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오랜 세월을 되감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공동묘지 내부는 몹시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키시아르가 쌓아 올린 건 그저 겉을 이루는 뼈대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옛 건축 양식대로라면 진짜 시체가 안치된 장소로 내려가는 입구는 건물의 가장 안쪽. 그러니까… 이쯤에 있어야 하지.”
거침없이 나아간 키시아르가 어느 한곳에서 멈추었다. 그가 내려다보는 땅은 돌이 뽑혀 나온 흔적으로 어수선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래로 내려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듯 보였으나, 이 중 누구도 그런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땅을 제 수족처럼 움직이는 유더 아일이 여기에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다음은 제가 하겠습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지정한 땅을 향하여 힘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저 눈썹만 한번 슬쩍 까딱 움직였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찰나의 순간 유더는 주변 일대의 대지 전체를 손아귀에 쥐었다.
거대한 힘에 집중하며 눈을 내리깔자 발아래 땅속의 상황이 직접 앞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곳이 바위가 많은 땅으로 보였던 건 아래에 돌로 벽을 쌓아 만든 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 오랫동안 위에 쌓인 흙으로 인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막혀 있어.’
그렇다면 돌로 만든 뼈대는 피하되 내부를 메운 흙만 옮겨 동굴로 내려갈 수 있도록 통로를 드러내면 된다. 흙을 옮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판단을 마친 유더는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또다시 힘을 발하자, 아래쪽에서 우르릉거리는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주변 마을 사람들이 조금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지는 않을 테니까.’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도울 테니 말씀해 주십시오.”
나단 주커만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말을 걸었다. 키시아르는 그의 곁에 지그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당연한 신뢰를 담은 그의 시선이 유더가 지닌 각성자로서의 감각과 인간적인 감정을 동시에 자극했다.
수도 없이 해 본 일인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반드시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힘을 발휘하고 싶었다.
어쩌면 방금 키시아르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을까.
“괜찮습니다. 금방 끝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유더는 그 말대로 했다.
잠시 후 땅이 꿀럭거리며 늪처럼 요동을 치더니, 그들의 앞에서 엄청나게 많은 흙더미를 토해 내며 괴물처럼 불쑥 입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유더의 혜안에도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 더 선명히 비쳤다.
‘됐다.’
드디어 언제부터 묻혀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고대의 묘지 입구가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키시아르가 건물을 쌓아 올렸던 때와는 또 다른 대단한 장관이었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드러난 입구를 자세히 살폈다.
“완벽하군. 잘 찾아냈어.”
“제 눈에도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한 흐름이 비치는 걸 보아 제대로 찾은 게 맞는 듯합니다.”
“그러면 내려가 볼까.”
그들은 지하 묘지로 내려가는 진짜 입구를 향하여 발을 내디뎠다. 오랜 시간 쌓인 흙을 치워 낸 돌벽 사이를 걷기 시작하자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뒷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기에 유더는 불을 불러내어 주변을 밝혔다.
‘오래된 곳치고는 굉장히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기보다는 대피용 지하 통로처럼 생겼군.’
길은 좁았지만 높이는 제법 높았다. 나단 주커만도 머리를 거의 숙이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키시아르에게는 역시나 천장이 낮았기에,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걸어야만 했다.
나단 주커만은 주군이 웅크리고 걷는 게 조금 신경이 쓰이는 듯했으나 유더는 그것과 좀 다른 의미로 신경이 쓰였다.
그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중인 사내의 숨결이 이전보다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
일을 하는 중인데 전혀 상관없는 쪽에 온 신경과 감각이 쏠리다니. 스스로도 우스울 지경이었으나, 다행히도 유더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시선이 목 뒤에 고정된 느낌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이전이라면 공적인 상황에서 이런 걸 느끼게 했을 이가 아니다. 하지만 유더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시선은 그가 알아차렸다는 걸 짐작할 상황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은밀하지만 솔직한 변화. 큰 변화라 볼 수 없어도 유더에게는 그것이 몹시 기껍게 다가왔다.
유더가 슬쩍 뒤를 돌아볼지 말지 고민하던 사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타이누를 떠나기 전, 코엘트 남작이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했던 말이 있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무엇입니까.”
“코엘트 남작은 마법사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고어와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학자지. 그는 그간 학자의 관점에서 초대 타인 공작의 괴이한 연구 목적과 이후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역사를 자세히 훑었다더군.”
코엘트 남작은 처음 키시아르가 그를 보았던 때 느꼈던 바 그대로 성실하기 그지없는 이였다. 빌름 남작가가 오랫동안 폭리를 취하면서 내실이 엉망이 된 타이누를 거의 처음부터 다시 살피느라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도, 그 와중에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물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당시 서부와 제국 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온갖 자료를 뒤졌고, 마침내는 타인 공작가의 먼 방계 출신인 자신의 혈연까지 이용해 오래된 서부 귀족 집안들에 물려 내려오는 개인적인 사료들까지 찾았다.
그리하여 보게 된 당시 초대 타인 공작을 섬겼던 가신들이 남긴 몇 안 되는 기록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했다.
“초대 타인 공작은 자신의 연구에 대해 가까운 가신들에게조차도 비밀로 했던 모양이야. 가신들은 공작이 평소 마법이나 몬스터보다 다른 데 더 관심이 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뭔지 알겠나?”
“아뇨.”
“역사.”
나직한 목소리가 담담히 하나의 단어를 읊었다.
“초대 타인 공작은 대멸망 이전의 역사에 무척 관심이 컸다더군. 수많은 것들이 소실되어 지금은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그 깊은 관심은 주변에서 상당히 우려를 살 정도였던 모양이야.”
당시의 사람들은 살아남은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기 바빠 부스러질 대로 부스러진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과거를 돌아보는 이는 위험한 사상을 지닌 별종 취급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초대 타인 공작은 대멸망 이전의 과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코엘트 남작은 그가 ‘사라진 역사’에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가 초대 황제의 서거 이후와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밝혔다.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에 따르면 그가 한창 몬스터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던 때도 초대 황제께서 세상을 떠난 이후였지.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 연관점이 있을 거라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대멸망. 몬스터. 그리고 부서져 사라진 알 수 없는 역사들.
그 모든 것을 모아 코엘트 남작이 낸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어쩌면 초대 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유가 그것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더군.”
“…….”
“물론 그는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를 우리만큼 자세히 해석해 본 건 아니기에 모든 정보를 가지고서 결론지은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나는 그게 제법 타당성 있는 추측이라 생각했네. 이유는 간단해. 일지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나?”
유더는 빠르게 키시아르가 주었던 해석본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와 함께 유일하게 같은 의문을 품었던 ‘영혼의 아버지’. 그분께서는 과연 무엇을 얻으셨을까. 경전과 함께 길란드르 언덕을 떠난 그분은 지금 어디에……. 이 부분 말이네.”
“네. 기억납니다.”
“그 문장대로라면 초대 타인 공작의 아버지. 즉 초대 황제의 죽음 이후 대마법사 루마와 초대 타인 공작 오블릭 반 타인은 그 사건으로 인해 같은 의문을 품고 이전에 하지 않던 일들을 시작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지. 루마는 황제가 서거한 뒤 몇 년이 지나 제국을 아주 떠나 버렸고, 초대 타인 공작은 사라진 역사와 몬스터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네. 심지어 그 연구는 중간까지 루마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기도 했고 말이야.”
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그 뒤부터 시작된 다른 이들의 전과 다른 행동.
“초대 황제의 죽음이 그들에게 어떤 깊은 의문을 남겼고, 그로 인해 뭔가가 시작되었다는 건 분명해 보이네. 다만 그 원인이 코엘트 남작의 추측대로 ‘사망 원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가능성 중 하나로는 충분히 둘 만하지.”
오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계속해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며 키시아르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초대 황제의 사망 원인이라…….’
그가 아는 초대 황제의 사망 원인은 간결했다. 대멸망을 막고 나서 오르를 세운 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그저 그뿐이었다.
황제의 생전 업적이 너무나 찬란했기에 그의 죽음은 조명받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혼자 남아 오르를 훌륭하게 이끌어간 황후와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2대 황제에 즉위한 황태자의 이야기가 더 유명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초대 황제에 대해 생각하자 자연히 이논이 해 준 이야기가 뒤를 이어 함께 떠올랐다. 그는 키시아르가 보지 못한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일지에 숨겨진 ‘진짜’ 마지막 페이지를 본 이가 아니던가.
해당 부분의 번역이 아직 완벽히 끝나지 않은 데다 이후 일이 바빠지면서 키시아르에게는 그 이야기를 아직 제대로 알리지 못했었는데, 번역을 받지 못했다 해도 지금 그걸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저번에 제가 단장님의 해석본을 읽고 난 뒤 추후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유더는 뒤에 있을 나단 주커만을 떠올렸다. 그의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조금 망설여졌으나, 그보다 빠르게 키시아르가 속삭였다.
“필요하다면 마법으로 나 이외에는 듣지 못하게 잠시 막을 만들 수 있네.”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동의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아주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도 연관이 있으니 지금은 신중을 기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 차단은 저도 할 수 있으니 그러면 잠깐만 힘을 쓰겠습니다.”
바람의 힘이 훅 일며 고요하게 공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소드마스터에게 완전히 통할지까진 자신할 수 없어도, 저쪽에서 굳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터였다.
유더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논이 그 일지 뒤에 숨겨진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었습니다. 정확한 원문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몇몇 들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초대 황제 폐하가 어쩌면…… 저와 비슷한 경우였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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