 차가워요.”
뢰네브가 입고 있던 치렁치렁한 긴 치마 아래는 맨발이었다. 유더는 누키조 패거리가 그녀에게 다른 모든 건 다 넘치도록 가져다 주었으면서도 신발만은 주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도망칠 상상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
“잠깐 기다리시죠.”
유더는 그가 머물렀던 방으로 돌아가 기절한 놈들 중 한 놈의 신발을 벗겨 왔다. 뢰네브의 발에는 조금 컸지만 그래도 못 신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발을 신으며 뢰네브는 비로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되었습니다. 그보다… 어제 이곳에 갇힌 다른 각성자들을 모두 찾아보았는데, 당신의 친구분은 없더군요. 어쩌면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계속 찾아볼 생각입니다.”
“아…….”
잠시 주먹을 쥐었던 뢰네브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렇군요. 그래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여기 같이 갇혀 있었다면… 얼굴을 끝까지 안 보여주려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 사실만으로도 전 충분히 괜찮아요. 큐릴을 대신 찾아봐 주시고 알려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제가 죽는다 해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그런 거창한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유더는 짧게 고개를 저은 뒤 그녀를 데리고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차림새가 남다른 뢰네브를 향해 시선이 제법 몰렸지만 각성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꼴을 하고 있든, 당장 죽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깡마른 뢰네브의 모습을 보면 그녀 또한 이 격투장의 피해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탓이었다.
“자. 이렇게 모두 나와 주었군.”
키시아르가 모든 이들을 돌아보며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도로 얼굴을 변용한 상태였으나, 말투만은 평범한 용병처럼 굴던 것을 그만두고 평소의 그와 다름없이 돌아온 상태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 있어도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었어. 필요한 때에는 마음껏 능력을 써도 된다는 뜻이지. 누키조 측에서 이곳에 갇힌 이들의 능력을 억압하던 수단이 이제 사라졌거든.”
그 말과 함께 키시아르가 뢰네브를 향해 씩 웃자 그녀도 어색하게 미소를 마주 돌려주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어제 알려주었듯, 격투장 내부에는 여전히 탈출을 저지할 만한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지. 그렇기에 지금부터 우리 두 사람은 먼저 위로 올라갈 생각이네. 당신들은 어제 들은 대로 움직이되, 단독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고 신호가 올 때까지 약속된 곳에서 대기하도록.”
“아. 네, 네!”
지시하는 말투에 자연스럽게 반응해 대답한 각성자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마병단이 처음 생겼던 그때의 단원들을 연상케 하는 어색한 반응을 보며 키시아르는 부드럽게 입술 끝을 올렸다.
“우리의 목표는 여기서 단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 곁에 선 이들이 어제까지는 강제로 싸워야 했던 사이라 해도 오늘은 같은 사지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동료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적은, 우리의 위에 존재한다.”
그가 마지막 말을 끝내며 조용히 손가락 하나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머리 위. 그곳은 각성자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을 격투장이 있는 곳이었다.
각성자들의 눈빛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한층 힘을 주어 대답했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병단원들에게 첫 인사를 건네던 그날의 키시아르도 이렇게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또 같았다.
유더의 입술 끝 또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위를 향하여 뛰어 올라갔다.
그다음은 어려울 일이 없었다. 그들은 당당하게 2층까지 올라간 뒤, 마주친 놈들의 대부분을 손쉽게 때려 눕혔다. 대부분은 당당히 활보하는 그들의 정체가 같은 누키조 패거리라 생각하고 방심했기에 가능했고, 혹 얼굴을 알아보는 놈이 있더라도 어려울 건 없었다.
“응? 뭐야. 격투를 준비해야 할 각성자들이 왜 여기로 왔지?”
어젯밤 두 호구를 누키조에게로 데려갔던 술통 관리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가라고 하던데.”
유더가 짤막하게 대꾸하자 그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났다.
“누가 말입니까?”
“내 감이.”
“뭐?…… 컥!”
관리인이 뒤에서 내리꽂힌 물건에 의해 그대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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