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50화 (650/805)

650화

“그건 됐어. 여기 내 펜도 있으니까.”

유더가 품속에서 펜을 끄집어냈다. 그 순간, 관리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저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짝 뒤집힌 겉옷 자락 사이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노란색 마정석 브로치를 훔쳐본 마법사의 눈 또한 비슷하게 살짝 커졌다.

‘저 브로치에 박힌 마정석과 문장…… 설마?’

상인 또한 아무 반응 없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펜을 쥔 유더의 손에 낀 장갑을 아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눈을 연신 깜박이는 중이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저 장갑, 이제 보니……?’

“…….”

‘눈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 같군.’

유더는 특정 부분을 시작으로 몹시 새롭게 주변을 다시 살피기 시작한 세 시위자들을 못 본 척하며 종이 위에 그들의 발언을 적었다.

사실 여기서 적는 건 그저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그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지금 저 세 놈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다른 부분들에 있었다.

여기에서 선동질이나 하고 있을 정도라면 어지간히 욕심이 많은 놈들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소속 집단 내에서 별 볼 일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만한 놈들이라는 뜻도 된다.

힘 있고 실력 있고 줄도 잘 탄 놈들이 여기까지 힘들게 왜 오겠는가?

이런 일이라도 안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놈들이니 온 것이다.

그런 놈들일수록 앞날을 넓게 보지 못하고 단기적인 이득에 매몰되기에 인맥에 미친 듯이 집착하고,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의리 따윈 전혀 지키지 않는다.

처음에 놈들이 여기 따라왔을 때는 혼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조용한 공간에 얌전히 앉아 있으면 누구라도 정신을 차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변을 살피면 이제 이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더는 이곳에 오기 전 일부러 수도에서 선물 받은 물건 두 개를 가져왔다. 재상 헤브레이나 레이플랑의 전용 마법펜, 그리고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 보낸 마정석 브로치가 그것이었다.

물을 잉크로 바꾸어 어디서든 편하게 글씨를 쓸 수 있는 재상의 마법펜은 맞춤 주문 제작을 한 물건이기에 윗부분에 재상의 이름자와 가문의 문장이 떡하니 박혀 있다. 비록 재상이란 자리가 그리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진 않다지만, 헤브레이나 레이플랑 개인은 전통 있는 명문 귀족가의 일원이었다.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도 결국 4대 공작가 정도에 비교했을 때나 그러할 뿐, 남부의 보잘것없는 7급 관리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까마득한 권력자다.

그 재상에게서 개인적인 깊은 친분을 의미하는 전용 펜을 받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유더 아일을 본 7급 관리는 아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재상이 마병단원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협력 권고가 내려온 게 단순히 늘 보내던 권장 업무 수준의 의미가 아니었던 건가? 그렇다면 설마.’

혹시 저놈에게 여기서 잘못 보였다가는 재상께 직통으로 내 이름이 올라가게 생긴 것 아닌가?…….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까 언급했던 무슨 3급 관리라는 놈이 아마 저놈의 직접적 뒷배이자 귀족파 인물 중 하나겠지. 하지만 이쪽에는 재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관리들 사이에서는 재상이 가장 윗사람이다. 3급 관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선동질을 했다가 별안간 재상의 진노를 받아 갑자기 밥줄이 날아가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날아간다 해도 저놈의 뒷배가 뒷일을 책임져 줄 거란 믿음도 없을 테고.’

침묵 속에서 7급 관리의 이마에 슬그머니 땀이 맺혔다.

같은 순간, 마법사 또한 관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야. 저건 분명 요즘 화제를 모았던 서부 마법사 연합의 문장이 틀림없다. 박혀 있는 노란 마정석도 본 적이 없는 상등품… 설마 요즘 최고의 가치로 기대받는 대삼림 광산에서 캐낸 건가? 거기에 무려 직접 마법까지 새겨 넣었다면……!’

남부 사파이어 마법사 연합은 오로지 연구를 위해 설립된 서부 마법사 연합과는 그 궤가 달랐다. 좋게 말하자면 오래된 전통을 지닌 곳이고, 달리 말하면 지역 사회와 장기간 밀착하여 귀족을 위한 마도구 유통 따위에나 신경을 써 온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법적 재능이 엄청나게 뒤떨어져 일찌감치 진주탑에 머물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마법에 재능이 없어도 연구에 몸을 바치면 되련만, 사파이어 연합의 마법사들은 그것조차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마법사라기보다는 마도구를 만들어 돈을 버는 걸 즐기는 상인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질 좋은 최신 유행 마도구들을 아주 빠르게 알아볼 줄 알았고, 제대로 연구를 하여 명예를 획득한 다른 마법사들을 늘 부러워했다.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은 클지 몰라도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무엇 하나 자랑스레 내세울 것이 없는 사파이어 연합. 그에 비해 서부 마법사 연합은 얼마 전 몇백 년 만에 시도된 거대한 창작 마법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내 전 대륙에 일약 이름을 알렸다.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대삼림에서 다년간 연구한 끝에 발견한 대륙 최대 규모의 마정석 광산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그야말로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숨겨져 있던 금광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대접받는 중이었다.

마법사는 그 서부 마법사 연합의 문장이 당당히 새겨진 브로치를 다시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일반적으로 마법사가 각성자에게 그리 정성스럽고 대단한 물건을 줄 일은 없다. 그러나 저자가 정말 그 ‘유더 아일’이라면, 서부 마법사 연합이 그걸 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 마법사 연합이 발표했던 대마법 ‘유더 1번’의 그 유더 아일이 맞다면야 당연히 주고도 남겠지……!’

아마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지 못할 그 엄청난 마법. 모든 마법사들이 궁금해했던 그 마법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을 당사자가 정말 여기에 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마법사는 아주 오랜만에 제 안에 흐르고 있는 마법사로서의 피가 끓는 기분을 느꼈다. 유더가 갖고 있는 브로치와 마석의 정보, 그리고 서부 연합과 유더 1번에 대해 뭐라도 조금 더 물어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애타는 마법사의 눈빛에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저 묵묵하게 종이에 그가 아까 했던 말을 적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그제야 새삼 자신이 사파이어 연합을 대표해 요구했던 사항들이 유더 아일과 마병단 입장에서는 몹시 달갑지 않으리란 사실을 인지했다.

‘아, 그렇지. 제길! 이런 놈이 올 줄 알았으면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좀 더 유하게 접근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연합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안 좋겠지? 이걸 어떻게 한다.’

마법사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무릎을 떨기 시작한 사이, 마지막 세 번째 상단 소속 시위자는 앞선 두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유로 마른 입술 껍질을 뜯고 있었다.

‘저놈들…… 대체 뭐지? 뭔데 저리 대단한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흙투성이로 방치하며 걸치고 있는 거냐고!’

시작은 유더가 끼고 있던 장갑이었다. 잉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고급스러운 마법 펜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그 펜을 쥔 손에 낀 검은 장갑은 한술 더 뜬 고급 제품이었다.

혹시나 싶어 테이블 아래를 보니 의자 아래로 단정히 놓인 신발은 장갑보다 더 비싸고 눈에 띄지 않는 재질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상인을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인상이 흐릿하여 영 눈에 들어오지 않던 유더의 옆자리 사내가 걸친 신발이 유더의 것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는 사실이었다. 잘못 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그가 걸친 옷을 찬찬히 뜯어보니 엄청난 물건들이 연신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구하기도 힘든 특수한 약과 액체를 발라 만든 가죽. 오래된 듯 보여도 조금도 더러워지거나 올이 나가지 않은 특별한 옷감. 귀한 재료와 마정석을 수도 없이 깎고 갈아서 만든 게 분명한 작은 장식들.

겉만 보면 평범한 용병이나 여행자가 걸칠 법한 물건들로만 보인다. 그러나 전 대륙의 진귀한 물건들이 거쳐 지나가는 샬로인에서 평생을 보낸 상인의 눈은 피해 가지 못했다.

사내가 걸친 물건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져 보던 상인은 그 모든 것을 총합해 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판단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저런 물건들을 한 사람이 다 걸칠 수가 있지? 그걸 왜 난 이제야 알아차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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