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44화 (644/805)

644화

물속 깊은 곳처럼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방금 들은 말의 충격적인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신의 말씀이…… 정말 신의 말이냐고?’

신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야 당연히도 경전일 터다. 유더는 그리 독실한 자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태양신 경전에 적힌 글들이 신에게서 직접 말을 들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어 이루어졌다던 것 정도는 알았다. 그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종이에 쓰인 말대로라면 초대 타인 공작은 아예 ‘경전은 신이 직접 내린 말씀’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경전이 신의 말임을 부정한다면 여태까지 신이 내린 기적이라며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 또한 부정하게 된다. 사제들이 보이는 신성력은 또 어떠한가?

유더의 머릿속에 이전에 키시아르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마법사들은 신성력의 존재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었다고 했었던가.’

하지만 그 논쟁보다도 지금의 이 말이 더 충격적이었으며 그만큼 대담했다. 만약 그들보다 먼저 이 종이 뭉치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 종이는 해독 즉시 불살라졌을 것이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말했던 ‘왜 여기에 숨겼는지는 알겠다’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초대 타인 공작은 경전에 쓰인 말들이 모두 인간들이 꾸며 낸 것이라 생각했단 겁니까?”

“그런 셈이지. 아무리 태양신 교단의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던 시기였다지만 위험한 발상임에는 틀림없어.”

그렇게 말했으나 종이를 내려다보는 키시아르의 표정은 크게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아야 할 황가의 자손이라기에는 더없이 담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단장님께서는 그리 놀라시는 것 같지 않군요.”

“그래? 상당히 놀라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마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면 그건 이 글의 어떤 부분은 이미 나도 어린 시절부터 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겠지.”

그게 무슨 부분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사내가 이내 답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들어보게. 오르를 건국하신 초대 황제께서 태양신의 피를 물려받은 성스러운 존재로, 신검을 받아 대멸망을 막고 나라를 세웠다는 건 유명한 전설이지.”

“네.”

“하지만 신께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그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신전에 가면… 성화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신의 화신이 그려진…….”

“공식적으로는 신의 화신을 그릴 때 ‘특별한 계시’를 받아 그렸다고들 하지. 그렇지만 사실 그걸 그린 화가들은 모두 당대의 황족들을 모델로 삼았다네. 내가 신의 화신 같다는 소릴 자주 들은 건 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대멸망 이전을 모르기에, 그때의 성화가 어떠했는지 몰라. 역사에 남겨진 첫 성화 또한 오르 건국 이후의 물건이거든.”

“그건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야.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감히 떠들겠나?”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턱을 문지르며 입술 끝을 올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점을 궁금해했네. 대신전에 갈 때마다 당시의 교황에게 내가 왜 신의 자손인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알고 싶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들었었지. 신성력을 깨친 뒤로 수많은 교리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주지 않았어.”

오르 황가의 시조가 신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는 경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믿는다. 믿음 자체가 답과도 같다. 이미 명확히 나와 있는 답을 부정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사제들은 그렇게 말했으나 그 말은 어린 키시아르를 설득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마력도, 신성력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 신을 특별히 열심히 믿었기에 깨친 힘이 아니었다는 뜻이네. 신성력을 깨친 나 같은 황족도 있지만, 아닌 황족이 사실 더 많아. 그렇다면 그들은 신의 피를 물려받은 황가의 자손이 아닌가 하면 그렇지는 않지.”

“…….”

“일전에 내가 말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나? 마법사들이 신성력의 유무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주제로 제법 논쟁했다던 말 말이야.”

키시아르의 입에서 유더가 방금 했던 생각과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기억합니다.”

“그들은 더 큰 신앙심이 더 대단한 신성력이 되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른 사제도 죽기 전까지는 그 힘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걸 주장의 근거로 삼았네. 신이 있다면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였지. 어떤 과격한 이는 신성력은 마력과 다를 바 없는 힘일 뿐이라 주장하기도 했어.”

물론 그렇게까지 주장한 이는 신전에 고발당해 종교 재판을 받았다며 키시아르는 웃었다.

“나는 신의 혈통에 대해 궁금해하던 시기에 그 이야기들을 보고 제법 흥미롭다고 여겼네. 사실 그 주장대로라면 신검 오르 또한 뛰어난 마도구 정도로 치환할 수 있거든.”

신검 오르가 마도구라니. 이건 그 옛날 마법사들보다 한술 더 뜬 소리였다. 유더는 슬슬 주변의 흐름을 차단하여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신검이 어느 정도 자아와 비슷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신비한 물건임엔 틀림없어. 하지만 그건 제멋대로 움직이는 델루마 궁의 갑옷 기사도 비슷하지. 갑옷 기사가 마법으로 만들어져 움직인다면 신검은 신성력을 토대로 움직인다는 게 다를 뿐이야. 정말로 비슷하지 않나?”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두 분야 모두 잘 모르기에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단장님의 말씀이니 일리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저 내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미친 소리라고 하지 않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행운에 감사하네.”

키시아르가 양눈을 동시에 찡긋 감았다 떴다.

“잠시 나의 옛이야기까지 해 버렸지만, 결국 오블릭 반 타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나야. 우리가 오래도록 어렵고 위대하다 여겼던 전설적인 이야기, 신비한 힘들의 처음 모습도 사실 알고 보면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

“지금이라는 건…….”

“그래. 고작 2년 전 하늘에서 떨어진 돌 하나에 살던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우리의 지금 같은 경우가 아주 잘 들어맞겠지.”

키시아르가 여태까지 했던 이야기에 더해 지금의 이 말까지 들으니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유더의 머릿속에 명확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초대 황제… 전설… 경전, 신……. 그리고 각성자.’

초대 타인 공작은 직접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이 부풀려져 전설이 되는 과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 자체는 이해하기 쉬운 일이었다. 유더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뭔가를 해낼 때마다 그 비슷한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경우는 두렵고 무서운 쪽으로 이야기가 부풀려졌다는 차이가 있긴 했다. 마병단장 유드레인 아일이 가진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한 힘의 비결이 알고 보면 매일 하나씩 집어먹는 어린아이의 생간에서 비롯되었다든가, 악마의 자식이라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얼마나 많이 생성되었던가.

‘어쩌면 그런 소문이 하나도 정정되지 않은 채로 몇백 년쯤 흘렀더라면 내가 진짜 그런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초대 황제가 신의 피를 이었다는 말도 혹시 그 비슷한 경우로 생겨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을 찬미하고 이해하기 위해 ‘알고 보니 신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모든 말은 결국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지만 정말 위험하게 느껴지긴 하는군.’

하지만 더 위험한 건 이 생각이 하면 할수록 점점 말이 되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후대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돌이 떨어져 각성자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그저 마력의 샘을 통해 마법사가 생겨났다는 전설과 비슷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신의 현신과도 같다는 찬사를 많이 들었던 키시아르가 역사에 남는다면 초대 황제의 환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런 말들이 붙었다 해서 진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 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그 먼 미래에는 누가 있을까.

‘저 글을 쓴 초대 타인 공작도 이런 과정을 보고 나서, 경전에 쓰인 글들의 존재 또한 어쩌면 같은 결과를 거친 결과물이 아니었나 싶었다는 거겠지.’

미약하게 전율이 일었다. 여태 아주 멀고 먼 이야기라 여겼던 것들이 순식간에 제 코앞에 불쑥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경전은 아주 오래전, 대멸망 훨씬 이전의 이야기를 부분부분 기록하고 있네. 온갖 비현실적인 비유로 뒤덮여 있긴 하지만 그것을 모두 걷어 내고서 생각해 보면……. 태양신의 존재를 이 땅에 증명해 내었다는 사자 오르헤의 존재는 어쩌면 이 땅에 마법을 정착시켰던 최초의 대마법사 루마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지 몰라.”

마법이 처음 이 땅에 나타났을 때 마법사들이 박해받으며 마법을 증명해 냈듯, 경전에 쓰여 있는 최초의 사제 또한 그러했다. 오르헤가 일으켰다는 여러 기적은 대마법사들이 일으킨 기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글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오블릭 반 타인은 이렇게 적었네.”

키시아르가 생각에 잠긴 유더에게 종이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보여 주었다.

“-아마 경전을 가지고서 이곳을 떠났던 영혼의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이미 하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남쪽으로 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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