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거기 계신 분께서도 정정할 부분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죠. 없으십니까.”
“아니… 난…….”
상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발언을 적은 종이와 유더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키시아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키시아르가 걸친 대단한 물건들을 알아보고 소름을 느낀 덕에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저 흐릿한 인상의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이 단장보좌라는 괴물 같은 놈보다 더 먼저 앉기도 했었지……. 평민 출신들이라 그냥 예의 없이 아무렇게나 앉은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라면.’
여러 가정들이 그의 머릿속을 휩쓸기를 반복했으나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저 정도 물건들을 손쉽게 걸칠 만큼 재력 있는 자가 여기 와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 건 분명 뭔가 있는 거야!’
엄청난 재력을 가진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도, 뭔가를 하지도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찾아온 미지의 공포가 상인에게는 무엇보다도 두렵게 여겨졌다.
어쩌면 그가 조금 더 똑똑했거나 마병단과 관련된 최신 소문을 잘 알고 있었더라면 키시아르의 정체를 좀 더 근접하게 짐작하고 덜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인식 속에 남겨진 펠레타 공작은 굳이 이런 곳에 찾아올 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의 빈틈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던 유더는 상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며 차갑게 판단했다.
‘뭐, 황족 출신 공작이 굳이 얼굴을 숨기고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지. 온다면 서부에서처럼 요란하게 나타날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펠레타 공작이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든, 답지 않게 마병단장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다. 저들의 인식 속 펠레타 공작은 눈에 띄기를 좋아하는 방탕한 사내이며 복잡한 정치적 행동 따위는 생각지 못할 머리를 지녔을 테니까.
정체를 숨기고 입을 다문 채 얌전히 앉아 있는 건 펠레타 공작의 이미지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얼굴은 숨길 수 있다 해도, 그런 건 숨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누구나 자연스레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키시아르가 변용을 하고서 당당하게 유더보다 먼저 앉아도, 유더가 그를 위해 평소처럼 움직여도 누구 하나 마병단장이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예의도 모르는 건방진 평민이거나 혹은 저 상인처럼 그보다 더 대단한 미지의 권력자일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키시아르가 다년간 만들어 낸 이미지가 만든 인식의 함정이었다.
‘키시아르가 스스로를 감출수록, 겉모습 일부만 보고 이쪽을 판단하려 하는 자들은 의문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겠지.’
잠시 후, 상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아니, 제가 했던 말은 전부 취소하고 싶습니다.”
관리와 마법사가 제각기 놀라 상인 쪽을 휘둥그렇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유더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갑자기 전부 취소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마병단원 모집 때문에 입은 상업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원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필요가 없으시다는 뜻으로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다음에 다른 상단 쪽에서 찾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쪽은 되었습니다!”
그는 유더가 이유를 묻지 않았음에도 허둥지둥 온갖 변명을 해 대며 생각이 바뀐 이유를 바쁘게 포장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야기가 다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가야 할 만한 일이라니, 정말 다급한 일이신가 보군요.”
“네, 제가 요즘 기……억력이 좋질 못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깁니다.”
“저런. 그런 문제가 있는데 상단에서 일을 하려면 정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군요.”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만 있던 키시아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상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겉보기에는 참으로 따뜻한 진심을 담은 걱정 같았으나 시선이 마주친 상인은 미지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기억력으로 먹고사는 상인이 스스로의 기억력을 부정하고 그에 대한 위로까지 듣는 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알고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젠장!’
“아, 아무튼 다음에 뵙지요.”
절대 다음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을 한 상인이 꽁지가 빠져라 방을 빠져나갔다.
유더는 침묵 속에서 상인이 했던 말들에 펜으로 줄을 길게 그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지익 하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아주 크게 들렸다.
“흠……. 분량이 줄어들어 새 종이에 다시 작성해야겠군. 쿠르가. 부탁한다.”
“물론이지. 조금만 기다려.”
“…….”
새 종이가 다시 날라져 오고 유더가 새로이 펜을 들었다. 그때, 입술을 깨물고 있던 관리와 마법사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도……!”
“잠깐! 다시 작성하기 전에 이쪽도 좀……!”
소리치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먼저 발을 빼려던 마음을 들켰다는 당혹감과 다급함이 동시에 두 사람의 눈 속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니, 내가 먼저 몸을 빼내려 했는데 저놈이……!’
‘저놈보다 내가 먼저 빠져나가야 체면이라도 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디 그렇다. 그럴 생각이 없다가도 옆에서 먼저 나서면 저도 모르게 다급해져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인간의 습성이었다.
그리고 유더는 그런 그들의 다급한 마음에 불을 지를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두 분의 말씀은 방금 작성한 것을 또 고치란 말씀입니까? 마병단의 입장에서는 지금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고 몸을 내뺀 상인의 말은 바로 들어주었던 유더가 같은 걸 요구하는 자신들에게는 갑자기 거부의 뜻을 보이자, 관리와 마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오. 고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잔 거요……!”
“그래요. 제 말씀도 그 뜻입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마병단에 해명을 요구하시던 일이 아무런 결론도 맺지 못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건……!”
“그건 여러분께서도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아주 없던 일로 하자고 하시는 건 조금 그렇군요.”
‘미치겠구나. 저놈이 왜 갑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척을 하고 그러는 건데!’
‘상인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내게만 이러는 의도가 무엇이냐! 빌어먹을 놈!’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간 마병단이 수없이 공식적 답변을 해 주었음에도 무시하고 해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건 그들이었다.
유더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 저을수록 관리와 마법사는 기이하게도 점점 더 다급해졌다. 차라리 오늘의 대화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자신들의 집단으로 돌아갔을 때 변명이라도 하고 의견을 바꿀 수 있을 텐데, 이대로라면 자신들만 욕을 먹고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참아내던 순간, 아주 재미있게 이 꼴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끼어들었다.
“흠, 그렇다면 한 가지 해결책밖에 없겠군요.”
“그게 뭡니까.”
두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이라도 본 듯 다급히 물었다.
“없던 일로 해 달라는 요청까지의 이 과정 자체를 모두 적고, 모두 서약하면 깔끔히 해결되겠지요. 이 자리에 있던 이들 이외에는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으면 없던 일은 되지만 마병단이 우려하는 것과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서명이 서약으로 한 단계 더 뛰었다. 서명과 달리 서약은 마법의 힘이 깃들어 함부로 파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아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 키시아르에게 동의를 표했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두 분이 동의한다면 마병단은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이상한 논리였다. 하지만 자신들만 덤터기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해져 있던 7급 관리와 마법사는 결국 그 의견에 동의했다.
유더와 함께 서약을 마친 뒤, 그들은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몸을 낮추어 다시는 마병단 지부 앞에서 같은 항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서야 그곳을 뜰 수 있었다.
그들이 잔뜩 지치고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떠난 뒤, 길을 가득 메웠던 시위자들 없이 텅 빈 지부 앞을 보며 쿠르가와 마병단원들이 환호를 질렀다.
“세상에! 진짜 싹 사라졌잖아!”
“오늘만 이런 거 아니지? 이제 다 꺼진 거 맞지?”
“그렇다니까. 유더랑 단장님이 다 끝내버렸어!”
속이 시원해진 단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유더를 감싸고 빙빙 돌았다. 키시아르도 곁에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얼굴을 변용했다 해도 감히 단장에게 다가가고 싶은 간 큰 이는 여기에 없었다.
유더는 한참 만에야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서 벗어났다.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매만져 헝클어진 부분을 정리해 주었다.
‘자. 이제 반대하는 놈들은 다 코를 때려 꺼지게 했고……. 다음으로 넘어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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