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난 카치안이 어느 귀족가의 양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에게 다시는 연락할 리 없다 여겼죠. 하지만 그 녀석이 만약 마이키에게 그때처럼 정제한 두둘렘 버섯을 구하고 싶다고 연락했다면…… 마이키 녀석은 분명 그걸 들어주려고 했을 거예요.”
마린의 이야기 속에서 거짓의 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생의 기억을 토대로 생각해 보아도 그랬다. 과거에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행적과 의문으로 남았던 부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드디어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이전 생의 마린은 동생을 잃은 뒤 마을을 떠나 용병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카치안 황제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테고.’
어쩌면 외유를 나갔던 카치안 황제를 암살하러 왔던 때까지는 그의 정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황족이나 귀족의 이름을 아는 백성보다는 그렇지 못한 백성이 당연하게도 더 많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있어 황제 폐하는 그저 황제 폐하일 뿐이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다 죽을 상대의 이름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당시 유더의 눈에 비쳤던 가시덤불의 마린은 실력에 비해 황제 암살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는 듯 보였다. 다시 나타났을 때부터 보여 주었던 황제에 대한 증오와 끈질김을 생각해 보면 그때의 빠른 포기는 다소 의문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때 마린이 처음 카치안을 알아본 거라면 혼란 속에서 물러난 것도 납득되었다.
그 이후로는 동생을 누가 죽였는지 확신하여 비로소 복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리라. 비록 그 끝은 처절한 파멸이었으나, 이번 생은 어떨까.
‘적어도 저번 생처럼은 되지 않도록 해야겠지.’
유더는 이번의 그녀가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단순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마음은 아니었다.
이전 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된 입장에서, 저와 같은 기회를 그녀에게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동생 쪽이 아깝군. 누나도 그렇지만 그쪽도 더 일찍 발견했다면 좋은 인재로 쓸 수 있었을 텐데.’
카치안은 이전 생에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두둘렘 버섯을 이용한 독과 다른 독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암살을 태연히 해치웠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만큼 효과가 미약한 독을 1차로 사용하고 그 뒤에 강력한 2차 독을 스스로 음용하게 만드는 교묘함은 그를 수많은 심증과 의혹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많은 귀족들은 언젠가 그 독에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그런 독살 방식을 생각해 낸 황제가 마냥 젊은 애송이가 아니라 무섭고도 냉혹한 야망가임을 인정했다. 한마디로 그 독은 과거의 카치안 황제가 정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새로이 다잡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하찮게만 보았던 쓸모없는 버섯의 새로운 정제법.
독과 식물에 정통한 이가 아니라면 생각해 내기 어려울 두 가지 독의 조합 활용법.
그 모든 것을 사실 마린의 동생 쪽이 알아낸 거라면 그는 정말 대단한 인재라 불릴 만했다. 이런 시골에서 약초꾼이나 할 자가 아니었다.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 당장 주워다 이논에게 보냈을 것이다.
‘모두가 카치안 황제의 지식이라 믿었던 게 사실은 이런 거였나.’
제가 발견했던 피 묻은 두둘렘 버섯 자루를 재차 떠올리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솔직히, 말하면서도 당신들이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어요. 하지만 반응을 보니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닌 모양이네요.”
카치안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도 놀라지 않는 세 사람을 향해 마린이 중얼거렸다.
“내 동생을 죽인 놈. 진짜 그 아이가 맞아요?”
“그래.”
키시아르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마린의 눈동자 속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마이키가 만났다던 상인이란 놈을 그 애가 보낸 거겠죠?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어요? 당신들은 카치안의 뒤를 쫓고 있는 건가요? 왜? 어디서 온 사람들이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일단 하나하나 답하도록 하지. 그 전에, 이 답을 듣고 나면 당신의 목숨 또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건 먼저 말해 두고 싶어. 그럴 일이 없도록 우리 쪽에서 당신을 보호하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이제 와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요? 빨리 말하라고!”
마린이 탁자를 두들겼다. 컵이 쓰러져 바닥으로 나뒹굴었으나 키시아르는 그저 침착했다. 그는 마린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임에도 분노와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혀 씨근거리던 마린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린이 완전히 침착해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카치안 라 오르. 그게 지금의 그가 지닌 이름이다.”
“카치안…… 라 오르? 라 오르라면……. 설마 황족?”
“그래. 정확히는 현 오르 제국의 황태자 전하지.”
“황……태자라고요? 그 작은 키치, 아니. 카치안이?”
“몇 년 전,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를 양자로 들이기 위하여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뛰어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한 일이 있었지. 알고 있나?”
말도 안 된다는 듯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앉아 있던 마린이 그제야 무언가 떠올린 듯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런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요. 호수를 보러 왔던 사람들이 이야기했었어요. 무슨 가문 출신의 누가 이길지 내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키치였단 거예요?”
“나이도 맞고 인상착의도 같아. 5년 전 여름에 카치안이 이 마을을 떠났다고 했었지. 황태자 시험이 치러진 건 그로부터 1년 뒤쯤의 일이었어. 그는 동부에서 가장 큰 세력인 디아카 공작가를 대표하여 나왔는데, 친어머니는 현 디아카 공작의 사촌 동생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알려져 있지.”
그리고 그 사람은 카치안이 모든 시험에서 이기고 황제의 양자가 될 것이 확실시된 순간 공교롭게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친아버지는 처음 사교계에 디아카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나섰을 때부터 이미 없었다고 했다.
부모가 없어도 디아카 공작의 피가 이어져 있다는 혈통은 확실하고, 외모의 특징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으니 그의 양자 입적에는 문제가 없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아마도 카치안의 부모를 디아카 공작 측에서 적당히 치워 버렸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겠지만…… 뭐, 누가 그 이상으로 관심을 두었겠어.’
누구도 카치안 라 오르의 배경에 그 이상의 뭔가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을 터다. 지금까지도 그러했으므로.
키시아르는 그 이상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린이 알고 있던 ‘동부에 친어머니가 있던 카치안’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카치안 황태자는 몇 달 전, 수확철 축제를 마무리하며 열린 파티에서 타 귀족가의 사람을 독살했어. 두둘렘 버섯을 이용한 독과 다른 독을 이용한 방식으로 말이야.”
“두둘렘 버섯을… 그럴 수가……. 수확철 때라면 마이키가 죽은…….”
“그래. 모든 정황이 참으로 잘 들어맞고 있지.”
마린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한참 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독살한 게 밝혀져서…… 그다음은요.”
“아무런 처벌도 없었지.”
“뭐라구요? 죗값을 치르지 않았단 건가요?”
“공식적으로는 죄를 지은 게 황태자가 아니거든.”
키시아르의 입술 끝에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죄는 황태자를 대신하여 버섯을 구하러 갔던 시종이 대신 졌고, 사건은 종결되었어. 하지만 우리는 황태자가 왜 하필 잘 알려지지도 않은 버섯을 그와 연관도 없는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가져와야 했는지 궁금했지. 그게 여기까지 온 이유야.”
“…그렇다면 당신들은. 당신들도 설마 귀족인가요? 키치… 황태자와 적대하는?”
여기서 답을 해 주기 위해 키시아르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건 자칫 그가 위험해지는 길일 수도 있었다. 유더는 잠시 그 대신에 자신이 나서야 하나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마린을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는 진실을 갈구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상대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여태까지 얼굴을 변용시켜 주고 있던 팔찌를 돌려 마법을 해제했다.
얼굴과 머리카락, 눈동자 위로 흐릿하게 덮여 있던 마력이 씻은 듯 사라지며 본래의 금빛 머리칼과 붉은 눈, 그리고 얼굴이 모두 드러났다.
그는 눈을 크게 뜬 마린을 향하여 제대로 된 소개를 했다.
“황제 폐하의 직속, 마병단을 이끄는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 그게 나의 이름이지. 소개가 늦어 미안하게 되었네.”
여태까지 평범한 용병처럼 편히 이야기하던 말투가 싹 바뀌며 본래 지니고 있던 우아함이 제 자리를 되찾았다.
카치안의 이름을 마린에게서 들었던 순간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전율이 유더의 심장을 타고 손끝과 발끝까지 쭉 흘렀다.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마린의 입에서 숨이 막힌 듯한 소리가 났다.
“마병단이라면…… 각성자로만 만들었다던 그……?”
“그래. 알고 있군.”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우린 마침 마병단원 2차 모집을 위하여 전국을 돌고 있지. 우리의 목표가 앞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혹 거기에 지원해 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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