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마을에선 그 애를 ‘작은 키치’라고 불렀어요. 또래보다 훨씬 작고 약한 아이였거든요. 잔병치레가 잦다 보니 성격이 예민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마이키와는 곧잘 놀았죠.”
마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래전 이 마을에 살았다는 ‘작은 키치’는 멀리서 일하던 마을 주민이 데리고 돌아온 아이였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없었고 아버지만 있었지만 마을에서는 크게 드문 경우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부분을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마린의 기억에 남은 ‘작은 키치’는 제 동생을 데리고 대장처럼 부려 먹으며 산을 쏘다니던 옆집 아이였다. 동생 쪽이 덩치도 키도 훨씬 큰데 자존심도 안 상하나 싶었으나 성격 좋은 마이키는 이래도 헤, 저래도 헤 웃으며 친구와 곧잘 놀았다.
그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던 ‘작은 키치’도 마이키에게만큼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고는 했다.
‘누나. 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이려면 누빌 풀 말고 쿠발 풀을 쓰는 게 맞지?’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염색용 풀은 독하니까 꼬맹이는 손대면 안 돼.’
‘응… 나는 염색 안 해. 그런데 키치가 염색약보다 싸게 염색할 수 있는 풀이 있다고 하니까 궁금해해서…….’
‘옆집 걔? 그 애는 원래부터 검은 머리 아니었나?’
‘앗…….’
동생이 깜짝 놀라 눈치를 보았다. 마린은 동생을 슬슬 쥐어짜 사실 옆집 아이의 검은 머리가 매달 부지런히 염색한 결과물임을 듣게 되었다. 동네 사람 중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내가 말한 거 다른 사람들한텐 얘기하면 안 돼, 누나. 들키면 키치가 화내.’
‘웃기네. 그까짓 되바라진 꼬맹이 하나 화내는 게 뭐가 무섭다고?’
‘아. 누나…….’
남동생이 쩔쩔매는 모습이 제법 우스워서, 마린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그냥 비밀로 해 주기로 했다.
‘알았으니까 약초들 가지고 장난이나 그만 쳐. 옆집 놈한테 쓸데없는 것 좀 그만 알려 주고. 저번에 너희가 두둘렘 버섯을 가지고 장난친 것 때문에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지? 한 번만 더 그러면 둘 다 내 손에 죽어.’
‘하지만……. 아니야. 알았어. 조용히 있을게.’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몇 번인가 반복되며 마린은 옆집 아이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더 알게 되었다.
작은 키치는 사실 본래 금색 머리칼을 지녔으며, 어머니도 아직 살아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너무 바쁜 바람에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겼다는 모양이었다.
마이키는 누나가 비밀을 잘 지켜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끔씩 스스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들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마린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쓸데없고 허황된 말들 뿐이었다.
‘키치 말이야. 다 크면 동부에 있는 어머니가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랬대. 대단하지?’
‘퍽도 대단하겠다.’
‘이름도 원래는 작은 키치가 아니야. 그거는 아버지가 붙여 준 애칭이래. 키치는 사실 그 이름 싫다고 그랬어. 어머니가 준 이름이 좋대.’
‘하긴. 사람 이름이 작은 키치인 건 좀 그렇지? 작은 새라는 뜻이잖아. 그래서, 그 대단한 꼬맹이 원래 이름은 뭔데.’
‘카치안.’
‘흠.’
어린 시절부터 눈치가 빨라 관광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안내 일을 곧잘 해 온 마린은 또래보다 아는 것도 제법 많았다.
이 허황된 말들이 전부 다 허세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나오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옆집의 되바라진 꼬맹이는 아마도 귀하신 피가 섞인 몸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귀한 피가 섞였다고 해서 모두가 귀한 몸은 아니었다.
진짜로 귀한 몸이라면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산골까지 와 혼자서 힘들게 아들을 키우려 노력할 리 없다. 매달 염색을 시키는 건 아이의 핏줄을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일 터였다. 진짜 고귀한 귀족들은 머리 색이나 눈 색에서 혈통이 드러난다는데, 작은 키치의 눈은 밝은 곳에서 보면 붉은색으로도 보이곤 하는 검은색이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튀었다.
아이는 진심으로 어머니가 언젠가 자신을 데려와 이 가난한 마을에서 해방해 주리라 기대하는 것 같지만……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지금은 그 생각을 믿고 사니 자기가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거겠지. 내버려 두자. 나중에 철이 들면 제 목숨 귀한 걸 알아서 입 다물고 살겠지.’
마린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낯선 귀족들이 여름을 보낸다며 마을에 찾아왔던 때였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남달랐죠. 안내하는 내내 다른 데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 대해 자주 물었어요. 특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죠.”
그들은 아직 어렸던 마린이 어른보다 다루기 편하다고 판단한 듯 여러 가지 질문을 해 댔다. 마린은 그들의 의도를 일찌감치 깨닫고 돈을 쥐어 줄 때마다 모든 걸 금세 잊어버리는 멍청이 행세를 했다. 은화 몇 개를 받고서 감격한 척을 하며 굽실거리면 귀족들은 금세 마음을 놓았다.
‘궁금한 게 있구나. 혹 이 마을 근처에 금발을 지닌 꼬마는 없니?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더라도 좋다.’
그들이 은근슬쩍 던진 질문들을 토대로, 마린은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금세 조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은 금발의 소년을 찾고 있었다. 사정을 자세히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나 어린 소년을 데려다 장난감처럼 쓰다 버리려는 목적은 결코 아니었다.
마린은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 흘려들으면서 몇 가지 중요해 보이는 단어를 잡아챘다. 아주 고귀하신 분께서 오래전 잃어버린 어린 소년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란 사실. 찾고 나면 그 아이를 데려가 양자 입적을 추진할 예정이라는 계획. 그 아이는 분명 금발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추측과 확신…….
귀족. 금발. 잃어버린 아이. 양자 입적.
그때서야 마린은 오래전 동생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재차 떠올렸다. 설마 싶지만, 그들이 찾는 게 작은 키치라면…… 그 아이가 바라던 기적이 정말로 일어난 것과 다름없었다.
마린은 그 사실을 키치에게 알려 주어야 할지 제법 오랫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 아님을 깨닫고 동생 마이키에게 우연처럼 슬쩍 말을 흘렸다.
마이키가 말을 제대로 옮겨 준다면 작은 키치는 마을에 온 귀족들이 찾는 게 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본래는 여름이 끝날 때까지 마을에서 머물 예정이라던 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서 돌아갔다. 갑작스레 일정이 변경되었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그들의 뒤에는 새로운 심부름꾼으로 고용된 작은 키치가 함께 서 있었다. 귀족들은 그 아이의 외모와 몸가짐을 높이 샀다며, 일꾼 교육을 위해 사는 곳으로 데려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키치가 성질머리와 달리 얼굴이 예쁜 건 사실이었기에 모두 그 말을 납득했다. 아직 어린데도 벌써 좋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잘되었다는 말들도 들려왔다.
그러나 마린은 키치가 그곳에 서기까지의 며칠 동안 옆집에서 소리 죽여 들려오던 싸움을 떠올렸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토록 귀하게 키우던 아들이 귀족들을 따라 떠나는 오늘, 배웅을 위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소년의 표정은 섭섭한 기색 하나 없이 다부졌다. 붉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당당하게 어깨를 편 소년은 그에게 줄 꽃을 꺾어 뒤늦게 달려오던 마이키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렸다.
‘키치! 키치! 기다려!’
‘…….’
‘키치!’
그토록 오랫동안 여기서 지냈으면서도 떠날 때는 이런 곳 따위에 조금도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구는 모습이, 정말이지 차갑고 지독한 놈이었다.
그렇게 키치는 마을을 떠났다. 키치의 아버지는 홀로 지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매일 술에 절어 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아들을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다. 마린 또한 그렇게 여겼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곧 작은 키치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잊었다.
부모님이 병으로 연달아 세상을 떠나며 동생과 둘이서만 삶을 꾸려 나가게 된 마린도 그들을 기억에서 굳이 끄집어내지 않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
마린이 짤막한 이야기를 모두 끝낸 뒤, 작은 집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흘렀다. 마린은 여전히 손을 얼굴에 묻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이키는 별것 아닌 풀이나 버섯의 효능을 파악하는 걸 좋아했죠. 키치…… 카치안은 그걸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걸 더 좋아했어요. 두 녀석들이 어렸을 때 두둘렘 버섯을 빻아 만든 가루를 마을 공용 식수통에 타서 장난을 친 적이 있었는데, 하마터면 나이 든 할아버지 한 분이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했죠. 정말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어요.”
본디 그 정도 효과를 발휘하는 버섯은 아니었으나, 마이키가 본래의 버섯 활용법에서 나아가 조금 더 발전된 방식의 정제법을 찾아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 일로 그가 마을 약초꾼들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약초꾼 생활을 하게 되기도 했기에 마린은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카치안이 어느 귀족가의 양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에게 다시는 연락할 리 없다 여겼죠. 하지만 그 녀석이 만약 마이키에게 그때처럼 정제한 두둘렘 버섯을 구하고 싶다고 연락했다면…… 마이키 녀석은 분명 그걸 들어주려고 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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