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뢰네브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다가는 이내 뚝 그쳤다.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기괴했다.
유더는 반쯤 미친 듯 보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사람이 여기에 갇힌 건 아마도 마병단 모집이 본격적으로 공표되기 전이었을 것 같군. 무작위 격투에서 각성자 전용 격투가 분리되기 전의 시기……. 죄수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능력을 끝없이 쥐어짜였는데도 아직 죽지 않은 건 그만큼 각성한 힘이 강력했기 때문이겠지만… 본인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였겠지.’
그녀가 살던 곳이 한창 분쟁 중이던 나라의 위험 지역인 이상 마병단은 물론, 평범한 각성자에 대한 소식조차 제대로 접하기 어려웠을 터다.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 못한 경우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이런 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찾아낸 이상, 지금과 같은 상태로 방치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건 인재 낭비였다.
‘여태까지 버틴 건 정신력이 그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뜻.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충분히 엄청난 발전을 이룰 거야.’
유더는 뢰네브의 능력을 몹시 높이 평가했다. 지금 정도의 힘만으로도 그녀는 죄를 저지른 이들이나 스스로의 능력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런데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그땐 능력 조절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는 모든 각성자들이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를 원하겠지. 폭주하는 이들이 생겨도 내가 아까 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진정시킬 수 있을 테고.’
물론 모든 능력이 다 그렇듯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정신계, 혹은 정과 분류에 속하는 능력자들이 으레 그렇듯 육신은 한없이 연약했고 아직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능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약점은 흐려질 테고, 그녀는 무기 없이도 수많은 각성자들의 두려움을 사는 존재로 올라서게 되리라. 숨만 쉬어도 돈을 버는 건 거기에 덧붙여질 작은 덤 정도였다.
각성자의 힘만 억제할 수 있다고는 해도, 유더와 키시아르 정도 되는 이의 능력까지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스스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더는 판단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뢰네브. 우린 당신이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함께 하도록 하죠. 그리고 제 생각엔 아마 당신 또한 우리를 잘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누키조 패거리를 부술 때 서로 돕자는 얘깁니다.”
유더에게는 이전 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 일의 성공 가능성을 늘려줄 이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뢰네브는 엘포킨스만큼이나 그 일의 적임자였다.
간결한 제안에 뢰네브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뒤 그녀는 대답 대신, 별안간 스스로 뺨을 때렸다.
유더가 드물게 당혹하여 그녀의 손을 잡아 말리자 붉게 부어오른 뺨과 타격의 충격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산발 아래서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네. 너무 좋은 말뿐이라 현실감이 안 들어요.”
“…….”
“이게 또 꿈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벽에 머리를 박아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잖아요. 각성자만을 위한 단체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돕고 큐릴을 찾아 원수에게 복수를 해 주겠다니…….”
“그렇다고 뺨을 때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러면 뭘 해야 이게 진짜라는 걸 믿을 수 있는데요?”
뢰네브는 마병단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이니 단의 증표를 보여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각성자의 힘을 보여 주는 건 각성자라는 증거가 될 수 있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뚜렷한 도움이 되진 않을 듯했다.
유더는 잠시 멈칫한 뒤 눈길을 돌려 키시아르와 눈을 마주쳤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으나 그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에 더 가까웠다.
키시아르가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그렇다면 이게 절대 꿈일 수가 없는 증거를 보여 주면 되겠지?”
그런 게 존재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사내가 손에 끼고 있던 얼굴 변용 용도의 마도구를 비틀었다. 얼굴 위로 흐릿하게 덧씌워져 있던 마력이 이지러지며 갈색 머리칼이 금발로, 평범해 보였던 눈동자가 아름다운 붉은빛으로 선명한 색을 입었다.
“어…….”
잘난 얼굴을 솔직하게 드러낸 키시아르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뢰네브를 향하여 본래의 말투로 우아하게 말했다.
“자. 꿈에 등장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얼굴 아닌가?”
“……그, 렇네요.”
어이없는 방식이었지만 키시아르의 얼굴은 이번에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뢰네브는 이게 꿈이 아니며 현실이 맞다는 사실을 그 즉시 인정했다.
“오르 제국의 귀하신 분들께선 황금 같은 금빛 머리칼에 눈에 띄는 눈동자를 지니셨다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분이신 것 같은데 그런 분이 저 따위에게 거짓말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오진 않으셨겠죠. 좋아요. 여러분이 절 죽이든 살리든, 전 여기서 나가서 큐릴의 안부만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하세요. 해 볼 테니까요.”
뢰네브는 이곳에 아주 오랜 시간 있었으나 밖에 나간 적이 없었기에 엘포킨스보다도 이곳의 구조나 정보를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계획에 무엇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이였다.
유더는 그녀에게도 그녀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을 전달했다. 그들이 내려왔던 천장 구멍을 향해 다시 훌쩍 뛰어오르자 뢰네브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요. 전 이곳에 그리 오래 있었는데도 거기를 열어서 다닐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알았어도 능력 말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몸이니 그리 높은 곳까진 기어 올라갈 수 없었겠지만요.”
“몰랐던 쪽이 당연하니 그리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약속한 대로 내일, 약속한 때가 왔을 때 다시 보죠.”
“……네. 내일.”
뢰네브가 아주 낯선 단어를 읊듯 중얼거렸다.
이후에도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나머지 방의 천장 블록을 모두 열어 보며 갇혀 있는 이들의 위치와 정체를 확인했다. 갇혀 있던 이들은 총 30여 명 정도로 대부분이 짐승처럼 목과 발이 묶여 있었다. 엘포킨스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이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뢰네브 이외에는 서쪽에서 온 이가 더 없고, 대부분은 일반 격투장 이야기를 듣고 한번 참여해 볼까 해서 왔던 이들이나 마병단 지원에 관심을 가지고 온 이들이었어. 역시 타이누에서 인신매매 시도를 끊어 두길 잘했군.’
그들 중 가장 오래 있었던 이도 고작해야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수많은 이들이 빠르게 소모되어 죽었으리란 사실을 추측케 했다.
이런 곳에서 엘포킨스와 뢰네브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각성자들은 유더의 요청에 몹시도 협조적이었다. 갑자기 천장을 열고 뛰어내린 이들이 마병단이라는 정체를 밝히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읊조린 이들이 대다수였다. 드디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고마움과 내일이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젖은 이들의 얼굴은 엘포킨스와 비슷한 환희로 빛났다.
유더는 갇혀 있던 이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모조리 기억해 두고서 다시 자신의 방 쪽으로 돌아왔다. 언제라도 내려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천장 블록을 바로 발아래 두고, 두 사람은 내일의 계획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성자들의 말대로라면 아마 내일 격투의 첫 시작을 저희가 열게 되겠죠. 일은 그때부터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게 희생자를 줄이기 가장 적절하겠지.”
이 각성자 격투장에서는 새로 들어온 이들이 첫 시작의 문을 여는 규칙이 있다고 했다. 신입 참여자의 어리숙한 모습이 잠시 후 충격과 공포로 얼룩지는 광경을 보여주어 관중들의 재미를 돋우려는 잔혹한 전략이었다.
그러니 그 규칙에 의하면 내일의 첫 격투 참여자는 유더, 혹은 키시아르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뭐, 당연히 내가 먼저 나가도록 만들 생각이지만.’
“그러고 보니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 보내 두었던 연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반지 마도구가 아까 짧게 반응을 보이더군. 나단이 제대로 확인한 듯해.”
검은 범고래 주점에 들어오기 직전, 그들은 다른 곳을 돌고 나서 마병단 쪽으로 서신을 하나 띄워 두었다. 서신에는 키시아르가 마병단과 나단 주커만에게 보내는 명이 적혀 있었다. 확인을 끝내면 나단 주커만이 지닌 펠레타 기사단용 일회용 마도구로 키시아르에게 연락을 보내라고 명해 두었는데, 다행히 그쪽에서 빠르게 잘 읽은 모양이었다.
‘다들 오늘 밤은 아주 바빠지겠군.’
내일 계획의 핵심은 불법 내기 격투장 안과 밖에서 적시에 이루어질 협동이다. 안에서는 유더와 키시아르를 비롯한 억류된 각성자들이, 밖에서는 마병단과 그들이 불러올 외부 협력자들이 서로를 도와 빵 사이에 낀 햄처럼 적들을 몰아넣을 예정이었다.
‘한 번에 전부 해치우려면 역시 그만한 방법이 없지. 기대되는군.’
남은 건 이제 내일의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유더는 자신의 방을 향해 뛰어내리기 전,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같은 자리에서 유더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라 보이는 건 없지만, 유더는 어쩐지 그가 걱정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아쉬운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들켰나? 아무래도 모처럼 둘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혼자서 좁은 방으로 돌아가려니 조금 쓸쓸해져서 말이야.”
“…….”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터무니없이 좁은 감옥 같은 방. 있는 거라곤 낡은 풀을 천으로 싸서 만든 침대 하나뿐이지만, 이전에 두 사람이 함께 머물렀던 오두막에 비하면 오히려 조금 나은 듯도 했다.
“……그러면 같이 내려가시겠습니까?”
“그러면 좋지.”
키시아르가 대번에 승낙했다.
‘어차피 내일 계획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
두 사람은 함께 유더의 방으로 내려갔다. 좁은 풀 침대에 나란히 앉는 동안 키시아르는 연신 싱글거렸다.
“오늘은 예상외로 힘을 많이 쓰셨으니, 이제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그래.”
“약속하셔야 합니다.”
“누구 말이라고 지키지 않을까.”
키시아르가 유더를 끌어당겨 고개를 기대었다. 좁은 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여겨졌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쉰 뒤 내일을 위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누키조 패거리가 방문을 열기 위해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가 가만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이미 눈을 뜨고 있던 키시아르가 마주친 시선 사이로 입술 위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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