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화
유더와 비슷한 경우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키시아르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가운데, 유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대상이 초대 황제 폐하라서 놀라울 뿐, 이논은 과거에도 저와 같은 이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이전부터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일지에 숨겨진 내용이 정말이라면 드디어 그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는 셈이겠지요.”
“이전부터 그랬다면, 무언가 근거가 있었기에 한 추측인가?”
이 이상까지 과연 말해도 될까. 잠시 망설였으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이논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당사자의 입으로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면 이논이 대마법사 루마에 대해 잘 안다는 사실을 미리 뒷받침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논은…… 대마법사 루마에 대해 다른 이들이 잘 모르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루마는 제국을 떠나기 전 다른 이들에게 비밀로 어떤 연구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제자인 초대 타인 공작과 비슷하게도 말이군.”
“네.”
키시아르는 이논이 왜 루마에 대해 잘 아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궁금해한 건 유더가 말하고자 한 핵심 부분뿐이었다.
“정확히 어떤 연구였지? 공작 쪽과 비슷한 주제였나?”
“아뇨. 그가 연구한 건…….”
유더는 그들의 앞에 펼쳐진 어둠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이었습니다.”
“…….”
그 누구도 해낸 적이 없는 일. 그러나 여기에 서 있는 유더 아일이 실제로 겪은 일.
유더는 이전에 이논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뒤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대마법사 루마는 오랫동안 남들에게는 비밀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연구했다. 그러나 이논처럼 엄청난 존재를 만들어 낸 대마법사임에도 그는 연구의 결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제국을 떠나 버렸다.
이논은 루마가 어쩌면 유더처럼 시간을 되돌아온 이를 만난 적이 있기에 그런 괴기한 연구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드디어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일지에 숨겨진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그 추측을 뒷받침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냈다.
‘-여기에 쓰인 걸 모두 사실 기반이라 감안한다면, 그 상대가 어쩌면 이 나라의 첫 황제였을지도 몰라.’
확실한지 아닌지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초대 타인 공작과 루마는 그렇게 믿은 듯 보였단 부분이었다.
전설적인 대마법사와 그의 제자이자 초대 황제의 피를 이은 공작. 충분히 똑똑하고 대단했을 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믿게 되려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이 다른 이들 몰래 묘한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초대 황제의 서거 이후로 겹친다. 한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몬스터가 어디서 오는지를 연구하고 싶어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직접적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마법을 만들려 노력했다.
향한 방향은 달라도 시간과 관련된 연구를 했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제국의 첫 번째 황제는 유더처럼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사람이었을까?
“정리하자면…… 대마법사 루마와 초대 타인 공작 모두 남들 몰래 시간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원인이 이 제국을 세운 첫 번째 황제일 수 있단 거군. 그분께서 정말로 너와 같은 존재였다면 놀랍게도 모두 말이 되는 상황이고 말이야.”
“예.”
키시아르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생각을 갈무리하려는 듯 오랫동안 침묵하는 모습에서 그가 이 상황을 조금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겠으나 그 시대의 기록은 제대로 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 망자의 물건은 사후에 모두 없애는 게 옳다고 여겨졌고, 기술력의 한계로 제대로 된 종이조차 존재하지 않아 태양신 경전조차 사제들에게 철저히 외우도록 만들어 구전하는 방식을 병용해 소실을 막았을 정도니까.”
지금 남겨진 기록의 대부분은 구전된 이야기에 약간의 사료를 섞어 후대인들이 재창조한 내용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쓴웃음을 짧게 흘렸다.
“황궁에 보관 중인 당시의 유물들조차 가끔 진위 여부를 의심받을 정도이니 더 말이 필요 없을 거라 믿네.”
“…….”
“하지만 얼마 전, 공교롭게도 내가 그 시대의 얼마 안 되는 기록들까지 뒤져 볼 만한 일이 있기는 했지.”
유더의 죽음을 꿈에서 본 뒤 키시아르는 수많은 금서를 대출해 왔다. 그중에는 초대 황제 시절 쓰인 당시 황후와 궁인들의 일기와 기록도 존재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아마 초대 황제의 죽음 원인이나 시간을 돌리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던 거겠지. 있었더라면 진작 모두 알았을 테니까.’
유더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그때는 초대 황제와 관련된 부분까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아 내게 필요하다 판단되는 부분들만을 보았을 뿐이었어.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 살펴보도록 하지. 혹시 숨겨져 있을 부분이 또 존재할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곳에 있을 초대 타인 공작의 흔적부터 보도록 할까.”
유더는 차단했던 공기의 흐름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고지식하게도 일부러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나단 주커만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혹여나 실수로라도 소리를 듣지 않도록 신중을 기한 모습에서 신뢰가 느껴졌다.
“이야기는 대충 끝났다, 나단. 어서 가자.”
“알겠습니다.”
그들은 돌을 쌓아 만든 굴을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옆으로 빠지는 첫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는 드디어 찾던 것이 나온 줄 알았으나, 그 끝에 있었던 건 작은 방 정도 크기의 막다른 동굴과 그 안에 가득 안치된 인골 조각뿐이었다.
이후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큰길 사이사이로 빠지는 샛길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는 오래전 먼지가 된 게 분명한 뼛조각들만 흙더미에 묻히다 만 채 뻐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 안내해 주었던 꼬마가 얘기했던 게 이런 거였겠군.’
이 땅을 파 내려갔을 과거 어느 시대의 영주가 이런 걸 발견하고서 얼마나 모골이 송연했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도로 파묻어 버리고 다시는 돌보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세 사람은 그 정도 따위에 겁을 먹기에는 너무 많은 걸 보고 경험한 자들이었다.
“고대의 공동묘지는 이렇게 개미굴 같은 형식으로 이어지는 게 특징이지.”
키시아르가 황궁을 안내해 주던 때와 조금의 차이도 없는 태도로 밝게 설명해 주었다.
“입구에서 가까울수록 더 옛날에 묻힌 자들이고, 묻을 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깊이 굴을 파 안치실을 추가로 만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네. 규모로 보아하니 이 정도면 처음 만들어진 건 대멸망 이전일지도 모르겠는걸.”
“저는 대피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런 목적도 있었을지 모르지.”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유더의 말에 동의했다.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정도 형태를 유지할 만큼 튼튼한 굴을 단지 시체 안치용으로만 만드는 건 아까운 일이니까. 재해가 닥쳤을 때 대피용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어. 실제로 수도 근처에서 발견된 건국 초기 공동묘지 유적에선 몬스터 침입 등의 상황에 대피한 걸로 보이는 이들의 유물이 나온 적이 있네.”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네 눈에 비치는 건 어떻지? 마력의 흐름이 계속 강해지고 있나?”
“글쎄요. 이곳에 들어온 뒤로는 줄곧 비슷합니다.”
“앞쪽에 새로운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묵묵히 뒤를 따르던 나단 주커만이 목소리를 내어 주의를 환기했다. 그의 말대로 또다시 새로운 갈림길이 눈앞에 보였다.
다만, 이번 갈림길은 샛길이 아니었고 이전과 달리 몹시 컸다.
유더는 두 갈림길을 차분히 응시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혜안이 오른쪽에서 조금 더 강한 흐름을 보았다.
“오른쪽일 것 같습니다.”
“그래. 벽을 이루는 돌의 상태도 오른쪽이 왼쪽보다 덜 마모되었군. 좀 더 나중에 팠다는 뜻이지.”
그들은 오른쪽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마주친 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막다른 길이군요.”
“눈에 비치는 건?”
“여전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속아 줄 이유가 없겠어.”
키시아르가 손목을 돌리며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그의 붉은 눈을 타고 금빛 마력이 스르르 솟구쳤다. 각성자의 힘에 이어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는 신호였다.
유더의 눈이 키시아르의 마력에 반응하듯이 더욱 강한 빛을 냈다.
“이곳은 타이누의 지하 감옥과 달리 혈연으로만 열 수 있는 보호 장치를 해 두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야.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몹시 단순해지지. 이전처럼 길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오래 끌지 않도록 나름대로 그간 공부했거든.”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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