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여자의 몸이 덜컥 크게 떨렸다.
“어, 어떻게…….”
깜짝 놀란 감정에 반응하듯이, 여자의 몸 위를 휘감고 있던 미약한 아지랑이가 일순 폭발적으로 튀었다.
“으윽……!”
여과 없는 고통의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수없이 짓씹어 이미 피딱지로 얼룩진 입술 사이로 또다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렀다.
‘쇠약한 몸으로 겨우 유지하던 힘이니 약간만 반동을 일으켜도 버티기 힘들겠지. 우릴 보고 놀란 탓이 크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폭주한다.’
유더는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뒤 배 부분에 손을 올렸다. 놀라 부릅뜬 눈을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힘의 흐름에 집중하십시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는 상상을 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유더가 그대로 자신의 힘을 끌어 올리자 각성자의 능력을 억제하기 위해 공간 전체에 펼쳐진 여자의 힘이 낯선 대상의 힘을 꺼트리려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유더가 불러일으킨 힘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본래의 능력이 아닌, 순수하고도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각성자 본연의 힘이었다.
붉은 돌에서 분리되고 나서 정제된 매개체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얼마 전 케일루사 황제를 각성시킬 때 흡수했던 바로 그 힘. 그것이 스르르 몸을 일으키자 놀랍게도 강력하고 사나웠던 억제의 힘이 일순 기력을 잃고 흐트러졌다.
‘생각대로군. 붉은 돌에서 흡수한 본연의 기운은 모든 각성자의 힘에 동화할 수 있어. 그리고 나 또한 그 틈을 잠시나마 이용할 수 있다.’
그간 키시아르와 호산라의 내부를 움직여 보고 케일루사 황제의 각성 사건을 거치며 붉은 돌의 힘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유더의 이해도는 대폭 상승한 상태였다.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 감각을 통하여 유더는 무섭도록 집중한 채 여자의 힘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효과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도 있기는 했다.
“지, 진정하는 상상이…… 뭔지 모르겠어요.”
여자가 고통에 물든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더러 뭘 하라는 건데요…….”
무어라 답하고 싶긴 했지만 힘에 집중하는 것만 해도 어려웠기에 입을 열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이런 방면에선 확실하게 유더보다 뛰어난 이가 바로 곁에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을 떠올려 보도록 해요. 바깥의 햇볕이 얼마나 따뜻했었는지, 물가를 따라 걷는 기분은 어땠는지, 넓은 대지를 마음대로 뛰어다닐 땐 무엇을 느꼈는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른 이들과 함께 먹는 식사의 맛은 어땠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사랑했는지.”
다급한 상황임에도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를 들은 여자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위험한 폭주 직전에 돌입할 뻔했던 힘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어깨가 무거울 정도로 능력을 억제하던 힘의 무게가 쑥 사라지자 세 사람의 입술 사이로 동시에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후우.”
다시 눈을 뜬 여자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늘어져 엎드려 있던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바로 세웠다. 아까보다 한층 또렷한 시선이 유더와 키시아르를 응시했다.
“……여길 부수러 왔다고 했죠. 말해 봐요. 그 마병단이란 게 뭐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전부요.”
“당연히 설명할 겁니다. 다만, 당신의 이야기도 좀 듣고 싶군요.”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마병단에 대해서, 그리고 이 격투장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밝혔다.
“제 이름은 뢰네브. 제국 사람은 아니고…… 서쪽의 듀번 출신이에요.”
뢰네브는 듀번의 국경에서 살았다. 그곳은 몇 년 전부터 인접한 넬라른과의 무력 충돌이 잦은 곳 중 하나로, 정상적인 마을을 형성하기보다는 겨우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죽지 못해 머무는 곳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곳에 사는 많은 이들처럼 매일 재수 없게 날아든 눈먼 화살에 맞지 않을까 고민하는 대신 살길을 찾아 대삼림을 통과하여 오르 제국으로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녀를 안전하게 제국으로 데려다주고 일자리를 알선해 주겠다며 없는 돈을 갈취해 간 브로커는 알고 보니 인신매매범이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속은 이들은 속절없이 짐짝처럼 실린 채 남부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몇 이들과 함께 ‘검은 범고래’의 무작위 격투장에 오를 희생양으로 뽑혔다.
그녀보다 먼저 무대에 오른 희생양들은 처음엔 도망치고 싶어 했으나,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이기면 큰돈을 주겠다는 말에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그 불쌍한 이들의 상대로 나선 이는 바로 ‘각성자’였다.
각성 전에도 유명한 건달이었다던 사내는 검은 돌처럼 변한 주먹을 휘두르며 벌벌 떠는 희생양들을 손쉽게 때려눕혔다.
뒤늦게 살려 달라고 빌고 기어서 도망쳐 보아도 내리치는 주먹에는 자비가 없었다. 관중들은 그들을 향해 살려 달라고 외치며 도망쳐 온 참가자들의 등을 사납게 떠밀곤 이겨서 자신들이 건 돈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라는 외침을 질렀다.
결국 쓰러진 몸이 피떡처럼 변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시체가 되어서야 격투가 끝났다. 뢰네브와 함께 끌려왔던 이들이 대부분 죽기까지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의기양양해진 건달이 가슴을 두드리며 격투의 최종 승자가 받게 될 상금 액수를 큰 소리로 자랑하던 그때, 그보다 더 무섭게 생긴 새로운 각성자가 등장하여 단숨에 그의 등과 배를 갈라 죽였다.
충격적인 장면에 관중들은 열화와 같이 열광했다.
새로운 판돈이 그의 어깨 위로 수없이 던져졌다.
그리고 뢰네브는 그자의 상대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올라가기 직전 억지로 떠밀린 그자들의 무기고에서 겨우 질질 끌고 나온 무거운 검이 손에 맞지 않아 벌벌 떨렸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각성자는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그는 뢰네브를 보자마자 픽 웃더니, 이 정도는 한입 거리라는 듯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뢰네브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능력이 제게 갑자기 생겼죠.”
뢰네브는 죽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각성자는 갑자기 사라진 능력의 여파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여 난간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상태였다. 근처의 다른 격투 무대와 대기 장소에 있던 각성자들 또한 당혹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뢰네브는 얼떨결에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누키조의 부하들에게 이끌려와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엔 도망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큐릴을 죽이겠다더군요.”
“그게 누굽니까.”
“고아가 된 뒤부터 같이 살아온 유일한 친구예요. 가족과 다를 바 없죠.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진 모르겠지만 이곳에 끌려올 때도 우린 함께였어요. 하지만 이곳에 갇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죠.”
기묘하게 비틀린 입술 사이로 메마른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뢰네브가 격투에서 이겼던 날, 큐릴은 아직 격투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누키조 패거리는 큐릴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뢰네브를 붙잡아 둔 뒤, 지하 3층을 만들어 그곳에 그녀를 가두었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공간 전체에 상시 능력을 발휘할 것을 주문했다.
놈들이라고 아주 머리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나름대로 뢰네브에게 비싼 옷을 사다 입히고 그럭저럭 훌륭한 밥을 먹이며 자발적으로 패거리에 합류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제법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뢰네브는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큐릴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거든요. 단 한 번도요. 한 번만 보여 주면 얌전히 계속 여기 있겠다고 했는데도…….”
큐릴이 이미 죽었는데 멍청하게 갇혀 있는 걸지 모른다는 생각과, 실낱같은 희망이 그녀의 안에서 수없이 교차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비싼 옷과 식사가 주어져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뢰네브는 작은 방 안에 갇힌 채 끝없이 말라 갔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지만 조금이라도 끊기면 귀신처럼 그 사실을 알아챈 누키조 패거리가 찾아와 주먹을 휘둘렀다.
“사실 요즘은, 굉장히 지쳐서 정말 한계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죠. 당신들이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요.”
“…….”
뢰네브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다가는 이내 뚝 그쳤다.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기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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