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자. 이제 반대하는 놈들은 다 코를 때려 꺼지게 했고……. 다음으로 넘어가야겠지.’
사실은 혹시 정신을 못 차리고 끝까지 헛소리를 해 대는 놈이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지부 앞에서 보여 주었던 ‘지네 잡기’의 기억을 다시 한번 되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유더에게는 아쉽게도, 그리고 그자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럴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늘 꺼진 놈들이 자신들이 머무는 집단으로 돌아가 말을 잘 전한다면 아마 오늘 같은 일이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날 만나자마자 맥없이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무능력자 취급을 받고 싶진 않을 테니 알아서들 입을 털겠지.’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는 걸 상부에 납득시키려면 마병단이 그만큼 대단했기에 이것이 최선이었노라 주장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면 할수록 윗선에서는 마병단을 감히 우습게 보지 못하겠다는 판단을 내릴 테니 이쪽으로서는 몹시 이득이었다.
‘그 이후라고 반대 의견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단장님.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이대로 샬로인의 번화가로 나가 한번 돌아보고 오시겠습니까?”
“나야 아주 좋지.”
키시아르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흔쾌히 수락했다.
“아예 저녁까지 거기서 먹고 들어오는 건 어떻겠나?”
“지나치게 늦을 것 같다면 그러는 쪽이 낫겠군요.”
유더는 키시아르의 말속에 담긴 은근한 뜻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몹시 공적인 어투로 대답했으나 그런 와중에도 의견은 서로 자연스럽게 합치되었다. 키시아르가 눈웃음을 흘리고는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군의 눈빛을 본 기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손을 들어 자신은 따라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부에 있을 펠레타 기사단원들과 접촉해야 하니 저는 빠지겠습니다. 공작님의 안전을 부탁드립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녀오마, 나단. 혹 무슨 일이 있다면 이 지부 쪽을 통해 연락을 넣도록.”
“예.”
키시아르가 눈치 빠르게 구는 부관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두드려 주었다.
유더가 키시아르와 함께 곧바로 샬로인을 둘러보러 나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쿠르가를 비롯한 남부 지부의 단원들은 진심으로 감탄하여 혀를 내둘렀다.
“아니, 여기까지 오느라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이동했을 텐데 오자마자 앞마당을 싹 치우고 이젠 바깥까지 또 돌아보고 오겠다구? 체력이 어떻게 된 거야? 같은 인간 맞아?”
“우리가 같이 안 따라가도 되겠어?”
걱정스럽게 제안하는 단원들의 마음은 제법 고마웠으나, 샬로인은 이전 생에 여러 일로 몇 번 오갔었기에 안내가 필요하지 않았다. 유더가 고개를 젓자 단원들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납득했다.
“하긴, 유더를 걱정하는 것보단 유더한테 시비를 걸지도 모를 놈들을 걱정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나는 하루 종일 앉아서 지원하러 온 사람들 상대만 해도 체력이 쭉 빠져 밤에 눕자마자 기절하게 되던데 정말 대단하다.”
“그건 네 쪽이 너무 체력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온 이후로 기초 체력 훈련을 너무 빼먹은 것 아냐?”
“조용히 해. 그 말 유더가 들었다가는 난 죽어……!”
‘이미 다 들었다.’
유더는 유독 시끄러웠던 시위자들 때문에 지부 밖으로 잘 나가지 못했을 이곳의 상황을 고려해 타 지부에 전달한 훈련 계획보다 기초 체력 훈련을 더 보강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가기 전에, 받아야 할 게 있어서 온 거야.”
“받아야 할 것? 그게 뭔데?”
“아, 그거구나.”
쿠르가가 조금 늦게 유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남부로 떠나기 전에 나한테 남겼던 부탁…… 그거 맞지?”
“그래.”
“그거라면 그동안 다른 녀석들과 함께 잘 정리해 뒀어. 여기.”
쿠르가가 건넨 것은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힌 종이였다. 고개를 내밀어 그것을 흘긋 본 단원들이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모집할 때 그냥 물으라고 했던 게 아니었어? 이유가 있었던 거야?”
“뭐야? 뭔데.”
“마병단에 지원하러 온 지원자들이 머무는 숙소 위치!”
“그게 지금 왜 필요한 거야? 그걸 가지고 대체 뭘 하려고?”
거기엔 당연히 이유가 있다. 지금부터 찾고자 하는 것들을 알아내기에 가장 좋은 실마리가 될 사항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지원을 위해 찾아온 각성자들이 머무는 숙소는 대개 비슷비슷한 곳에 몰리게 마련.’
여관이 몰린 곳에는 술집을 비롯한 각종 유흥 시설도 함께 몰려 있다. 여관과 음식점, 혹은 술집을 함께 운영하는 곳도 흔하디흔했다.
그렇다면 각성자를 대상으로 하는 불법 격투장의 관계자들도 분명 그 근처에 있을 테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먹잇감을 찾고 있을 마약의 실마리도 겸사겸사 함께 찾기 쉬워질 터다.
‘그것들은 숙주가 없는 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니까.’
이전 생에는 이미 불법 격투장과 마약이 판을 칠 만큼 친 뒤에야 때려잡기 시작했기에 공을 들여 실마리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만큼 찾기는 좀 힘들겠지만, 어차피 종착지는 거기서 거기일 거란 걸 알고 있으니 크게 초조하지 않았다.
유더는 쿠르가가 준 종이를 빠르게 훑어 마병단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머물고 있는 숙소 밀집 지역 두 곳을 추렸다. 그리고 나서 종이를 돌려주며 단원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새로운 일을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는 시끄러운 놈들 때문에 바깥에 나가기 힘들었겠지만 앞으로는 아니지. 내일부터 우린 이 샬로인에 웅크리고 숨어 있을 거머리 같은 놈들을 잡아 불태운다.”
“……엉?”
“태울 곳들은 내가 먼저 다녀오고 나서 내일 전달할 테니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어.”
눈을 깜박이던 단원들이 이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유더의 말을 이해했다.
“아…… 이거 서부 때랑 비슷한 건가? 맡겨만 줘! 그간 아무것도 못 때려 부숴서 좀이 쑤시던 참이거든.”
좋은 대답이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뒤로하고 지부를 나섰다.
한발 먼저 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던 키시아르가 마차를 잡아 두고서 손짓을 했다. 유더가 망설임 없이 거기에 올라타자마자 곧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돌아보고 싶은 곳들은 찾아보았나?”
“네. 쿠르가가 잘 알려 주더군요.”
“바쁜 와중에도 다들 성실하게 일했군. 좋은 일이지.”
“계속 안에서만 일하느라 체력들은 조금 떨어진 것 같아서, 그 부분만 보완을 조금 해 주고 가려고 합니다.”
단원들이 들었다면 비명을 질렀겠지만 키시아르는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보좌가 나와 가고 싶은 곳들은 어디지?”
“네. 오늘 방문할 곳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저렴한 여관이 주로 위치한 곳, 그리고 또 하나는 비교적 비싼 호텔들이 많은 번화가 쪽이었다. 지원자들의 재력에 따라 숙소의 위치가 갈렸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유더는 자신이 왜 그곳들에 들르려 하는지 설명한 뒤, 오늘 찾아야 할 목표를 짤막하게 언급했다.
“분명 그 두 곳 어딘가에 불법 격투장과 이전에 서부에서 보았던 남국인 상인들로부터 시작된 마약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들의 실마리를 찾아 미리 박멸하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키시아르가 다리를 꼬아 앉은 채 한량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 끝을 올렸다. 얼굴을 변용한 상태라 인상이 흐릿한 상태임에도 그것만으로도 기묘하게 방탕하고 위험한 분위기가 순식간의 그의 얼굴 위로 도사리는 기분이 찾아들었다.
“일단……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니 가볍게 구경할 만한 곳부터 찾아보는 게 어떻겠나?”
그들이 먼저 내린 곳은 저렴한 여관이 많은 지역이었다. 유더는 주변을 몇 번 돌아본 뒤 눈에 익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이곳도 이전 생에 들러 봤었던 곳 같군. 그때는 사람이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아니었지.’
약에 취한 이들이 오물투성이로 널브러져 굴러다니던 이전 생의 풍경이 좀 허름하긴 해도 그럭저럭 깨끗한 지금의 골목 위로 스르르 겹쳐졌다가는 사라졌다.
‘본래는 이런 곳이었군.’
“따로 가 보고 싶은 가게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는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는 유더에게 완전히 행선지의 선택권을 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여관이 여기서 가장 큰 것 같으니 들러 보시겠습니까.”
그곳은 술과 음식을 함께 파는 곳으로, 1층 전체를 시원하게 개방해 테이블을 바깥까지 가져다 둔 상태였다. 바깥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왁자하게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거나 혹은 카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좋지. 저기 카드 게임을 하는 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볼까?”
키시아르는 그 말대로 자리에 앉아 가벼운 맥주 한 잔씩을 시키자마자 옆자리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흠. 나라면 그걸 지금 내지 않겠어. 한번 기다렸다가 내도 늦지 않을 텐데?”
“으응?”
이런 저렴한 술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훈수를 두는 건 흔한 일이었다. 반쯤 취한 채 카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키시아르의 훈수를 따랐는데, 그것이 잘 들어맞자 몹시 신기해했다.
“당신, 어디서 패 좀 굴려 봤나 봐?”
“내가 좀 감이 좋은 편이라.”
“남부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중부?”
“뭐, 그렇지.”
키시아르가 다른 이들과 이런 식으로 어울리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자연스러울 줄은 몰랐다. 정작 평민으로 자란 유더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아주 쉽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든 키시아르는 순식간에 유더를 그들 사이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몇 번 판을 돌리면서 가볍게 지고 이기기를 반복한 뒤, 키시아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본론을 꺼냈다.
“혹시, 요즘 이 근처에 좀 더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곳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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