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61화 (661/805)

661화

“……당신들, 누키조 패거리가 아니지.”

“그래. 아니야.”

유더의 단답에 엘포킨스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유더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짤막하게 자신들의 목적과 정체를 알리기로 했다.

“우린 마병단이다. 이곳을 부수기 위해 왔지. 너처럼 갇혀 있는 녀석들이 여기 얼마나 있지?”

묻기는 했지만 사실 곧바로 협조적으로 나오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해 준 건 구해 준 것이고, 수상한 건 수상한 거다. 엘포킨스는 거칠고 사나우며 의심이 많기로 유명했으니 유더의 답을 들어도 쉽게는 믿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유더의 생각은 이번에 드물게도 틀렸다.

유더의 답을 들은 엘포킨스의 눈에서 잠시 후 별안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흑!”

‘……응?’

엘포킨스가 사슴을 닮은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 마, 마병단이라니. 저, 정말로 우릴 구하러 온 건가요?”

‘……아니. 이렇게 쉽게 믿는다고?’

저 녀석. 진짜 엘포킨스 맞나? 유더가 멈칫한 사이,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태도로 끼어들어 대답해 주었다.

“그래. 믿지 못하겠다면 마병단의 증표라도 보여 줄까?”

“아니, 아니. 믿어요. 나도 샬로인에 마병단이 왔다는 건 들었어요. 그러니까, 나하고 싸웠던 녀석들한테……. 지금은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엘포킨스가 우물거리다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흑…흑……. 우우흑.”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찾으러 온 부모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럽고 기쁨에 찬 흐느낌이었다.

유더는 울면서도 연신 이 격투장과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전하려 드는 엘포킨스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가 기억했던 거칠고 의심 많던 엘포킨스는 여기에 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각성한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되어 자기 자신의 모습에조차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전, 그러니까… 나무꾼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실수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했다가 이렇게 각성을 해 버려서… 흑… 흐윽. 그런데 모습이 이래서 사람들이 무섭다고 피하니까…….”

마병단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무작정 큰 도시로 가서 마병단에 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고 했다. 각성자만 모여 있는 곳이라면 자신 같은 이에게도 뭔가 해결책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엘포킨스는 샬로인에 도착하자마자 여관에서 만난 사기꾼에게 낚여 전 재산을 잃었고, 이후 격투장으로 흘러들어 이 꼴이 되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여기서는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수가 없어서…… 하지만 꽤 된 것 같아요.”

엘포킨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여기에 온 뒤 총 열 번의 싸움을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 묶인 채 누워서 고통받았다. 다른 각성자들과 만날 때는 격투가 열리기 직전이나 직후 대기실에서 얼굴을 마주할 때 정도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 어느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기에는 충분했다.

“저보다 먼저 여기 있었다가 죽은 사람이 그랬는데… 여기엔 방이 총 40개 정도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서쪽의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데, 이런 곳인 줄 모르고 끌려왔다고… 반드시 살아서 탈출할 거라고 했죠.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요.”

“…….”

“제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땐 그런 식으로 속아서 끌려왔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여기 갇혀 있는 사람보단 임시로 외부에서 갓 들어온 첫 참가자가 더 많아요. 그중에 한 명이 그게 마병단 모집 때문이라고 알려 줬는데… 그 사람은 그날 죽은 것 같아요. 다신 안 보였거든요…….”

엘포킨스는 자신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그러모아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구해 준 이들의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가 알려 준 정보 중에는 유더와 키시아르가 이미 외부에서 보고 들으며 추측한 것도 있었지만, 여기에 오래 있었던 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격투장의 상세한 구조와 이곳을 거쳐 간 각성자들의 정보가 그러했다.

유더는 그의 말을 모두 들은 뒤 정보를 간략히 정리했다.

“요약하자면 지하 1층은 일반 격투장. 2층이 각성자 전용 격투장이자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지하 3층부터가 각성자들을 가두는 곳이란 거지.”

“네.”

“가두어 두는 각성자들과 아닌 각성자들의 차이는 멋모르고 찾아온 첫 격투에서 너처럼 살아남은 자, 혹은 처음부터 외부에서 납치해 들여온 자들이고.”

“맞아요.”

본래대로라면 유더와 키시아르 또한 첫 격투에서 살아남은 뒤에야 이곳으로 끌려와 갇혔을 것이다.

‘우리가 2성을 발현한 각성자라는 걸 몰랐더라면 그랬겠지.’

식사 도중 노골적으로 2성 여부를 캐묻고 답을 알게 된 뒤, 누키조는 그들의 얼굴을 황금 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음흉하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흐뭇하게 웃던지 속내가 뻔히 다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이전 생의 내기 격투장에서는 2성을 발현한 각성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격투도 자주 벌였다고 들었다. 격투장을 운영하는 자들이 비각성자들이 평생 짐작할 수 없는 2성이란 것을 몹시 흥미롭고도 음란하게 포장하여 열심히 팔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오메가 각성자가 알파 각성자보다 발정기 때 흘러나오는 향이 더 짙은 편이라는 사실도, 그 향이 정력 증강과 성적 흥분을 고취하는 데 좋다는 둥 하는 정신 나간 허위 정보도 그곳에서 재생산되어 널리 퍼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오메가 각성자들의 악몽이 시작된 곳이나 다름없는 셈이야.’

유더와 키시아르가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운 나쁜 2성 각성자가 잡혀 들어와 그 끔찍한 ‘새 사업’의 서막을 열었으리라.

엘포킨스는 이곳에서 내내 고통받았을 와중에도 이곳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관찰하고 기억해 두었다. 그건 그가 보기보다 관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탈출을 위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만큼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행한 일이지. 너무 늦기 전에 찾아서……. 인간성이 마모될 만큼 마모된 다음 왔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제가 여기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뿐이에요. 이걸로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그래. 큰 도움이 될 것 같군. 그런데 하나만 더 묻자.”

“아, 네.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여기서 힘이 발휘되지 않는 이유가 아무래도 갇혀 있는 이들 중 누군가의 능력 때문인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 아는 건 없어?”

“아!…….”

엘포킨스가 그 말을 듣자마자 큰 소리를 냈다. 그는 반사적으로 제가 낸 소리에 놀라 움찔거린 다음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누키조 패거리는 그냥 여기서는 힘을 못 쓸 거라고만 했었어요. 전 여기에 마법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사람이 지닌 능력 때문이라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해요.”

“뭐지?”

“누키조 패거리들이 격투가 끝나고 나서 절 다시 여기로 끌고 올 때마다 어떤 방 앞에서 항상 나누던 얘기가 있었어요. 아직 안 죽었지? 죽으면 여기 있는 놈들 관리가 어려워지니까 밥을 안 먹으면 목구멍을 찢어서라도 먹여라……. 뭐 그런 얘기요.”

“……흠.”

유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그 방에 억제의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갇혀 있을 확률이 확실히 높겠군.’

“그 방이 어디인지 기억하겠어?”

“여기로 돌아올 땐 늘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앞도 잘 안 보였었지만…… 그래도 그 방의 위치만은 기억해요. 지하 2층 계단에서 바로 내려와 제일 처음 마주한 방을 지나갈 때마다 그 소릴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하 3층의 중앙이라는 뜻이었다.

‘억제나 무효화 능력은 대체로 대상을 지정하여 발휘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앙에 두었다면 아마도 나한 놈과 비슷한 범위형 능력자겠군. 엄청나게 넓지는 않아도 이 정도 범위에 밤낮없이 능력을 펼치고 있으려면…… 안 죽은 게 대단하겠어.’

유더가 이전 생에서 남부의 불법 내기 격투장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을 때엔 이런 능력자의 존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아마 그때쯤엔 죽었었겠지.’

능력 억제의 힘을 지닌 각성자를 데리고서 이런 곳을 만든 누키조 패거리도 그때쯤에는 더욱 큰 돈과 권력을 얻어 더 확실하게 격투 참가자들을 억압할 수단을 새로 만들어 냈으리라.

‘그때는…… 이미 억압의 의미조차 없을 만큼 모든 게 엉망이긴 했지만.’

어차피 이제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유더는 짧게 숨을 토해 내어 과거의 기억을 지운 뒤 아직도 엘포킨스를 묶고 있는 사슬을 응시했다.

범위형 능력은 안에서 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면 깨진다. 유더의 힘 정도라면 충분히 깰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금도 어떤 상태에 처해 있을지 알 수 없을 능력 소유자가 반발로 충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그 사슬, 당장은 풀어 주기 어렵겠지만 내일 이후로는 다시 그걸 찰 일은 없을 테니 조금만 참도록 해.”

“전, 전 괜찮습니다. 여기 온 뒤로 이렇게까지 안 아픈 건 처음이에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세요.”

호의로 가득 찬 순박한 눈으로 엘포킨스가 대답했다.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얼굴이 아니라 마치 꼬리를 흔드는 대형견 같은 얼굴이 조금 낯설었지만 확실히 이쪽이 훨씬 보기 좋기는 했다.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 우리의 계획에 조금 힘을 보태 주었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겠어? 아마 너밖에 못할 것 같거든.”

눈을 커다랗게 뜬 엘포킨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그래. 성공하고 여기서 빠져나간 뒤에, 혹시 생각이 있다면 마병단으로 와. 지금 한창 모집 중이니까.”

키시아르가 희생하여 열심히 고쳐 둔 놈이다. 또다시 비뚤어진 길로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으니 이번엔 시작부터 제대로 굴려 능력을 키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유더의 제안을 들은 엘포킨스는 상상조차 못 했다는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으나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유더는 엘포킨스에게 내일 그가 도왔으면 하는 일을 전한 뒤, 키시아르를 부축한 채 그대로 다시 몸을 날려 천장 위로 올라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유더가 신중히 묻자 창백한 안색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보다, 방금 그 모습이 유드레인 단장으로서의 모습에 가까울 거라 생각하니 정말 흥미롭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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