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죽은 약초꾼. 그리고 우리가 찾아낸 피 묻은 버섯 자루…….’
느낌이 왔다. 드디어 저 버섯 자루의 주인을 찾았다는 강렬한 느낌이.
“주커만 경. 하나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제가 아는 정보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혹 죽었다던 약초꾼이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유더의 질문을 들은 나단 주커만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답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질문에 숨겨진 함의를 알아차린 이의 반응이었다.
“뭔가…… 짐작하시는 바가 있으신 것 같군요.”
“있기는 하지만 일단 답을 먼저 듣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장소가 제가 머물렀던 오두막 근처입니까?”
유더는 기사의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나단 주커만이 천천히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맞습니다. 죽은 약초꾼이 발견된 곳은 바로 두 분께서 머물렀던 약초꾼들의 쉼터 바로 앞입니다.”
역시.
등줄기를 타고 제 생각이 맞아 들어갈 때 느끼는 날카로운 전율이 가볍게 일었다.
“이후 마을 약초꾼들은 여간해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것 같더군요. 마을 내에서는 그쪽 방향으로 아이들이 놀러 가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우리가 머무는 동안 누구도 근처에 오지 않기에 나단 네가 신비한 수단을 사용하여 막아 주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그런 건 아니었군.”
키시아르가 농을 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입술과 달리 웃음기 없는 눈은 유더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또한 유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약초꾼의 쉼터가 존재했다는 건 그런 곳이 필요할 만큼 활동하는 약초꾼이 제법 많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더가 발정기를 보내는 동안 누군가 그들을 방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부에 쏟을 정신이 없었던 데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유더는 그 위화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으나 키시아르는 달랐을 터였다.
‘오두막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던 데에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피 묻은 자루를 발견했던 때와 비슷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카치안 황태자가 영원히 묻어 버리려 했겠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가 여기에도 있었다.
“그러면 이제 말씀해 주시죠. 죽은 약초꾼이 발견된 장소가 중요한 이유가 뭔지 말입니다.”
유더는 짐을 뒤져 피 묻은 자루를 꺼내 나단 주커만에게 보여 주었다.
“제가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잡동사니 사이에서 찾아낸 물건입니다.”
그는 자루의 겉과 두둘렘 버섯이 든 내부를 한번 살펴보자마자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유더처럼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건…….”
“이걸 두고 간 이가 죽은 약초꾼이 아닐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유더는 죽은 약초꾼이 바로 피 묻은 자루의 주인이 맞으리라 확신했다. 그 약초꾼이 만났다는 낯선 상인이 황태자가 보낸 시종일 가능성이 높으니, 약초꾼의 가족을 만나서 물어볼 것들은 이제 다 정해진 셈이었다.
“자, 이제 그 가족이란 이가 부디 우리의 의문을 채워 줄 만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를 바라야겠군.”
키시아르가 서늘한 미소를 띤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
“마린! 이제 돌아온 게냐?”
마을에 막 들어서던 이가 어느 노인의 부름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깊이 눌러 쓴 모자 사이로 삭막하고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쯧쯧. 어째 내려가기 전보다 더 마른 것 같구먼.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에 가서 같이 먹는 건 어떠냐. 씰과 레이미도 너라면 좋다고 할 텐데.”
안타까운 동정심을 가득 담은 노인의 표정을 보며 마린이라 불린 이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어 거절의 뜻을 표했다.
“아뇨.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이제 막 돌아와서 피로하니 집으로 바로 가 볼 생각이에요.”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아, 그런데 너희 집 앞에 지금 손님들이 와 있단다.”
“손님이요? 제겐 올 손님이 없는데.”
“용병 여행자야. 말린 퍼디 풀을 구하고 싶다고 하던데, 너희 집에 여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을 전해 줬지. 그…… 네 동생 마이키가 세상을 뜨기 전에 채취해 둔 것들이 제법 많았잖니. 갑자기 떠난 덕분에 아직 처분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
죽은 동생의 이름이 나온 순간 마린의 눈에 깊은 고통이 차올랐다.
그녀는 노인의 다음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동생이 생전에 채취해 두었던 약초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됐든…… 진짜로 기다리고 있다면 바로 거절해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린은 자신의 낡은 집 앞에 서 있는 장신의 그림자 셋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검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딱 보아도 용병 같았다. 노인이 말했던 용병은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일행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 사람 중 둘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인상들이었지만 마린은 그것을 딱히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동생이 죽은 후로 그녀는 더 이상 남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검은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을 지닌 남자 한 명이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의외의 뭔가를 발견한 듯 응시하고 있다는 것 또한 미처 깨닫지 못했다.
“드디어 집주인이 돌아오셨군.”
가장 키가 큰 사내가 팔짱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 눈에 띄지 않는 인상인데도 웃고 있는 얼굴이 제법 서글서글했다. 어디서 사람깨나 홀려 본 듯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미소여서 마린은 더욱 경계심을 느꼈다.
“이 집에 퍼디 풀의 여분이 있다던데, 맞나?”
“몰라. 있더라도 넘길 생각 없으니 돌아가세요.”
“음. 많이 피곤한 모양이군. 그러면 내일 다시 방문하면 이야기를 나눌 수……”
“내일이 아니라 언제가 되었든 오지 말라니까요.”
마린은 그들을 외면하고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당신, 각성자군.”
“…….”
문을 밀려 했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칫 굳었다. 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한 사내를 보았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뜻을 알 수 없이 새카맣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가시덤불을 키워 내는 능력. 맞지.”
“당신들, 뭐야.”
마린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세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목 뒤로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혔으나 그녀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허리춤에 찬 단검을 움켜쥐었다.
건장한 용병 셋을 단신으로 상대할 자신은 없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허망하게 혼자서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능력과 이 단검을 함께 사용한다면…….
“이런.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리 경계할 필요 없어. 아무래도 거두절미하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
검은 머리칼의 사내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은 갈색 머리칼의 키 큰 사내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이도, 나도 각성자이기에 같은 각성자를 알아볼 수 있지. 풀은 사실 핑계일 뿐, 우린 몇 달 전 이 마을에서 정제한 두둘렘 버섯을 가져가려 한 이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네.”
“……정제한 두둘렘 버섯?”
셋 중 두 사람이 각성자라는 사실보다도 마린이 먼저 반응한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단검 자루를 움켜쥐었던 손에서 일순 저도 모르게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사람 좋고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여태 우리가 정보를 쫓아온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당신의 동생이 거기에 불운하게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거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겠나? 아주 잠깐이면 돼.”
물론 ‘진실’에 당신도 관심이 있다면 말이지만.
남자가 덧붙인 말이 마린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결국 마린은 짓씹던 입술을 열어 메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마이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좋아. 들어와요.”
몇 달간 사람이 제대로 머물지 않았던 듯, 춥고 허름하기 그지없는 집에 들어선 유더는 덜그럭거리며 등불을 붙이는 마린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설마 가시덤불의 마린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유더는 이전 생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가시덤불의 마린이라는 이명을 지녔던 그녀는 말 그대로 독을 품은 가시덤불을 비롯하여 각종 위험한 풀과 나무를 어디서든 급속도로 자라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 용병이었다.
그녀는 카치안 황제가 한창 디아카 공작가를 비롯한 4공작가의 숨통을 조이면서 황권 강화를 노리던 시기,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외부 행사를 위해 나온 황제의 암살을 시도했다. 물론 그 시도는 유더의 손에 저지되었는데, 마린은 놀랍게도 당시 마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데 성공하여 유더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년 뒤, 그녀는 미래에 붉은 들판이라 불리게 된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들판에 모인 이들과 함께 황제의 폭정에 반발하는 주범자 중 하나로서 이름을 드러낸 그녀는 독을 품은 가시덤불이 사람의 몸을 뚫고 자라나 목을 조여 죽이는 끔찍한 전투 방식으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그리고 이후 카치안 황제가 보낸 기사들과 제국군, 그리고 마병단의 합동 작전 앞에 스러져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 각성자의 얼굴을 유더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이전 생에는 누구도 마지막까지 고향과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던 가시덤불의 마린을 여기서 허술한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직접 보면서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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