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어서 오십시오. 드디어 회복되신 모양이군요.”
유더는 무심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나단 주커만은 평범한 용병 같은 차림새로 마을의 빈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묵묵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지만 유더는 발정기로 열이 올랐던 시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당시에는 키시아르 외의 다른 모든 게 인식할 필요도 없는 존재들처럼 느껴졌기에 아무래도 좋았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가 얼마나 엄청난 꼴을 보았을지 짐작되어 얼굴을 마주하기가 조금 난감하기는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전 생에도 그에게 못 볼 꼴을 보인 적이 있었으나 이번은 신비할 만큼 그때와는 모든 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건 이곳으로 오기 직전 키시아르에게 들었던 말 덕분이기도 했다.
‘-혹 나단에게 미안하다거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네.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일은 일어날 수 있는 법이고, 나단 또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숙지한 뒤 왔으니까.’
유더의 발정기 시기가 아주 가까워졌다는 건 수도에서 출발하기도 전부터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을 일행에 포함한 건 이번과 같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충직한 기사는 기대대로 맡겨진 일의 뒷수습을 완벽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 나단을 다시 만난다면 사과가 아니라 감사의 뜻만 밝혀 주게. 나단도 그러길 바랄 테니까.’
그 말대로 유더는 나단 주커만에게 감사를 먼저 표하기로 했다.
“주커만 경이 뒤를 맡아 준 덕분에 완벽하게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단 주커만의 어두운 군청색 눈동자 위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순 스쳤다. 기사는 잠시 무어라 말할 듯 머뭇거리다가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일의 기준이 뭔지 궁금한데. 내가 보기에는 이번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는데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무튼 수고했다, 나단.”
키시아르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나단 주커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것으로 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완전히 풀렸다. 며칠의 공백 동안 있었던 일들을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이 분위기가 유더는 새삼스레 낯설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칸나와 가케인 같은 동료들에게 뒤를 맡겼던 때와는 또 달랐다. 나단 주커만 같은 이에게 묵묵히 자신의 뒤를 맡기고, 그다음으로 넘어간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아마 키시아르가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건 이런 걸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늦게 들었다.
“그러면 들어오십시오. 그간 마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제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지.”
나단 주커만은 그간 자신이 해 온 일들을 특유의 묵묵한 태도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시면서 이미 보셨겠지만 이 산골 마을은 정말 평범하고 작은 곳입니다. 산 너머에 있는 영주에게 소속되어 있으나 거리가 멀고, 상주인구를 다 합해도 100명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거주민은 이곳에서만 나는 약초를 전문적으로 캐거나, 과나마르 산의 명물인 산꼭대기 호수를 보기 위해 찾아온 여행자들을 상대합니다.”
“인구는 적지만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익숙하여 경계와 배척이 적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때문에 제가 호수를 보러 온 용병으로 가장하여 이 집을 빌리고 매일 주변을 돌아다녀도 크게 의심을 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지금 시기 정도가 가장 아름다운 철이라더군요.”
“흠. 겨울이 제철이라……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하나 생기는군.”
키시아르가 이미 나단 주커만과 유더 모두 그 사실을 이미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한다는 듯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유더는 이전에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 마을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디아카 공작가의 방계 사람들이 여름을 보내러 이곳에 왔었다고 하셨었지요.”
“그래.”
“관광을 위해서라면 지금처럼 초겨울에 왔을 것이고,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다른 더 좋은 곳이 많았을 텐데 온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
“바로 그거야.”
키시아르의 눈이 휘었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저 또한 그 점을 의심스럽게 여겨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술을 마시며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니 그렇지 않아도 그 점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주민들의 말로 그들은 여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으나 그다지 주변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며칠간 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는 예정보다 더 빠르게 돌아갔었다더군요. 그때 안내를 맡았다는 자가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가 오늘 돌아올 예정이라기에 그를 만날 생각입니다.”
“흠.”
키시아르의 눈에 서늘한 흥미가 서렸다.
“정말 수상하기 그지없군. 좋아. 그리고 그것 외에 황태자가 이곳에서 독버섯을 정제한 건에 대해서도 더 알아낸 게 있겠지?”
“네. 사실 그 부분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말을 잇기 전, 나단 주커만이 주변을 잠시 흘긋 살폈다. 문이 모두 닫혀 있고, 그 누구보다 뛰어난 오감을 지닌 소드 마스터임에도 주변을 향한 경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신중함은 그가 잘 훈련받은 기사임을 짐작케 한다. 유더는 한때 수많은 단원을 이끌었던 자의 입장에서 나단 주커만의 신중함을 몹시 높이 평가했다.
“그 일을 캐내려면 일단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마을의 약초꾼들을 대상으로 해당 시기 즈음 채취할 수 있는 약초를 구매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며 올해 그 시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현명한 접근이야. 그래서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지?”
“이 마을 거주민 중 한 명이 죽었었더군요.”
나단 주커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약초꾼 한 사람이 채집을 나간다고 했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채 산에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수확철 축제가 열렸던 시기 직전 즈음이었습니다. 영주가 보낸 병사들은 조사 후 그가 짐승을 만나 죽었다고 밝혔으나,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군요.”
“살해라고 생각하던가.”
“네.”
나단 주커만의 말에 따르면, 수확철 시기 즈음 죽었다던 그 불행한 약초꾼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젊은 청년이었다. 성격이 쾌활하여 주민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고 개인적인 원한을 산 일도 없다고 했다.
“이 과나마르 산에는 사람을 해칠 만큼 위험한 수준의 짐승이 서식하지 않습니다. 그 약초꾼이 죽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같은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위험한 곳이었다면 애초에 귀족들까지 호수를 보러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더가 아는 대부분의 귀족들이란 늘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만 다니는 자들이었다.
“주민들은 그가 죽기 전, 평소보다 자주 산 아래로 내려가 누군가를 만났었다고 말했습니다. 약초를 팔기 위해 만나는 상인이라고 말했는데, 마을 사람 중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상인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수상한 약초 상인과 살해당한 약초꾼이라.”
아주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다.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상인의 정체가 아마도 황태자가 이 마을에 보냈다던 시종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판단하여 더 캐 보려 했으나 제가 만난 이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이의 가족이라면 알 수도 있다고 누군가 말하더군요.”
“가족을 만나 보셨습니까.”
유더가 물었다.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 디아카 방계 귀족들의 안내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오늘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었던가.”
키시아르가 끼어들어 물었다.
“예.”
“잘됐군. 우리도 그를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가야겠어.”
유더는 오두막에서 가지고 온 피 묻은 두둘렘 버섯 자루를 떠올렸다. 그것은 잘 갈무리된 채 그의 짐 속에 들어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