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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59화 (659/805)

659화

‘내 기억이 맞다면 그놈들, 분명 아까 낮에 봤던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살던 곳을 힘들게 떠나와 마병단에 지원한 놈들이 하루도 안 되어 이런 수단에 낚여 들어올 줄이야. 새카만 욕심보다는 부끄러움과 어색함만 가득했던 태도들을 보아하면 정말 순수하게 이곳이 그렇게까지 나쁜 곳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게 분명했다.

‘일반 무작위 격투와 각성자 전용 격투가 뭐가 다른지 모르니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각성자 격투장의 먹잇감이 되기 전에 빠르게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누키조 패거리가 만든 계약서와 서약서, 그리고 실컷 먹여 댄 약도 유더에게는 별 제약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놈들의 서약서는 제대로 인증을 받고 만든 물건조차 아니었다. 적절하게 끼어들어 글을 모른답시고 직접 서명을 피하게 해 준 키시아르 덕분에 몸을 묶고 있는 서약의 흔적도 한없이 흐릿해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도 서약이 뭔지 잘 모르는 평범한 이들에게는 위협적일 수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니까.’

아까 대충 보니 서약이랍시고 늘어놓은 내용의 대부분은 참가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격투가 열리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여기서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부분도 교묘하게 조금 섞여 있었다.

즉, 애초에 도망칠 생각 따윈 없이 여길 내부에서부터 때려 부술 생각으로 가득한 이들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는 뜻이다.

‘멍청한 놈들. 여태 얼마나 쉽게 운영해 왔는지 알 만하다.’

치안을 관리해야 할 놈들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전부 쓸어 버려야 할 놈들이었다.

유더는 방을 살피는 한편, 놈들을 쓸어 버릴 때 갚아 줄 빚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밥과 음료에 타서 먹인 약이야 그렇다 쳐도, 아까 키시아르의 얼굴을 두드린 놈은 반드시 열 배로 돌려줘야겠지. 여기 억류되어 있을 각성자들 중 마병단 지원자가 있다면 그 수만큼 또 대가를 더 받아 내야겠고…… 아, 그리고 에르시에게 보여 주어야 할 몫도 있겠군.’

유더는 서부에서 만난 복수귀, 에르시를 떠올렸다. 지금은 얌전히 감옥에 갇혀 노동을 하고 있을 그녀는 1년 전쯤 인신매매를 당해 끌려가던 도중 겨우 몸을 피해 나그란의 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복수에 미쳐 버린 이유는 당시 함께 납치당한 가족이 있었음에도 자신만 살아남았기 때문으로, 그 깊은 분노는 능력이 폭주해 스스로를 파괴할 지경까지 가서야 겨우 사그라졌다.

이건 에르시를 붙잡아 치료하고 감옥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로벨을 포함한 나그란의 별 출신 각성자들 여럿에게 정보를 구하여 재차 확인한 사실이었다.

자신과 같은 이들이 구원을 필요로 했을 때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며 고함을 지르던 에르시에게 키시아르는 목적 잃은 무차별적 복수에 대한 반박 대신 담담히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었다.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향하여 복수해야 할지, 그리고 스스로 저지른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 모든 대상을 다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녀는 이후 지금까지 스스로 무너뜨린 타이누를 재건하는 일을 도우며 제가 낳은 무차별적인 살인의 결과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마병단 쪽에서도 그녀가 1년 전 끌려갔을 곳이 어디였는지, 진짜로 단죄를 당해야 할 놈들은 누구인지를 보여 줄 때였다.

유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던 찰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작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자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던 천장 일부가 위로 쑥 사라지더니, 거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세상에. 방의 주인께서도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늦은 시간에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찾아든 예의 없는 밤새를 질책해 주시겠습니까?”

거창하고 낯간지럽기 짝이 없으나 한편으로는 장난스럽고 부드러운 사교계식 말투에 일순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유더는 대답을 기다리듯 능글맞게 침묵하는 검은 구멍을 올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려오시죠.”

“허락을 받았으니 내려앉아야겠군.”

잠시 후 구멍 사이로 키시아르가 훌쩍 뛰어내렸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를 거대한 장신의 사내가 소리도 없이 유더의 곁에 서자 순식간에 방이 더욱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키시아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언제쯤 오려나 기다리다가 그냥 내가 먼저 와 버렸지. 기다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때로는 직접 찾아가는 게 맛이니까.”

새치고는 몹시 크고 말이 많았다.

유더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작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는 동안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전혀. 천장에 보호 마법진을 설치해 두어서 공간이 제법 크더군. 여긴 옆방이라 이동도 쉬웠고.”

“다행이군요.”

“오는 김에 겸사겸사 그 마법진은 망가트려 둔 참이야.”

누키조 패거리가 들었다면 값비싼 돈을 주고 설치한 마법진이 훼손되었다는 소식에 끔찍한 비명을 질렀겠지만, 여기에 있는 건 유더뿐이었다.

“그것도 다행이군요. 아까 약을 좀 드셨던 건 괜찮으신 겁니까.”

“물론 괜찮고말고. 이 정도로 문제가 생길 만큼 독 내성을 약하게 키우진 않았어. 게다가 대부분은 네가 먹어 주었으니 널 걱정하는 쪽이 상황에 더 맞지 않을까.”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건 제겐 안 통합니다.”

누키조가 음료와 술을 계속해서 권할 때부터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 짐작하기는 했다. 유더가 키시아르를 대신하여 교묘하게 그의 음식까지 대부분 먹어 치운 건 그래서였다. 다만 거기에 부릴 수 있는 수작질의 종류도 제법 가짓수가 많았기에, 놈들이 바랐던 게 수면이라는 걸 확실히 확인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흥분제나 이완제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수면제라……. 다시 생각해도 고루한 방식이었어.’

유더에게 있어 음식이란 양을 딱히 가늠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작정하고 많이 먹은 건 거의 처음이었다. 유더는 자신이 입을 벌려 음식과 술, 음료를 배 속에 들이부을 때마다 음식값이 아까워 참을 수 없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던 누키조를 떠올렸다.

‘그놈의 그 얼빠진 얼굴 때문에 더 열심히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평소보다 제법 많이 먹었지만 그 정도는 이제부터 움직이고 힘을 쓰면 곧 소화될 터였다.

“그런데 오기 전에 확인해 본 사항이지만, 보호 마법 말고도 이곳엔 조금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 것 같더군. 혹시 이미 확인해 보았나?”

“아뇨. 뭡니까.”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대충 확인하긴 했지만 키시아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더가 고개를 젓자 키시아르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이곳에선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것 같더군. 마치 능력을 억제하는 것처럼.”

능력을 억제한다고? 유더는 곧바로 허공에 불을 불러내려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이군요.”

마치 예전에 대삼림에서 큰 부상을 당한 직후, 능력이 회복되지 않았던 그때처럼 힘이 잘 발휘되지 않았다. 아주 발휘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일어나려던 불꽃이 깜박거리다 훅 꺼지는 모습을 보며 유더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건……. 그놈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릴 여기 가둔 건 아니었군.’

“짐작 가는 이유가 있나?”

“네. 아무래도 여기 갇혀 있는 이들 중 누군가의 능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군요.”

가장 가능성 큰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흥미롭군.”

“일단 원인을 찾아보도록 하죠.”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아직 열려 있는 천장 구멍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이 정도는 바람의 힘을 크게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했다.

“정말로 제법 크군요.”

“그렇다니까. 걸어 다녀도 될 정도지.”

키시아르의 말대로 천장 위에는 제법 큰 공간이 존재했다. 물론 빛 한 점 없고 밑이 보이지 않아 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어둠 속에서도 쉽게 주변의 구조를 파악하는 혜안은 이런 상황에서도 잘 발휘되었다. 유더는 어둠 속을 쉽게 더듬어 앞을 향해 나아갔다. 끌려오면서 슬쩍 훑은 바에 따르면 이곳의 방들은 대부분 다닥다닥 일렬로 붙어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귀를 기울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갈을 물려 억눌린 짐승처럼 분노에 찬, 그러면서도 구슬픈 소리였다.

힘이 발휘되지 않는 원인을 찾으려던 생각이 그 소리를 듣자 잠시 멈추었다. 유더는 흐느낌이 들려오는 방향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저쪽인가.’

유더가 먼저 방향을 가늠하여 움직이자 키시아르가 뒤를 따랐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그들의 방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나서서 쉽게 바닥을 더듬어 들어올리자, 아래쪽이 열리며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내려다본 방 안의 모습은 처참했다. 피로 범벅이 된 덩어리가 사슬에 묶인 채 욱욱대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우… 우우……. 우우우!”

그 덩어리가 사람이며, 어디가 얼굴인지 확인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보통 뭉개진 상태가 아니었을뿐더러, 상대의 모습도 보통 인간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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