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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34화 (634/805)
  • 634화

    “우린 마침 마병단원 2차 모집을 위하여 전국을 돌고 있지. 우리의 목표가 앞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혹 거기에 지원해 보지 않겠나?”

    키시아르가 말하지 않았다면 유더가 먼저 하려 했던 권유였다. 마린을 전력으로 들이는 건 미래의 마병단에게도 오히려 좋은 일이라 판단했기에 추후 따로 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키시아르는 마린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던 유더의 반응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판단과 잠재력 평가를 모두 마친 게 분명했다.

    ‘모든 걸 밝히고 나니 이런 점이 편하긴 하군.’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시선이 마주친 키시아르가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이쪽이 이걸 원했다는 걸 알고서 저지른 이의 표정이었다.

    유더의 눈가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마병단에 지원이라……. 글쎄요.”

    마병단 입단 제안을 듣자마자 어이없어하거나 화를 내고 볼 줄 알았던 마린은 의외로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람을 가라앉힌 뒤 급속도로 침착함을 되찾고서 제안을 한 키시아르의 얼굴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병단이 이번에…… 서부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건 저도 들었어요. 이런 시골에서도 그 일들은 엄청난 화제였었죠.”

    “그랬나?”

    “하지만 거긴 혼자서 집채만 한 몬스터를 때려잡는 그런 대단한 실력자들만 모인 곳 아닌가요? 목표가 같다고 마병단에 지원해 봤자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애초에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고요.”

    마린은 그 ‘혼자서 집채만 한 몬스터를 때려잡는 대단한 실력자’가 여기에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더는 침묵을 지켰으나 키시아르는 경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시는 거죠?”

    “아니. 다행히도 마병단 입단에 아주 뜻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저 뜻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안을 한 건 당연히 아니라네. 마병단에 걸맞은 인재라 판단했기에 한 일이지.”

    “……제가요?”

    마린이 반문했다. 키시아르가 그녀에게 보이는 확신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제가 솔직히 싸움을 못 하진 않아요. 가끔 옆 마을 용병들을 도와주러 갈 정돈 되니까요. 하지만 각성 능력으로 따지면…… 고작 풀 쪼가리나 틔우는 이런 힘을 어디에 쓸 수 있겠어요? 이런 힘으론 조그만 몬스터 한 마리 못 잡는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아니라고 하시려는 건가요? 제 능력을 보신 적도 없으면서?”

    키시아르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본 적이 없다고 모르는 건 아니지. 내 판단력이 잘 믿기지 않는다면 때마침 서부에서 몬스터를 혼자 때려잡은 그 사람이 여기 있으니 스스로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 직접 말을 나누어 보는 건 어떻겠나?”

    “네?”

    “각성자의 잠재력을 보는 눈은 솔직히 말해 단장인 나보다도 더 뛰어나고, 가르치는 능력 또한 대단한 이거든.”

    엄청난 말로 유더의 얼굴에 사정없이 금칠을 한 키시아르가 활짝 웃으며 손을 펼쳤다.

    “소개하겠네. 내 보좌, 유더 아일 경. 이번에 거대한 몬스터를 단신으로 해치워 남작 작위를 수여받은, 마병단의 제일가는 실력자라네.”

    마린의 눈이 키시아르가 본모습을 드러냈던 때와는 다른 느낌의 놀라움을 담고서 가늘게 변했다.

    ‘……저 사람이?’

    화사한 미남의 곁에 여태 조용히 앉아 있던 창백하고도 음울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전혀 소문 속의 그 대단한 각성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람이 혼자서 거대한 몬스터를 잡으려면 얼마나 덩치와 힘이 좋아야 할지 추측하며 떠들어대곤 했었는데, 유더 아일은 그런 막연한 상상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키는 컸으나 터질 듯한 근육을 지닌 이는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선 강자의 거만함이 아닌 새벽의 차가움 같은 고요함만이 느껴졌다. 진짜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는 할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평민 출신으로 작위까지 수여받아 일약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린 바로 그 사람이라니.

    ‘그렇지만 내 능력을 보지도 않고서 알아본 것도 바로 저 사람이긴 했지. 대체 무슨 힘을 가진 사람인 거지?’

    의문과 경계가 뒤섞인 시선을 받은 유더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 깊게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우습게 보는 건 아마 스스로밖에 없을 테니까요.”

    뭐라고? 마린이 귀를 의심하는 사이,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병단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는 거라면 몰라도, 능력 부족이라 생각해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마병단이 아니라 다른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방금 했던 말 못 들었어요? 고작 풀잎이나 틔우는 능력이라니까요.”

    “풀도 풀 나름이겠죠.”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느린 말투가, 오히려 그렇기에 귀에 선명히 들어와 박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엔 많은 식물들이 존재합니다. 칼로도 자르기 힘들 만큼 질기고 억센 풀도, 조금만 스쳐도 독이 올라 죽을 수도 있는 풀도 존재합니다. 식물이란 존재가 결코 연약하지 않다는 걸 저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당신의 동생 아니었습니까?”

    “…….”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마린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자라게 한 적이 없는데.”

    “해 본 적이 없는 것과 못 하는 건 다릅니다.”

    새카만 어둠을 담은 눈동자가 마린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당신의 능력은 식물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마침 그런 걸 아주 잘 알았던 동생이 있죠. 능력을 발전시키기에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장담하는데, 당신이 마병단에 들어와 1년을 버텨 낸다면 지금 마병단에 있는 대부분의 단원들과 대련해도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말을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쓸모하다고만 여겼던 능력이었다. 각성 시기가 동생이 죽은 직후였던 탓도 있었기에 마린은 마을 사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숨기고 싶을 만큼 재수 없는 능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정말 저 말대로 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냥 날 끌어들이려고 하는 빈말이 아니고?”

    “이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 마린에게 이 기회는 대단한 일이지만 그에게 마린은 조금도 대단치 않은, 굳이 욕심을 낼 이유가 없는 평범한 각성자 중 하나일 테니까.

    그렇지만 마린은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믿기 어렵지만 정말로 그랬다.

    오랫동안 여러 손님들을 안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눈치가 비상해진 마린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알겠어요.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지금 당장 결정하기에는 너무 빠른 것 같네요.”

    “우리도 지금 당장 바로 결정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네.”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는 마린에게 충분히 생각해 보아도 좋다고 말한 뒤, 자신의 서명이 담긴 쪽지까지 즉석에서 작성하여 건네주었다. 마병단원이라면 누구든 그걸 보는 즉시 키시아르의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생각이 정해진다면 이걸 가지고 타이누에 있는 마병단 서부 지부로 가게. 지부장 에문 필랑에게 보여 주면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까.”

    “…….”

    “단원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고 그저 작은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경우라도 좋네. 혹은 ‘작은 키치’에 대해 뭔가 다른 정보가 생각났더라도 마찬가지야. 무엇이든 마병단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 테니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군.”

    마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았다.

    유더는 받아든 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가져온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아, 이건…….”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도움을 준 물건입니다. 아마 마이키의 물건이라 생각되는군요.”

    유더가 건넨 피 묻은 버섯 자루를 본 마린이 눈을 꽉 감았다. 오래되어 변색된 피가 묻어 있는 것 말고는 그저 낡고 평범해 보이는 자루지만, 가족의 눈에는 누구의 물건인지 보이는 법이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맞아요…… 마이키의 물건이에요. 제가 도착했을 땐 보이지 않아서 산 어딘가에 버려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어디 있었던 거죠?”

    “약초꾼들의 쉼터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동생의 마지막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마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처럼 모든 걸 포기한 듯 분노하기보다는 자루를 꽉 움켜쥔 채로 치솟은 감정들을 모두 참아 냈다.

    아마도 그 모습이 여기서 살았던 그녀의 본래 모습일 터다. 유더는 그렇게 느꼈다.

    “……이 자루는 황태자가 저지른 일의 증거가 될 수 있어 저희가 가져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보여 드리는 쪽이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가져가지 않는다고 했다면 제가 가져가라고 줬겠죠.”

    마린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더에게 도로 버섯 자루를 건넸다.

    “……언제가 되었든 알려 준 곳으로 찾아가 볼게요. 일단 이곳에서 정리하고 마무리할 일도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안 되겠지만요.”

    유더는 키시아르, 나단 주커만과 함께 마린의 집을 떠났다. 마린은 그들에게 작은 키치가 살았던 집 위치를 알려 주었으나 그곳은 이미 오래전 부서져 아무것도 없는 폐가가 된 뒤였다.

    그들은 왔을 때처럼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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