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화
키시아르는 모든 건물을 본 뒤 한 곳을 지목했다.
“여기. 이곳이 들어맞을 확률이 크겠어.”
키시아르가 지목한 곳은 세 유적 중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이었다. 유더는 그가 가리킨 방향에 위치한 쓰러질 듯 위태로운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저도 그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나? 어떻게?”
키시아르가 흥미를 보였다. 혹시 유더가 이전 생의 기억으로 뭔가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유더가 세 번째 유적을 고른 이유는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는 뒤집어쓴 후드를 살짝 벗어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만 제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드러냈다.
은은한 금빛으로 변한 한쪽 눈을 본 두 사람의 표정이 알 듯 말 듯 미세하게 변했다.
“이 눈으로는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유적지에 들어설 때부터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까지는 별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세 번째에 도달했을 때 이전과 다른 게 미세하게 보이더군요.”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초대 타인 공작이 연구했던 몬스터의 사체와 부산물. 즉 그의 연구 자료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왜 자신의 연구 부산물들을 다 태워 없애지 않고 이 먼 곳에 보냈을까? 유더가 학자는 아니지만, 학자나 마법사란 이들이 제 연구와 관련된 자료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는 잘 알았다.
그렇다면 여기로 그것들을 보낸 이유로 추측되는 건 둘뿐이었다.
연구에 사용한 부산물과 자료의 상태가 너무 위험해 함부로 없앨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혹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관하려 보냈다는 것.
어느 쪽이든 단순 폐기를 위해서가 아닐 확률이 아주 높았다.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유더는 유더의 방식으로 그 흔적을 찾을 방법을 떠올렸다. 그게 바로 마력의 혜안이었다.
‘초대 타인 공작은 마법사지. 지하 감옥 4층에 연구실을 숨겨 두고 천 년이나 발견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다른 것이라고 못 숨길까.’
마력의 혜안은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환하게 밝히고,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력의 흐름을 민감하게 잡아낸다고 한다. 비록 유더가 그 눈을 아직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어 본 적이 거의 없는 탓에 마력의 흐름을 보는 효과 체감은 거의 없었지만, 이번은 그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유적지로 들어서기 직전부터 바람의 힘을 아주 미약하게 계속해서 사용했다. 힘을 쓰면 자연히 눈이 밝아지니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뭐라도 보이겠지 싶었던 사고의 발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 번째 유적지 부근에 가까워졌을 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부서져 늘어진 돌무더기 주변에 미세한 아지랑이가 감돌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리 이상하다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희미한 기운이었으나,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옷자락과 피부를 타고 비정상적인 바람의 흐름도 함께 느껴졌다.
그건 바람의 힘을 쓸 수 있는 유더가 아니라면 몰랐을 부분이었다.
“바람에도 물처럼 흐름이 존재합니다. 그 흐름이 흐트러지거나 서로 부딪치는 일이 없지는 않으나, 오늘처럼 바람이 강하지 않은 날씨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 곳의 유적 중 수상한 곳을 꼽아야 한다면 이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랬군. 몸에 이상은 없나?”
“멀쩡합니다.”
답을 듣고도 정말인지 아닌지 파악하려는 듯 유더를 잠시 응시하던 키시아르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다른 방법을 썼군. 나는 세 곳의 유적 폐허 중 내가 찾는 게 있는지 살폈거든. 그것이 존재하는 게 세 번째인 여기밖에 없더라고.”
“그게 뭡니까?”
“바로 이것.”
키시아르가 바로 곁에 굴러다니던 세 번째 유적의 돌무더기 하나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것의 표면에는 칼로 긁어낸 흔적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비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을 굴러다닌 탓인지 영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고대에서부터 건국 시대 즈음까지 자주 사용되었던 문장이네. 공동묘지를 뜻하지.”
‘……공동묘지라고?’
“많이 풍화되고 부서지긴 했지만 여덟 개의 빗살 무늬는 아직 확실하게 세어 볼 수 있을 만큼 남아 있어. 그러니 확실하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고대에 사용되었던 공동묘지 건물 양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옛 시대에 사용되었던 묘지들은 하나같이 땅을 깊이 파 지하 동굴을 만들고 돌로 벽을 쌓아 올린 게 특징이지. 땅 위에도 돌로 만든 입구와 작은 건물을 세워 두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시체를 안치하지 않았어. 그러니 몬스터의 사체나 부산물 같은 대량의 흔적을 처리하기엔 이런 곳이 적격이지 않겠나?”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키시아르는 근처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안내자 앤을 불러들여 질문을 했다.
“이 세 번째 유적이 혹시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 옛날이야기라도 좋은데.”
“으음…….”
고민하던 앤이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옆집 메리네 할머니가 그러셨는데요,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에 어떤 영주님이 이 앞 땅을 팠다가 해골이 엄청 많이 나와서 그냥 도로 묻은 적이 있었대요. 어른들은 여기가 묘지였을 거라고 그러셨는데, 잘 모르겠어요. 돌이 많아서 밭을 만들기 좋은 땅도 아니니까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같아요.”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했다. ‘내 말이 맞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더가 쓸데없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얼굴을 무심히 넘기는 사이, 나단 주커만이 앤에게 동전 한 닢을 주었다.
“우린 여길 좀 더 살피고 가야 할 것 같으니 먼저 돌아가라.”
“어어. 그래도 할아버지는 끝까지 안내해 드리라고 하셨는데…….”
“괜찮아. 돌아가서 우리가 먼저 가라고 했다고 전하면 돼.”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무뚝뚝한 목소리와 달리 아이를 몹시 잘 다룬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책임감이 있는지 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손님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일이라는 말에 뒤로 물러났다.
“밤까지 안 오시면 다시 올게요!”
아이가 떠난 뒤, 키시아르가 부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치하했다.
“잘했다, 나단.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살펴볼까.”
키시아르는 고대의 공동묘지가 어떤 방식으로 건축되는지, 입구는 어느 방향에 내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몇 번 유적 주변을 빙글빙글 돈 것만으로도 오랜 옛날 지어진 본래의 형태가 어땠을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 사내가 턱을 문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입구로 추정되는 곳 근처에 묻혀 있는 바위가 생각보다 많군. 그냥 내 힘으로 한 번에 모아 옛 형태대로 재현해 쌓아 두는 쪽이 길을 열어 내려가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어.”
“제가 땅의 힘으로 돕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대부분은 땅속이 아니라 바깥에 널려 있고, 이건 퍼즐과 다를 바 없으니 그냥 내 힘만으로 하는 게 나을 거야.”
그렇게 답한 뒤,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너무 큰 힘을 쓰는 것 같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나단.”
“……아직 염려의 말씀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만.”
“뻔하지.”
가볍게 코를 울려 웃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호흡을 한번 고른 뒤, 천천히 올라간 손끝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돌무더기들을 향했다.
“…….”
유더는 일순 주변의 공기가 전부 무거워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키시아르 한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의 흐름이 뻗어 나와 유적지 주변 전체로 동심원처럼 퍼져 나갔다. 보통 그가 각성자의 힘을 쓸 때는 여간해선 힘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가볍고 고요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은 대체 얼마나 큰 힘을 끌어내고 있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 순간.
쿠구구궁 하는 무거운 진동과 함께 그들의 주변에 널려 있던 돌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땅으로 잡아 끌어 내리려 하는 힘에 저항하듯이 떨쳐 일어난 돌들은 실로 압도적인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잠시 그 모든 것들을 죽 훑어본 키시아르가 손을 조금 더 위로 우아하게 올렸다. 그러자 이내 돌돌이 움직여 어느 한 곳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쿵.
바위와 돌이 매끄럽게 움직여 일정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땅에 돌이 닿을 때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땅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주춧돌이 될 만한 기반이 쌓이고, 그 위로 보다 작은 돌들이 올라간다. 마모된 곳이 많음에도 퍼즐처럼 척척 쌓여 올라간 돌들이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이 특정한 건물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단한 장관이었다.
시간이 흘러 움직여야 하는 돌의 숫자가 점차 적어질수록 키시아르의 힘은 더욱 능숙하게 발휘되었다. 처음에는 피부로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던 힘이 건물이 완성되기 직전에는 부드럽게 줄어들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대규모 대상에 힘을 발휘해 보는 게 아마 처음일 거란 걸 감안하면 정말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이렇게 크고 많은 돌을 단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첫 시도 만에 완벽하게 뜻대로 움직여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힘 조절 수련을 하느라 고생하는 단원들이 이걸 봤다면 울었겠군.’
거대한 힘. 순식간에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원하는 결과를 실시간으로 만들어 내는 머리.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완벽한 완급 조절.
수많은 경험이 쌓인 지금의 유더에게 같은 결과를 내어 보라면 물론 할 수 있겠지만, 과거의 유더가 첫 시도 만에 이 일을 똑같이 해야 했다면 아마 몇 번쯤은 힘이 넘쳐흘러 실수를 했을 터다.
그런 면에서 유더는 역시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괴물 같은 이인지를 새삼스레 느꼈다.
그렇다 해서 두렵거나 꺼려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과 대적하기에 충분할 힘의 흐름에 시선을 빼앗겼다.
무언가에 매혹당하는 기분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자. 이제 입구에 있었을 건물이 도로 생겨났으니 들어가 볼까? 입구는 저 안 어딘가에 있을 것 같군.”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투박한 형태의 건물 입구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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