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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40화 (640/805)

640화

“이곳은 타이누의 지하 감옥과 달리 혈연으로만 열 수 있는 보호 장치를 해 두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야.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몹시 단순해지지. 이전처럼 길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오래 끌지 않도록 나름대로 그간 공부했거든.”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황홀할 정도의 밝은 빛과 함께 뿜어져 나온 금빛 마력들이 키시아르의 손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눈앞을 메웠다. 바람과 비슷하지만 그와 다른 기운이 공간을 밝히더니, 한참 뒤 조용히 사그라졌다.

막다른 길이라 여겼던 곳은 이제 더 이상 막혀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로막고 있던 벽 따윈 없었던 듯이 깨끗하게 뚫린 통로가 그들을 맞이했다.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유용한 탐색 마도구, 진실의 거울에 나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하지만 효과 좋은 마법을 조금 섞었네.”

키시아르가 손을 뒤집어 쥐고 있던 작고 낡은 거울을 보여 주었다.

‘에제인 왕자가 보낸 유물을 조사하려고 구했던 그 마도구잖아.’

거울을 휘감은 마력은 이전에 쥬스틴 부인에게서 처음 얻었을 때보다 다소 감소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완전히 힘을 잃은 상태는 아닌 듯했다.

“이런 곳에 오면서 유용할 도구를 안 챙겨 오는 건 안 될 일이니까.”

철저한 준비성을 웃음 뒤에 버무려 잘도 숨길 줄 아는 사내가 눈을 찡긋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런 함정이 하나쯤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준비했지. 쓸 일이 생겨서 다행이군.”

“하지만 너무 많은 힘을 쓰셨습니다. 그릇은…… 괜찮으십니까.”

나단 주커만이 염려를 비쳤다.

“이전이라면 확실히 이 이후 며칠은 쉬어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정도도 이젠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날이 갈수록 내 그릇의 안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걸 너도 느꼈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말대로 키시아르는 거의 멀쩡해 보였다. 이마에 땀이 좀 맺혀 있기는 해도, 예전에 마병단 지하에서 마법을 쓰고 나서 며칠 쉬었던 때처럼 기력이 쇠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유더도 그간 날이 갈수록 키시아르가 힘을 사용하는 빈도가 느는 모습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이리 확언을 들은 건 처음이어서인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심증과 확신 사이는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다. 그가 보이는 힘이 단순히 실력의 발전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그릇의 안정도가 높아진 것도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옛 생각이 났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지금껏 얼마나 자신이 지닌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랐는지,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는지 알고 있다. 금이 간 나무 목검 하나로 벽에 거대한 검흔을 새기던 날의 그는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고 자유로워 보였었던가.

지금의 모습은 그 노력에 대한 답이나 다름없었다.

나단 주커만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당당히 땅을 딛고 선 주군의 모습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키시아르가 죽음을 생각할 만큼 상태가 최악이었던 시절을 알고 있을 그에게 이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얼마 전 금이 간 그릇을 안정시키는 힘이 내가 지닌 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게 되었다. 전부 보좌 덕이었지. 그러니 이제 이 정도로는 염려하지 않아도 돼, 나단.”

‘……잠깐. 여기서 왜 내 이름이 나오는 거지.’

유더가 멈칫하며 눈썹을 모았다.

케일루사 황제를 고치면서 금이 간 그릇을 보호하는 힘의 근원이 단순히 ‘각성’ 그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키시아르의 힘이 보태져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유더의 덕은 아니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나단 주커만이 입을 여는 쪽이 더 빨랐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더 높은 경지의 성취를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놀랍게도 이 기사는 제 주군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대로 수긍했다. 덕분에 유더는 제 덕이 아니라고 취소해 달라 말할 시기를 완벽하게 놓쳤다.

지나친 염려를 하여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 축하를 전한단 점에서는 제 주군과 한없이 닮은 면이 있는 자였다.

아마 키시아르가 이렇게 자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도 나단 주커만과 같이 성실한 이가 그리 금방 염려를 거두진 않을 터다. 하지만 축하를 전한 뒤로 기사의 분위기는 한결 유하게 변했다.

그러나 새로이 드러난 길로 나아가 여태까지 중 가장 거대한 굴에 다다랐을 때, 세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이건.”

찌푸린 채 눈만 움직여 주변을 파악하는 유더의 곁에서 키시아르가 입술 밑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굉장히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배치군 그래. 헬렘이 여기에 왔더라면 아주 좋아했겠는걸.”

거대한 땅굴 속에는 수백 개 이상은 족히 될 듯한 몬스터 뼈가 놓여 있었다. 다만 그것들의 배치가 다소 기이했다. 마치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 눕혀 둔 것처럼 질서 정연하게, 서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않도록 줄을 지어 놓아둔 모습은 일견 오싹하기까지 했다.

대체 초대 타인 공작은 왜 연구가 끝난 이후의 사체를 이런 식으로 놓아둔 것일까?

“유더. 보이는 마력의 흐름 상태는 어떻지?”

“이곳을 감추고 있던 벽이 뚫린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보았던 건 그 마법에서 비롯된 마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곳 자체는 마법적으로 손을 대지 않았단 건가.”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키시아르가 이내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사방이 트여 있어 반드시 붙어 다녀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각자 흩어져 이상한 게 없나 살펴보도록 하지. 초대 타인 공작이 남겼을지도 모를 흔적을 우선적으로 찾아보게.”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흩어져 뼈와 뼈 사이를 거닐며 무언가 이상한 것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유더는 여전히 마력의 혜안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 개의 불꽃을 허공에 띄워 주변을 밝혔다.

‘가까이서 보니 더 기묘하긴 하군. 몬스터 뼈를 이런 식으로 정렬해 두고 볼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심약한 사람이라면 들어서자마자 기절하여 실려 나갔을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숨 쉬듯 몬스터를 도륙해 이보다 더 많은 사체를 쌓아 본 경험이 있는 유더에게는 그저 조금 불쾌하지만 이상한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더는 산책이라도 하듯 주변을 거닐며 아래에 늘어진 뼈를 살폈다.

‘어떤 건 제법 멀쩡하고, 어떤 건 거의 흔적밖에 안 남았군. 옛 몬스터들은 지금 나오는 몬스터보다 좀 물렁한 편이었나?’

몬스터의 사체와 뼈는 튼튼하여 썩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괜히 몬스터 사체 부산물로 만든 무기가 인기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뼈들은 상태가 각양각색으로 다양했다. 어떤 건 말라붙은 거죽이 남아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어떤 건 썩은 흙과 조각 몇 개만이 거기에 뭔가가 있었단 걸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정렬된 전술 게임의 패처럼 정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놈들은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조차 추측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렇게 계속 아래를 보며 걸어가다가, 유더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거, 지나치게 썩어 거의 사라진 사체가 있는 자리와 아닌 것 사이에 어떤 규칙이 있는 것도 같은데.’

형태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썩은 사체들 다음에는 반드시 비슷한 크기의 평균적인 다른 사체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체 다음에는 또 형태가 없다시피 한 사체가 줄줄이 이어졌다. 주변에 있는 다른 사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배치하는 크기에도 차이를 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를 거친 사체와 아닌 사체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가 신경 한구석에 걸렸다.

그게 뭘까 생각해 보다가, 유더는 드물게도 많이 썩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뼈가 제법 남은 사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잘 되었군. 옆에 있는 것과 차이를 알아보기 쉽겠어.’

그는 거의 비슷한 크기를 지닌 두 개의 사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뭐지?’

그는 뼈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자 방금 느꼈던 의문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건…… 몬스터의 사체가 아니지 않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주변을 걸었다. 흔적이 조금 더 남아 있는 ‘지나치게 썩은’ 사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들을 몇 개 더 찾아낸 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느꼈다.

지금 여기에는 몬스터 사체뿐만이 아니라, 다른 짐승의 사체도 많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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