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그때,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멀리서 이쪽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 너머로 무섭도록 새카만 눈동자를 정통으로 마주한 순간, 다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저 사람……! 그때 대삼림에서 마주쳤던 그 사람이잖아!’
다곤의 머릿속에 서부 거점이 없어지기 직전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대삼림에 공격을 해도 죽지 않고 오히려 점점 커지던 기이한 몬스터가 나타났던 때가 있었다.
다곤은 그것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공격대 중 한 명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놈이 공격을 하면 할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도 처리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로 돌아가 긴급 대피를 시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허둥대고 있던 순간, 갑자기 정체 모를 각성자 사내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십시오.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할 것입니다.’
마치 자살 희망자 같은 말을 남기고는 진짜 단신으로 공격을 받아 내 제 말을 증명해 낸 그 남자는, 기어이 몬스터를 낭떠러지 위까지 유인하여 끝장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다곤은 나한을 따라 다급히 서부 거점을 폐쇄하고 남부로 이동하느라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 남자가 대삼림에 방문하였던 마병단의 일원이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는 자칫 잘못했으면 잡혀갔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그 마병단 사내가 보였던 그 인간 같지 않은 엄청난 힘.
거대한 대삼림 전체가 그 남자의 손가락 아래 응답하여 심판을 내리는 듯하였던 그 광경만은 이후 꿈에서도 잊지 못했다.
사실 남부 거점에서 빠져나온 이후 얼마든지 다른 곳에 갈 수 있었음에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병단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은 데에는 그 기억이 크게 한몫을 했다. 다곤은 그날 자신과 함께했던 공격대 동료들 대부분이 남부 거점에서 탈출한 이후 같은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날의 일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내심 짐작했다.
그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바로 지금, 다곤의 눈앞에 또다시 서 있었다.
‘여, 여기가 마병단 지부니까 당연한…… 건가?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저 사람도 알아차릴 것 아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 속에서 다곤이 어쩔 줄 모르는 사이, 남자가 눈을 슬그머니 가늘게 떴다. 그가 성큼 가까워지자 다곤과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떠올랐다.
“사막 쪽에서 오셨다고요.”
“아……. 예, 에.”
다곤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목이 졸린 듯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우, 우릴 알아보고 당장 체포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니, 난 그때도 지금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렇지만 나그란의 별인 걸 들키면 전부 잡아가서 죽인다고 분명 다른 녀석들이……. 아니, 그래도 이젠 거길 나온 거니까… 괜찮나?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미친 듯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는 생각에 손발이 절로 움찔대고 식은땀이 줄줄 나던 찰나,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후 하고 짧은 호흡을 흘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웃었다고 생각할 법한 소리였으나 표정 변화가 없었던 탓에 누구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대단히 먼 곳에서 오셨군요. 다 같이 오신 겁니까.”
“예……에.”
이 많은 각성자들이 마병단 지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다 같이 모여 마병단 지원을 하러 온 거라면 더 흔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곤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닿을 겨를이 없었다. 제 답을 들은 상대의 눈동자 깊은 곳에 떠오른 미세한 감정 또한 마찬가지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1차 시험은 지원 즉시 곧바로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께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으니 별로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 어어, 아, 네. 그, 그렇군요? 어어어렵지 않군요, 네.”
망했다. 분명 망할 것이다. 다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참관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합니다만, 저도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모두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죠.”
그러면 이만. 짧고 깔끔하게 물러난 사내가 눈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다곤은 그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다가 겨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저쪽은 날 알아보지 못한 건가?! 죽었다 살아난 기분과 영문 모를 아쉬움 같은 기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원서 작성을 도와 주던 마병단원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야. 흔치 않은 일이네요. 유더가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1차 합격 정도는 그냥 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니 여러분의 실력이 벌써 기대되는데요?”
“유더……요? 그게 그 사람 이름이에요?”
다곤의 곁에 있던 동료 한 사람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말하면 바로 알 줄 알았는데…… 진짜 못 들어 보셨어요? 대삼림에서 혼자 엄청나게 큰 몬스터를 때려잡은 걸로 유명한 우리 단 최고의 실력자. 마병단장 보좌 유더 아일요. 이번에 평민 출신이 받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작위까지 받아서 엄청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
아직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던 다곤의 동료들이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숨을 삼켰다. 자신들이 방금 마주한 이가 서부 대삼림의 규모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그 괴물 같은 자임을 겨우 알아차린 듯했다.
‘하긴. 여기서 나 말고는 그때 공격대에 끝까지 참여했던 녀석이 없었으니까…….’
다곤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겨우 충격을 가라앉히는 사이에도 지원서 작성 담당 단원은 신나게 떠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유더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죠. 여러분 중 몇 분이나 저희의 동료가 되실진 모르겠지만, 마병단에 들어온다면 유더가 하는 말들을 꼭 잘 기억해 두세요. 제가 너무 과장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하는 말들은 틀린 게 없었거든요. 완전히 마병단의 자존심이자 정신이라고 할 만하죠! 그 녀석이 여러분 모두에게 1차 합격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한 걸 보면 여러분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걸 이미 알아본 걸 거예요.”
“그… 하하. 설마요. 그냥 저희가 지원자니까 덕담을 해 주신 거겠죠…….”
“덕담요? 그 녀석은 그런 거 안 해요. 그냥 사실만 말한다니까요.”
“…….”
“그게 바로 마병단의 정신이죠!”
단원이 씩 웃으며 엄지를 쳐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마병단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입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대체…… 그 마병단의 정신이란 게 뭔데?’
들어도 전혀 모르겠다. 어쩐지 마병단장보다 마병단장 보좌를 더욱 신뢰하는 듯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곤은 잠시 저래도 괜찮을지 의심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지원서 작성 직후 간략하게 이루어진 1차 시험에서 그들이 모두 사이좋게 합격하며 ‘지원자를 보자마자 합격 여부를 맞춘 유더 아일의 전설 같은 사례’를 단 내에 추가하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
유더는 건물 복도 안쪽을 향하여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도구로 외모를 변용한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 그리고 쿠르가는 멀쩡했으나 죽을상을 한 채 발을 끌며 따라오던 세 명의 시위 참석자들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시선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죽을 듯 기겁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한심한 마음이 샘솟았다.
‘저렇게 작은 일에도 놀라는 연약한 가슴들을 가지고 마병단에 던지는 욕들은 잘도 외쳤군.’
그가 지부로 들어오기 직전 했던 일은 아주 간단했다.
쿠르가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항의 시위에 참석했던 이 세 명을 꼽아 보라고 요청하자 저 세 사람이 지목당했다. 그들은 각기 마법사, 관리, 그리고 일반 시민 무리의 가장 앞쪽에 서서 열심히 마병단을 욕하며 항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도 많을 놈들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밤이고 낮이고 여기 와서 죽치고 항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뻔하지.’
저 세 놈이 마병단에 적대적인 의도를 전하기 위한 ‘목소리’ 역할로 각 집단에서 특별히 뽑힌 놈들이란 뜻이다.
여태까지 마병단은 일부러 저들의 시비에 아무런 맞대응도 하지 않았다. ‘윗선에서 이미 허락해 주었으니 우리는 진행할 뿐’이라는 태도를 쭉 고수했고, 법에 따라 황제와 재상, 궁중마법사청이 보낸 협력 권고만 전달해 주었다.
하지만 그 정도 ‘권고’를 가지고 얌전히 물러날 자들이었다면 상황이 이리되진 않았을 것이다. 뒤에 한 세력 하는 자들을 두고 있을 놈들은 칩거 중인 힘없는 황제와 권력 없이 실무만 하는 재상, 진주탑과 비교할 수 없이 영향력이 적은 궁중마법사청의 권고 따위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그따위로 움직여도 그들의 뒤에 있을 힘 있는 세력들 덕분에 아무 문제도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와 시선을 한번 교환한 뒤, 시위하는 자들의 앞으로 나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그토록 찾던 마병단의 책임자가 지금 여기에 왔다. 자, 이제 뭐가 그리 불만인지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볼까.”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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