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화
“흠. 기회를 만들어 주니 거절할 수 있나. 이쪽으로 와서 같이 보겠나?”
‘……기회?’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빠져나간 문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진짜로 장작 패는 꼬마를 도우러 간 게 아니라 우리 둘만 남아 있도록 빠진 거라고?’
격의 없이 서로를 믿는 사이라면 문제없는 일이다. 다만 그와 유더 사이에 그 정도의 사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전 생엔 확실히 없었지. 그리고 이번 생에는…….’
일전에 유더는 나단 주커만에게 자신을 경계하며 키시아르를 지키라고 주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이상한 주문을 다소 희한하게 여긴 듯했으나 유더가 바란 대로 충실하게 여태까지 잘 행동해 왔다.
얼마 전 키시아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유더에게 정보를 넘기고 조언을 주고받은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위 내였다. 키시아르와 함께 있는 유더를 볼 때마다 종종 아주 묘한 표정을 짓던 것도…… 뭐, 어련히 심경이 복잡할 테지만 알아서 거리를 잘 두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에서 일어났을 변화는 어쩌면 유더의 생각보다 좀 더 크고 깊었던 모양이었다.
이전 생의 나단 주커만은 여간해서는 키시아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발현 사고 이후로 그 행동은 더욱 강해져, 유더가 키시아르를 대면 보고할 때는 반드시 먼 발치에서라도 호위를 서려고 노력했다.
공적인 일이 생겼거나 키시아르의 명이 내려온 게 아닌데도 그의 판단만으로 이렇게 자리를 비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 내 발정기를 목도했는데도 이런 판단을 내린다고? 진짜인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히 유더를 향한 경계를 더 세우면 세웠지, 덜 세우진 않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사의 판단은 유더의 생각과 반대였던 듯했다.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향한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무언의 행동으로 나름의 믿음을 표현한 것과 다름없는 상대를 향한 복잡한 심경이 함께 소용돌이쳤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나단이 나간 게 그리 아쉬웠나?”
그때, 키시아르가 눈치 빠르게도 물었다. 웃고 있어도 그의 눈은 유더의 미약한 반응을 모두 훑고 있었다.
“아뇨. 주커만 경이 저희만 두고 나갔다는 게 조금…… 평소와 달리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더 가까이서 같이 해석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물론 그 편이 좋습니다.”
유더는 잡념을 지웠다. 키시아르의 곁에 다가가 앉자 그의 향이 미약하게 흘러나와 환영한다는 듯 피부를 간지럽히고는 사라졌다.
“좋게 생각하게. 나단처럼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흔치 않은 녀석이 이런 식으로 뜻을 내보인 건 나도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 그만큼 너를 믿고 좋게 보았다는 뜻이겠지.”
뭐, 당연한 일이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 흐뭇하고 따뜻한 감정이 묻어났다.
유더는 꼬부랑 낙서로밖에 안 보이는 고어를 내려다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그분이 저를 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정받는다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조금 걱정도 됩니다.”
“이런 세상에.”
키시아르가 과장되게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받고 싶어서 노력하는 건 보았어도, 인정받았다고 오히려 떨떠름해하다니. 하긴, 내 보좌는 부단장 자리도 몇 번이나 거절했던 위인이었지. 오랜만에 그 단호했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제법 그리운 마음이 드는걸.”
“농담이 아닙니다.”
“알아.”
키시아르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하지만 말이야, 네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기에 나단도 결국 믿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거란 생각은 안 드나?”
“그건 또 무슨…….”
유더가 미간을 슬쩍 모으기가 무섭게 다가온 손가락이 그곳을 부드럽게 눌러 펴 주었다.
“아무리 경계를 하려 해도 상대가 도무지 경계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만 보여 준다면, 거기에 더해 한술 더 떠서 오히려 더 경계해도 좋다고까지 말한다면 말이야. 그건 나라도 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
유더는 혹 이전에 제가 나단 주커만에게 했던 말을 키시아르가 이미 알고 있는지 의심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마치 그때 옆에서 보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말이었다.
“나단과 너는 성격적으로 닮은 구석이 제법 많아. 나는 전부터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지금도 이미 날 두고 둘이서만 작당을 할 때가 생긴 모양이지만, 그보다도 더 좋은 친구 말이야.”
“…….”
친구가 되면 뭐가 좋은가. 저와 성격이 비슷하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에게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나단 주커만이 그 정도였던가?
그리고 키시아르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자신 쪽이 더 기쁘다는 듯 웃고 있는 걸까. 나단 주커만과 유더가 작당하여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던 일이 사실 그리 기분이 좋았던 걸까.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스치고 지나갔으나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단 주커만이 저들만 두고 나간 일에 대한 무게감은 묘하게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살펴볼까.”
유더에게도 잘 보이도록 무릎과 무릎 사이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은 키시아르가 신중하게 힘을 운용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약한 종이지만 그의 손안에서는 달랐다.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몸을 일으킨 종이들이 긴 세월의 흔적으로 달라붙었던 부분들을 손쉽게 밀어내고 5장의 낱장으로 분리되었다.
“먼저 내가 한 번 읽고 나서 해석을 시작할 거야.”
설명과 함께 키시아르가 첫 번째 종이를 향하여 눈을 돌렸다. 유더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중하게 첫 번째 페이지를 훑은 사내가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로도 넘어갔다. 마지막 다섯 번째까지 모두 뒤집어 읽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게 고어라는 걸 생각한다면 사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훑어본 것을 소화하려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가 한참 뒤 다시 치뜬 사내가 이어서 자신의 짐에 들어 있던 작은 책 한 권을 빼냈다. 앞에 써 있는 제목을 흘긋 보니 그것은 고어 문법과 관련된 서적이었다.
“그건 또 언제 챙기셨던 겁니까.”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얇은 녀석으로 챙겼지. 어릴 적부터 준비성으론 진 적이 없었거든. 물론 진심을 다하는 상대에겐 그 준비성으로도 예외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최근 깨닫긴 했지만.”
우스개소리를 하며 책을 펼친 키시아르는 낡은 종이 앞에 문법책을 가까이 두고 몇 개를 비교하며 살폈다. 그 작업까지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책을 덮고 유더를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한참 후 깊은 숨이 흘렀다.
“이거 정말…… 굉장히 엄청난 내용이군. 왜 찢어서 따로 여기에 보관하고 싶었는지는 잘 알겠어.”
들을 준비는 이미 끝났다. 유더는 그의 입에서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온몸의 신경을 바짝 세웠다.
“약식으로 빠르게 파악만 한 거라 전문을 완전히 읽었다곤 볼 수 없네. 하지만 요약하자면, 초대 타인 공작…… 그러니까 오블릭 반 타인은 아무래도 몬스터를 연구하던 도중 네가 발견했던 그 부분이 자신이 찾던 문제의 답으로 가는 열쇠일 수도 있다고 여겼던 듯해.”
복잡해 보이는 말을 한 뒤 키시아르는 펼쳐진 종이의 어떤 부분을 향하여 손가락을 뻗었다.
“-어떤 ‘저주받은 것’은 토끼의 귀, 새의 날개, 개의 꼬리, 두더지의 발톱을 가졌다. 또 어떤 저주받은 것은 고양이의 눈, 물고기의 비늘을 가지기도 했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이 존재를 ‘신의 말씀’은 검은 달의 세계에서 왔노라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거짓이라 믿었다. 하지만 닮은 것들을 비교하여 모으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
“-검은 달이 보낸 저주받은 괴물들. 저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신의 말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검은 달은 무엇인가? 그리 생각했을 때 문득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말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신앙심이 낮다 해도, 이 정도로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말은 하지 않는다. 거의 해가 어디서 뜨는지, 물은 왜 흐르는지를 궁금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건국 초기의 사람이라 지금과는 상식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유더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 키시아르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의 믿을 수 없는 업적들이 부풀려져 전설이 되는 과정을 나는 모두 보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 이해해야 할 때, 후대에 오래도록 남겨져야 할 지식을 전하고 싶을 때 인간들은 ‘전설’을 만들어 낸다. 그리 생각하자 답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잠시 망설였다.
“-‘신의 말씀’은 정말로 신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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