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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56화 (656/805)

656화

간판 아래쪽에 붉은 주사위가 그려진 술집 ‘검은 범고래’는 근방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붉은 주사위는 남부 최대의 무역 도시 샬로인의 밤을 지배한다고 자처하는 누키조 패거리가 직접 관리하는 곳임을 뜻한다. 누키조 패거리의 위명은 아주 높아서, 샬로인의 치안을 관리할 의무가 있는 기사와 병사들조차도 붉은 주사위 간판 아래서 일어난 사건 사고는 모른 척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검은 범고래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유흥거리’를 가장 직접적이고 성공적으로 제공하여 늘 새로운 유희 거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높였다.

그건 바로 ‘무작위 격투 도박’이었다.

“정말 재미있죠. 시합 참가자들끼리 서로를 전혀 모른 채로 무작위로 뽑혀서 격투장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혹시 어린애가 노인과 싸우느라 낑낑대는 꼴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덩치 큰 놈이 저보다 더 큰 놈을 만나서 도망치며 엉엉 우는 꼴은요? 정말 웃기죠. 말 그대로 진짜 무작위라 가능한 겁니다. 번호가 매겨진 구슬을 통에 넣고 뽑거든요.”

“흐음.”

검은 범고래의 문지기, ‘콧수염 잭’은 방문한 손님들을 앞에 두고 무작위 격투 도박에 대해 열심히 설명 중인 술통 관리인을 무료하게 쳐다보았다.

‘오늘도 새로운 호구들이 오셨군.’

무작위 격투 도박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지켜야 할 복잡한 룰도 없다. 그저 상대가 누구든 이기기만 하면 그 횟수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다는 단순한 규칙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야만적이고 위험하며 매력적이었다.

격투의 급은 이겼을 때 받을 수 있는 돈 액수에 따라 나뉘니 참가자는 그저 원하는 액수가 있는 곳에 따라 선택하면 되었다.

“1회 이겼을 때 받는 돈은 최소 동화 1개부터 시작해요. 가장 많이 받는 급은 얼마나 받냐고요? 놀라지 마세요. 한번 이기기만 해도 금화 1개입니다! 1개! 열 번 이기면 금화 10개인 거죠!”

받는 돈이 적은 급은 주먹 한 대만 쳐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꼬마들이나 약한 이들이 거의 참가했다. 손에 땀을 쥐는 재미는 적지만 주먹 휘두르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자들끼리 죽일 듯 싸우는 모습이 퍽 우스웠기에 적당히 흥을 돋우고 웃음을 주는 정도로는 쓸 만했다.

하지만 금화 1개를 받을 수 있는 급의 격투장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곳은 시합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시체가 한 구씩 나온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운이 좋으면 돈이 필요해서 욕심을 내 본 말라빠진 꼬맹이를 만나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인간보다 훨씬 크고 강한 짐승이나 몬스터를 만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도 가능하다.

무기 또한 아무거나 써도 되고, 반대로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

비겁한 수단 따윈 여기에 없었다. 흙을 눈에 뿌리고 급소를 걷어차든, 이긴 줄 알고 자만하는 상대의 뒤에서 쓰러진 척하다 말고 일어나 칼을 찌르든 그저 이기면 그만이었다.

그렇다 보니 격투에 장기간 참여하는 ‘내기말’의 수는 극히 적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된 자들이 제국에만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상 무역 도시의 이점은 타국에서 배를 타고 찾아오는 타국인들이 늘 도시 내에 한가득 존재한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이들이 격투에 참여하니 돈을 거는 도박꾼 입장에서도 늘 새로운 자극을 느끼며 돈을 걸게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무작위 격투에서 이기는 것만으론 돈이 안 되지. 그보다 아래층에서 열리는 새 격투장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단순한 무작위 격투보다 더 흥미로운 게 있다고 듣고 왔는데, 그건 없나 보지?”

문지기가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처음 보는 얼굴의 호구 손님이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자 술통 관리인이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손님들을 향해 얼굴을 낮추어 작게 속삭였다.

“그건 또 어떻게들 알고 오셨습니까? 누가 알려 주던가요?”

“저 앞의 술집…… 이름이 브뤼독 여관이었나? 아무튼 거기에서 카드놀이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알려 주던걸.”

인상이 몹시 흐릿한 호구 1이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호구 2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그놈이 아주 음침한 성격이든가,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온 귀족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젊어 보이는데 굳이 얼굴을 가린 데다 앉은 꼴도 뭔가 귀족 냄새가 나게 번듯한 것이……. 저런 놈들 많이 봤지, 내가. 그럼 옆에 있는 덩치 큰 호구 1은 하인이려나?’

“아아, 브뤼독. 거기 말이군요.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브뤼독 여관이라는 말에 대충 감을 잡은 얼굴을 한 관리인이 조금 경계를 풀은 눈빛으로 마주 웃었다.

“그래요. 단순 무작위 격투는 몇 년이나 된 구식에 불과하죠. 역시 요즘 가장 뜨는 게임이라면 ‘그것’ 아니겠습니까?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자들이 바닥을 피로 흥건히 적실 만큼 열정적으로 싸우고 부대끼는 뜨거운 모습을 구경하며 돈을 거는 것 말이죠.”

잔혹한 말을 내뱉는 관리인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을 만큼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문지기 또한 비슷한 실소를 흘렸다.

‘누가 생각해 낸 건진 몰라도 정말 귀신처럼 돈 벌 거리를 잘도 찾아냈단 말이야.’

각성자가 막 나타나기 시작했던 2년 전. 혼란이 어느 정도 사라질 무렵부터 누키조 패거리는 각성자라는 새로운 존재들이 자신들의 무작위 격투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각성자의 능력은 몹시 화려하고 눈에 띄었다. 불이나 물을 뿜거나 몸에서 징그러운 뿔이 솟아나는 놈들이 한번 격투에 참여하면 그날은 내기 도박에 참여하는 도박꾼들과 구경꾼 수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쩍 늘었다.

자연히 각성자만 참여하는 새로운 격투장을 지하에 새로이 만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청 공을 들였었지. 부서지지 말라고 비싼 돈을 주고 마법도 걸고, 귀하신 분들을 모셔도 괜찮게 한답시고 염병하게 비싼 탁자와 의자를 들이고…….’

그래도 그 보람이 있어 새로운 사업은 대박을 쳤다.

체면을 차리기 바쁜 귀족들조차 소문을 듣고서는 슬금슬금 얼굴을 가린 채 찾아들었다. 여태 존재했던 그 어떤 내기 도박 거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롭고 짜릿한 격투였다.

그게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주변에서 비슷하게 무작위 격투장을 운영하던 다른 패거리 놈들까지 하나둘 자신들의 격투장에 참여할 각성자를 구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자연히 내기 격투에 참여하는 각성자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누키조 패거리의 두목인 누키조는 자신의 연줄을 이용하여 1년 전쯤부터는 아예 서쪽에서 정기적으로 각성자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 사업이 앞으로 누키조 패거리의 최대 돈벌이감이 되리라 판단했기에 내린 과감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지하 1층처럼 아무나 들어가서 볼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참여하려면 자격이 필요하죠.”

“자격?”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호구 2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딘지 모르게 목소리도 재수 없을 만큼 스산한 놈이었다.

관리인 또한 문지기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듯 순간 움찔했다가 막 다시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막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그들의 안쪽에 있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멋모르는 얼굴을 한 젊은이 몇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지하 2층 격투장 관리인 중 한 명인 리지나와 함께였다.

“참가자 등록은 이제 끝난 거죠?”

“맞아요. 이따가 짐을 챙겨 다시 이쪽으로 와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젊고 능력 있는 분들이 와 주셔서 몹시 기대가 되네요. 이따 봐요.”

리지나가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하자 젊은이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네, 넵.”

문지기는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와 있는 호구 1, 2보다 몇 시간 전에 다른 패거리들에게 낚여 여기까지 온 각성자들이었다.

‘마병단에 지원하러 왔다고 했었던가? 1차 시험은 합격했다던 것 같았지만 뭐, 그것도 이젠 끝이지. 자기들 손으로 무덤을 파러 왔으니 2차 시험을 보러 갈 수나 있을까.’

검은 범고래에는 저런 자들이 요즘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저 순진한 놈들의 얼굴이 몇 시간 뒤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며 몰래 심술궂은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 때문에 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호구 2가 그자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제 발로 지원하러 왔던 놈들이 중간에 탈주하는 걸 마병단 쪽에서 뭐라고 하겠어?’

그들이 알기로 마병단원 모집에 지원하러 온 각성자들은 여러 이유로 중간에 많이 탈주하곤 했다. 1차 시험에 불합격해서, 합격은 했지만 갑자기 집에 사정이 생겨서, 와 보니 자신의 생각과 마병단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시험을 보러 왔다가 사이가 나쁜 놈을 만나서……. 그야말로 이유도 다양했다.

탈주한 놈들이 뭘 하든 마병단과는 관계가 없다. 몰려드는 지원자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마병단이 지부에 처박혀 일하는 사이, 누키조 패거리는 거리를 헤매는 각성자들을 꼬드겨 격투에 참여시켰다.

제 발로 찾아온 놈들이 나중에 제 생각과 다르다며 울어 봤자 그때는 이미 늦다. 그들은 교묘하게 이것저것 숨긴 계약서와 서약서의 조항을 들이대며 참가하러 온 각성자를 억류했고, 못 쓰는 물건이 될 때까지 지하 2층에서 알차게 굴려 먹었다.

‘튼튼해 보이니 저놈들은 제법 오래 쓸 수 있겠지.’

얼마 전 서부에서 들여오려 했던 참가자들이 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겨 몹시 초조했었는데,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마병단이 이 도시에 터를 잡고 지원자를 받기 시작한 게 누키조 패거리에겐 정말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놈들이야 이런 줄 모르겠지만.’

문지기가 제 앞을 통과해 술집을 빠져나가는 젊은 각성자들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웃는 사이, 호구 1과 2는 무어라 서로 속닥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호구 1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흠. 오늘 밤에 그 ‘더 재미있는 격투’가 열리는 모양이지?”

“아니요. 내일입니다. 매일 열리는 건 아니라, 저희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거든요.”

“참여하기 위한 조건은 뭐라고 했었던가? 아까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아서.”

“아. 구경을 위해 돈을 걸고 싶으시다면 먼저 입장금을 내셔야 합니다. 은화 5개 정도를 내고 서약을 하셔야 들어갈 수 있죠.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서약을 안 하셔도 되지만, 그때는 입장금이 많이 오른다는 건 유념해 두셔야 합니다.”

“그렇군.”

호구 1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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