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자, 그래서 나단. 네가 발견한 건 뭐지?”
“제가 발견한 것은 이쪽에 있습니다. 따라오시는 동안 말씀드리죠.”
나단 주커만이 성큼성큼 걸어 그가 줄곧 돌아다녔던 방향을 향해 갔다.
“저는 아일 경처럼 사체에서 흔적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이 굴의 벽면과 땅을 주로 살폈습니다. 마법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물리적인 흔적은 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키시아르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흔적이 남기 쉬운 곳들을 위주로 살펴보다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쪽을 보십시오.”
유더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단 주커만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땅을 파내어 만든 굴 벽과 바닥 사이였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불을 하나 더 불러내어 비추자 뭔가가 보였다.
‘저건…….’
작은 동전만 한 크기의 뭔가가 그곳에 반쯤 묻혀 있었다. 썩어서 흙이 된 지 오래인 먼지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그것은 세월의 흔적 때문에 본래의 형태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초대 타인 공작이 남기고 간 물건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과연 눈썰미가 대단하구나, 나단. 잘했다. 어디,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
부관을 칭찬한 키시아르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유더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언제든 힘을 발하거나 검을 뽑을 준비를 동시에 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느긋하게 금속 조각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빛에 비추어 보던 키시아르가 문득 ‘음……?’하는 소리를 흘렸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그래. 많이 상하긴 했지만 이와 같은 물건을 전에 본 적이 있어. 뭔지 알 것 같군.”
“뭡니까.”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브로치.”
키시아르가 먼지를 떨어낸 금속 조각을 손바닥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렸다.
“마법사가 흔치 않았던 시기의 옛 마법사들은 정체를 알리기 위해 브로치를 착용했지.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덕에 마석 브로치를 하고 다니는 마법사들이 많아.”
그러고 보면 마법사들은 유독 마석이나 보석이 달린 브로치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마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마석 액세서리를 자주 한다고는 들었는데, 그런 의미도 있었던 줄은 몰랐다.
‘타이스 율만도 그랬고……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도 많이 하고 있었지. 내게 보낸 선물도 브로치 형태였고…….’
“그렇다면 그건 역시 초대 타인 공작의 물건일까요.”
“놀랍지만 아니야.”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표면의 무늬를 잘 보게.”
키시아르가 손톱 끝으로 브로치 겉면을 살짝 두드렸다. 검은 재가 조금 떨어져 나가며 희미하게 새겨진 무늬가 보이는 듯도 했다.
“레몬꽃 무늬. 이 무늬를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했던 마법사가 천 년 전에 있었다네. 아주 유명한 이지. 누구인지 짐작하겠나?”
레몬꽃이라는 말에 문득 누군가가 떠오른 건 왜일까.
“……혹시, 루마입니까?”
“정답.”
역시 맞았다. 유더는 유독 레몬을 좋아하는 이논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초대 타인 공작은 루마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상징이 담긴 브로치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그렇지 않아. 옛 마법사들은 이런 물건을 결코 다른 이에게 넘기지 않았어. 다만…… 예외가 있기는 했지.”
말을 하다 잠시 멈춘 키시아르가 손바닥 위의 브로치 조각을 응시했다.
“죽은 이를 애도할 때.”
관 앞에 꽃을 두고 가듯이, 옛 마법사들은 친밀한 마법사의 무덤에 자신의 브로치를 두고 갔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것과 같은 브로치가 황실에 하나 더 보관되어 있네. 초대 황후께서 승하하고 장례식이 끝난 후 그분이 자주 머물렀던 새벽궁 집무실 앞에 놓여 있던 물건이라고 전해지지.”
위대한 마법사 루마는 그때 이미 제국을 떠난 지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였다.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였던 황후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루마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수군댔는데, 장례가 모두 끝난 뒤 남겨진 브로치를 보고 몹시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꽃다발과 함께 브로치만 남아 있었을 뿐이라 그것이 루마 본인이 직접 두고 간 물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기에, 세간에는 공개하지 않았네. 2대 황제 또한 굳이 그것을 널리 알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
“그렇군요. 그러면 이 물건도…… 어쩌면 그런 식으로 남겨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가능하지 않겠나? 제자가 숨겨 둔 연구 결과물들이 있는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도, 그리고 흔적을 남겨 두고 가는 것도 말이야. 이번이 처음이라면 몰라도…… 선례가 하나 더 있는 이상 그리 추측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
정말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제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알려진 루마가 다른 이들 몰래 이후 다시 돌아왔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루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 같던 이논도 이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아마 그도 모르고 있을 사실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희에겐 마침 그게 정말 루마가 두고 간 물건인지, 아닌지 읽어 낼 수 있을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군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을 했지.”
키시아르가 싱긋 웃은 뒤 브로치 조각을 품에 넣었다.
“이건 돌아가는 즉시 마병단 본부 쪽에 보내야겠어.”
죽은 마법사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두고 간 브로치일 수도 있다 생각하자 브로치 주변에 쌓여 있던 검은 흙덩어리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들은 초대 황후의 집무실 앞에 놓여 있었다던 것과 같은 꽃다발이 아니었을까.
“자, 이로써 새로운 사실을 몇 가지 추측해 볼 수 있게 됐군.”
키시아르가 도로 중앙부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첫째. 이곳은 어쩌면 연구 일지가 남아 있던 지하 감옥보다도 초대 타인 공작의 중요한 연구 결과가 보관된 장소일 수도 있다. 둘. 이곳이 만들어진 이후 누군가 여기에 침입하여 애도의 브로치를 두고 갔다. 셋. 그 누군가는 루마로 추정된다.”
늘어놓고 나니 실로 대단했다. 옛 전설의 한 페이지라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셋을 조합해 보았을 때 나오는 결론은 하나지. 여긴 루마가 찾아와 볼 정도의 의미가 있었던 곳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중앙부에서 때마침 오래된 ‘검진’의 흔적을 찾아낸 참이고 말이야.”
키시아르가 가장 중앙에 놓여 있는 사체 앞에 섰다.
‘검진?’
기억을 뒤져 보아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 아마도 고대와 관련된 정보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러했다.
“검진이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오래된 전술 게임의 배치 방법 중 하나야. 이 진을 성공시키려면 일반패 모두를 기사패로 승격시키는 특별한 규칙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여러 개로 늘어난 기사패가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밀어붙일 수 있었지.”
“너무 사기에 가까운 전술 같습니다만.”
“하하. 사기도 사기지만 일단 현실성 없는 전술이라 판단하기에 지금은 쓰이지 않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술 게임이 실제 전술 회의에서 따온 게임이라는 걸 토대로 하여 옛 고대에는 실제로 그런 전술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하지.”
“……기사패는 검에 통달한 자. 즉 소드 마스터라는 설정이 있지 않았습니까? 고대에는 일반인도 쉽게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는 겁니까?”
얌전히 듣고 있던 나단 주커만이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 다만 여기에 펼쳐진 게 그 검진의 배치와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이전에 타이누의 지하감옥 4층 연구실을 발견했을 때도 전술 게임과 관련된 방식으로 뭔가를 숨겨 놓았었거든. 아무래도 초대 타인 공작도 나만큼이나 전술 게임을 좋아했던 것 같지 않나?”
키시아르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오래된 전술 게임의 흔적을 발견한 게 상당히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진의 배치가 지금 상황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무튼 그 진이 성공할 경우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게 바로 여기. 중앙에 배치된 패라네.”
키시아르가 발아래 놓인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여기에 숨겨 둔 초대 타인 공작의 흔적이 있다면, 어쩌면 이 아래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쉽죠.”
유더의 한쪽 눈이 전보다 밝은 금빛으로 빛났다. 그와 동시에 사체가 놓여 있던 땅이 꺼지고,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검은 가죽으로 감싼 종이 뭉치였다.
‘키시아르의 추측대로군.’
유더는 그것을 낚아채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내부에 적힌 건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고어였으나, 종이 질이 어쩐지 조금 낯익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찢어 낸 듯한……. 혹시 그 일지에서 분리된 페이지인가?’
의심하며 만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숨겨야 할 내용이란 무엇이었을까. 유더는 종이에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키시아르에게 그것을 넘겼다.
“좋아. 확인은 돌아가서 해야겠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작은 꼬마 안내자가 우리가 사라진 줄 알고 찾으러 올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갈까.”
“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빨랐다. 유더는 땅 위로 올라가자마자 공동묘지 입구를 도로 닫았고, 키시아르 또한 세워 놓았던 건물을 도로 흐트러뜨렸다.
이제 아무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터였다.
“뭐? 내일 새벽에 바로 떠난다구? 뭐 돌아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돌아오자마자 떠나겠다고 말하는 용병 세 사람을 보며 집주인 노인은 몹시도 아쉬워했다. 며칠 정도 더 받아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숙박비가 사라져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예상보다 더 빨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손녀분께서 길 안내를 정말 잘해 주어 일이 빨리 끝났기에 감사의 표시로 안내료를 좀 더 드리고자 합니다.”
“정말이오? 허허허. 앤이 들으면 기뻐하겠어.”
은화 몇 개를 더 받아든 노인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세 사람을 위하여 구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많은 재료를 이용해 거한 식사를 차려 주었다.
물론 그 식사의 절반 이상은 유더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브로치는 잘 싸서 전서조 편에 보냈고, 이제 남은 건 이 종이의 해석이군.”
키시아르가 의자에 앉아 숨겨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폈다.
“읽자마자 바로 전달하는 거라 뜻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궁금하다면 들어 보겠나?”
“네.”
“저는 그리 궁금하지 않으니 바깥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까 뒤뜰에서 꼬마가 할아버지 대신 장작을 패고 있더군요.”
나단 주커만이 일어나 묵묵히 나갔다. 그의 모습을 왠지 미묘한 웃음을 띤 채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손을 뻗었다.
“흠. 기회를 만들어 주니 거절할 수 있나. 이쪽으로 와서 같이 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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