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두 번째 목적지, 타이켄슈페일.
서부와 남부로 이어지는 중간에 위치한 보잘것없는 지역으로, 이전까지는 유더도 그 존재를 몰랐던 작은 마을이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오래된 유적지가 몇 곳 존재한다는 것뿐인데 말이 유적일 뿐 폐허나 다름없어 방치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키시아르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곳이 초대 타인 공작이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모두 모아 보낸 장소였다.
“학자가 아닌 이상 유적을 보겠다고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별일이구먼.”
세 사람에게 묵을 곳을 내어 준 나이 든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용병 세 사람이 건네준 은화 여러 개 덕분에 몹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편히 물어보시오. 내 손녀 녀석이 이 근방 지리를 잘 알거든. 안내든 뭐든 다 해 줄 거요.”
“그러죠.”
얼굴을 변용한 키시아르가 싱긋 웃자 노인이 곧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나갔다.
“자…… 그러면 이제 서신을 열어 볼까.”
노인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기를 기다려 키시아르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품 속에서 작게 접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이 마을에 들어오기 직전 마병단에서 날아든 서신이었다.
“네 개는 나에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보좌에게 왔군.”
유더는 키시아르가 건넨 작은 쪽지를 받아 폈다.
‘누가 내게 보냈나 했더니… 가케인이었군.’
마병단이 사용하는 암호로 적힌 서신의 필체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일반적인 글씨는 잘 써도 암호를 외워 사용하는 건 어색해했던 가케인의 노력이 빛나는 결과물이었다.
유더는 잠시 그것을 감상한 뒤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음…… 마병단 공문 발표 이후 5구역에서 자주 출몰했던 나한의 동료 추정 각성자들이 사라졌다가 7구역 쪽에서 다시 목격되었고, 현자가 머물던 숙소 근처에 현자 측 각성자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했던 바고. 힌과 핀이 감시하던 렌보우 자작이 용병 사무소와 빈번히 접촉하던 걸 끊었다…… 이것도 위 사항의 연장선이겠지.’
대부분은 예상한 내용이었다. 마병단에서 단원이 아닌 각성자들과 협업하기로 했다는 교묘한 공문 사이에 나그란의 별을 끼워 넣은 효과가 아주 신속하게 발휘되는 중이었다.
아마 지금쯤 현자와 나한, 양측 모두 서로를 의심하느라 머리가 터지는 중일 터였다.
‘나름대로 기대되는군.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와 진짜 협력한 이들이 누구인지 놈들이 과연 언제쯤 깨달을까.’
마병단이 공문에 협력 중이라고 쓴 ‘나그란의 별’은 현자 측도, 나한 측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나그란의 별에서 완전히 몸을 빼지 않은 채 각지에서 마병단을 돕고 있는 각성자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나그란의 별은 들어오고 나가는 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단체가 아니다. 수도에 있을 가일과 두일도, 서부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나한의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로벨과 마티도, 그리고 그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단원 모집에 응시를 원하는 이전 서부 거점의 각성자들도 모두 아직은 나그란의 별인 동시에 마병단의 협력자였다.
에르시와 그녀의 동료들, 그리고 호산라는 또 어떠한가. 에르시는 동료에게 약을 준 유더를 위해 자의로 쓸모 있는 정보를 내주었고, 호산라는 나한을 향한 충성심을 유지하는 와중에도 칸나가 내준 인간적인 호의 앞에서까지 냉정하게 굴지는 못했다.
현자와 나한, 양측 중 누구 하나라도 그 각성자들의 존재를 좀 더 의미 있게 생각했더라면, 혹은 누구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했다면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유더와 키시아르가 예측한 대로 움직였다.
현자는 마병단에 붙잡힌 동료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여태까지 줄곧 방치해 왔다. 유더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놈의 동료애 수준은 간도 크게 마병단 입구까지 왔다 간 적이 있는 나한보다도 못한 놈이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붙잡힌 이들이 마병단을 도왔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나한을 더 큰 적으로 여기고 나머지는 별것 아닌 이들로 여겼기에 이 작은 술수 하나에 그대로 말려든 것이다.
‘현자가 나한을 내심 경계해 왔으리란 증거이기도 하지.’
유더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도 일을 잘 해내고 있는 정보부원들의 모습에 흐뭇함을 느꼈다. 오기 직전까지 열심히 굴리며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끝에 이상한 소식도 하나 끼어 있긴 하군. 키올레가 찾아와서 헛소리를 했다고?’
가케인이 적은 해당 부분은 정확히 다음과 같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냥 적어 보낼게. 키올레 다 디아카가 며칠 전 갑자기 찾아와 시비를 거는 일이 있었어. 너를 찾기에 우리가 만났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더라. 결국 칸나가 능력을 사용해 정보를 파악한 결과, 아무래도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은 너와 연락할 방법을 알려 달라는 거였던 듯해. 아무튼 답을 주는 대로 대응하도록 할게.’
연락처라. 굳이 찾아오기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키올레의 진짜 목적은 현자 측이나 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정보를 어디선가 주워듣고 전달하려던 게 분명해 보였다.
‘어차피 이번 일과 관련된 소식일 확률이 99%일 테니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 녀석도 가끔 하나 정도는 쓸모있는 소식을 물고 오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나.’
키올레가 여기 있었다면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유더는 답신에 키올레 다 디아카가 무슨 짓을 할까 걱정할 필요 따윈 전혀 없다는 말을 간략히 적기로 마음먹었다. 키올레가 자신 쪽으로 편지를 보내고 그걸 칸나의 손을 거쳐 도로 제게 전해 달라는 말까지 해 두면 알아서들 대응해 줄 터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훈련 과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하고 있다는 말을 주커만 경에게 꼭 전해 주기를 바란다’는 추신으로 가케인의 서신은 끝이 났다. 고개를 들자 유더보다 먼저 네 개의 서신을 다 읽고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소식이라도 있었나?”
“정보부에서 날아온 보고라 그리 재미있는 건 없었습니다. 아직까진 특이사항 없이 잘 흘러가는 것 같더군요.”
“내가 받은 각 지부에서의 보고 내용도 그러하더군.”
“아, 가케인이 주커만 경에게 훈련 과제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나단 주커만이 냉막했던 눈썹을 슬쩍 움직였다.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혹여나 가르쳐 주는 걸 그만둘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러는 것일 테니 그럴 때는 그냥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단.”
키시아르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 나단 주커만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잘했다고 말하면 오히려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 같더군요. 뭔가를 전해야 한다면 차라리 다음 훈련 과제를 알려 드리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유더는 조금 놀랐다. 나단 주커만이 가케인의 근성을 제법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깊이 파악 중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하긴. 키시아르에게서 배워 소드 마스터까지 되었으니 누군가를 가르칠 때 대충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르친다는 건 곧 서로를 파악하는 일이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는 결코 뭔가를 가르칠 수 없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제대로 자신을 파악하려 하는 스승이 있다면, 가케인도 한결 편하게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을 터다. 유더는 가케인의 동료이자 친구의 입장에서 상당한 흡족함을 느꼈다.
결국 가케인에게 보내는 답신에는 유더의 본래 목적보다 나단 주커만이 전한 다음 훈련 과제 목록이 더욱 길게 들어가게 되었다. 유더는 거기에 더해 두 가지 훈련을 한 번에 소화하는 가케인을 위한 특별 훈련 메뉴까지 추가했다.
멀리 있을 가케인이 알았더라면 감동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을 법한 일이었다.
키시아르는 모든 답신을 날려 보낸 뒤,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초대 타인 공작이 자료를 묻어 두었다고 알려진 유적지의 이름은 알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라. 그러니 안내자가 필요하겠지.”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묵게 된 집주인인 노인의 손녀가 있었다. 이름을 ‘앤’이라고 밝힌 그녀는 흔쾌한 얼굴로 주변 유적들을 안내해 주겠다고 수락했다.
“손님들이 뭘 물어보면 할아버지께서 잘 대답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사실 볼 것도 없는 곳들을 왜 가시는지 좀 궁금하긴 하지만…… 용병이라고 하셨으니까 묻지 않을게요.”
안내를 받아 돌아본 마을 주변에는 총 세 곳의 유적이 존재했다. 하나같이 천 년 전의 고대 시절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잔해였으나 본래의 역할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키시아르는 모든 건물을 본 뒤 한 곳을 지목했다.
“여기. 이곳이 들어맞을 확률이 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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