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내가 보여 준 부분은 거의 후반에 치중되어 있지만, 앞쪽에는 동물과 닮은 몬스터에 대한 의견도 좀 더 자세히 적혀 있는 것 같더군.”
그쪽은 남부 지부 쪽에 도착하면 다시 살피도록 하겠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키시아르는 그렇게 말했다. 초대 타인 공작의 글이 적힌 종이 뭉치는 본래의 상태대로 가죽에 둘둘 말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마병단장의 짐 속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밤을 보내고 새벽이 밝기가 무섭게 작은 마을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중간에 두 번이나 다른 곳으로 빠지고 한 번은 발정기까지 보내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된 상태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동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곧 샬로인에 도착하겠군요.”
“그래. 이 속도대로라면 곧 남부 최대의 무역 도시가 자랑하는 붉은 황혼의 문을 통과할 수 있겠어.”
키시아르가 저 멀리 보이는 어렴풋한 풍경을 눈 위에 손그늘을 드리운 채 지그시 응시했다.
마병단의 남부 지부는 제국 남부에서 가장 큰 해상 무역 도시, 샬로인에 마련될 예정이었다. 사실 샬로인을 다스리는 영주는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헤른의 방계였기에 마병단 지부 건설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유더는 그것을 알면서도 강하게 그곳을 후보로 밀어붙였다.
이유는 간결했다. 그곳에서 곧 일어날 일들 때문이었다.
‘서부의 타이누가 서쪽 국가들과의 육로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면, 남부의 샬로인은 해로 무역으로 북쪽과 남쪽의 타국들과 연결되어 있다. 더 많은 타국의 문화가 비밀스레 유입되기 좋은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죄를 저질러도 배를 타고 도망가면 그만인 자들이 넘쳐나는 항구 도시. 샬로인은 불법이 판을 치기 아주 적절한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전 생에서 그 환경은 더욱 빛을 발해 화려한 꽃을 피웠다. 범죄의 온상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유흥을 좋아하는 귀족들은 그곳을 환락과 행복의 도시라 부르며 헤어나올 줄 모르고 머물렀고,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수많은 이들이 마약에 취하고 내기 격투장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잃었다.
이전 생의 마병단 남부 지부는 그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처음에 샬로인이 아닌 다른 도시에 세워졌었는데, 그 때문에 무슨 일을 하려 해도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치안 관련 업무를 수행하려 해도 한발 느리게 도착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친절한 조력자 따위는 없는 상황에서 마병단만으로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지.’
마병단 지부 건설을 반대하는 움직임이야 이전 생과 똑같다. 사실은 이전 생보다 더욱 강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중간보고도 오는 동안 키시아르를 통해서 들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뒤에는 정통성으로 무장하고 건강하기 그지없는 케일루사 황제가 있으며, 주변에는 수많은 조력자가 존재했다. 그 조력자들이 건네준 열쇠가 지금도 짐 속에서 쓰일 날을 기다리며 잘 잠들어 있는 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상…… 남부 지부에서 할 일은 마병단원 모집보다 그쪽이 우선이라 할 수 있다.’
유더는 오기 전 자신이 남부에 가면 하려 했던 계획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았다.
첫째. 도착하는 즉시 마병단 지부 건설을 반대하는 놈들의 입에 망설임 없이 입 다물 열쇠를 쥔 주먹을 처넣는다.
둘째. 그리고 지금쯤 슬그머니 싹트고 있을 불법 격투장과 마약의 싹을 찾아내어 송두리째 뽑아 불태워 버린다.
셋째. 마무리로 서부에서 놓친 남국인 상인 놈들의 흔적을 찾고, 나그란의 별을 손보는 일도 겸사겸사 처리한다.
‘완벽하군.’
사실 그 모든 걸 며칠 내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여태껏 준비해 온 게 아니던가.
유더는 곁에서 힘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걷고 있는 사내를 향하여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음?”
소리도 없이 향한 시선을 어찌 알아차렸는지, 키시아르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동자가 부드럽게 방긋 휘었다.
누구도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흐릿한 얼굴. 마법으로 변용하여 바뀐 갈색 머리.
그렇지만 그는 마병단의 모두가, 그리고 지금 유더가 그 누구보다도 믿고 있는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유더 혼자라면 몰라도, 그가 있는 한 괜찮을 터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
샬로인은 언제나 날씨가 좋기로 유명하다. 온도가 일정 기온 이하로 떨어지는 일도 없고, ‘영원한 사파이어’로 불리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거대한 무역 도시이자 동시에 휴양지로서 역할을 다하는 그곳에, 다소 주눅이 들어 보이는 인상의 남녀 여럿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다곤. 이쪽 거리 즈음에…… 마병단 지부가 있는 거 맞지?”
“맞다니까. 아까 오면서도 물어봤었잖아.”
“하지만 그 사람들, 우리가 물어볼 때마다 자꾸 이상한 거라도 보듯이 구니까……. 정말 거기가 맞나 싶어서.”
유독 불안한 얼굴을 한 소년 한 명이 우물거리며 채근하자 다곤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재크. 내 말 잘 들어. 우리가 나그란의 별 거점에서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어. 우린 도망쳐 나온 게 아니고, 우리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도 알지?”
“으, 으응.”
“로벨 말을 듣고 먼저 떠났던 라그나의 편지도 봤잖아. 거기로 가기만 하면 우린 이제 전처럼 살 필요 없어. 합격만 하면…… 아니, 하다못해 계약만 해도 제대로 된 일을 하면서 전처럼 살 수 있는 거야.”
“…….”
로벨과 라그나라는 이름을 듣자 불안해하던 이들이 제각기 입술을 꾹 다물고 굳은 결심을 다지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부 지부에 있는 로벨의 과거 동료이자 지금은 사라진 나그란의 별 서부 거점 출신 각성자들이었다. 전부 서부 거점 출신은 아니었고 남부 거점에서 쭉 머물러 왔던 소수의 각성자들도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먼 길을 온 뜻은 매한가지로 같았다.
그들은 어지러워진 나그란의 별을 떠나 마병단에 입단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사실 지금보다 더 빨리 거점을 떠났다면 이미 마병단 입단 시험을 치르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에서야 여기에 온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로벨의 추천을 듣고도 완전히 그를 믿지 못한 탓에 떠나고자 하는 이들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용감하며 실력이 강한 선발대가 먼저 샬로인으로 떠나 마병단 입단 시험을 치렀고, 그 뒤에 그들의 연락을 받은 후발대가 2차로 사막 거점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사실 여러 명이 한 번에 몸담았던 곳을 빠져나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박함이 그 모든 걸 가능케 했다.
“라그나는…… 이미 합격했다고 했었지?”
“그래. 그러니까 우리도 할 수 있을 거야.”
각성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길을 물어물어 찾아온 마병단 남부 지부와 마주한 순간, 그들의 단단했던 각오는 순식간에 맥없이 꺾일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여기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온다는 신고가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요. 다섯 번째! 한 번만 더 신고가 들어오면 어떻게 한다고 했었는지 기억하시오? 벌금을 내든가 아니면 나가시오!”
“남부 사파이어 마법사 연합은 샬로인의 역사를 망치려 드는 단체가 생기는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샬로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쭉 결사의 각오로 항의할 것이다!”
“결사! 각오! 절대! 항의!”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낡은 건물을 손보아 겨우 간판을 내건 듯한 모양새의 지부 건물까지는 괜찮았다. 어쨌든 ‘마병단’이라고 적혀 있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시험을 보기 위해 몰려든 각성자들이 아니라, 우아한 로브를 걸친 콧대 높은 마법사들과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깐깐한 얼굴의 관리들 뿐이었다.
“여기… 마병단 지부 맞지? 들어가도 되는… 거야?”
“거기, 단원 모집 시험을 접수하러 오신 분들이신가요?”
그때, 몹시 피로한 얼굴로 구석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검은 단복 차림의 누군가가 그들을 발견했다.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우물쭈물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맞긴 한데요…….”
“그래요. 지금은 정문이 보다시피 이렇게 어지러우니 옆문으로 들어가세요.”
“옆문요?”
“제가 서 있는 여기 바로 뒤쪽 벽을 이렇게 두드리면 열려요.”
마병단원이 기대어 서 있던 등 뒤를 툭툭 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벽이 슬그머니 반투명해지며 손이 쑥 드나드는 것이 아닌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그것이 누군가 능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낸 것임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거점도 다른 이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도록 능력을 사용해 온갖 보호 장치를 해 두었었지만, 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들어가는 문을 안 보이도록 해둘 만큼 능력 사용이 섬세하지는 못했다.
이걸 만든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한 각성자였다.
그들은 마법사들과 관리들의 눈을 피해 슬쩍 벽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모두 벽을 통과하기 직전, 피로하게 서 있던 마병단원이 갑자기 반색하며 “어어, 저기! 드디어 왔다!”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닫혀 버려 누가 왔다는 건지는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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