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28화 (628/805)
  • 628화

    “현자님. 아무래도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네조가 밖에 나갔다가 수상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수상한 소식이라는 말에 렌보우 자작이 의아해하기가 무섭게 현자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거의 구르듯 들어온 젊은 각성자, 랭바튼이 숨을 헐떡거렸다.

    “수상한 소식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마, 마병단에서 이번 단원 모집을 방해하는 이들을 찾아 대대적으로 조사할 것이라는 새로운 소식을 수도 전체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곁에서 듣고 있던 렌보우 자작이 자신과도 관련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물었다.

    “빠른 조사를 위해 현재 마병단 소속이 아닌 각성자 단체 및 집단들과도 긴밀히 협력할 예정이라고 했다는데… 거, 거기에…….”

    “이 사람은 괜찮으니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보세요, 랭바튼. 마병단이 외부의 누구와 협력한다는 겁니까?”

    현자가 얼굴이 희게 질린 랭바튼을 독려했다. 랭바튼은 그제야 마음을 다시 굳게 먹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나그란의 별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새 마병단원 모집을 방해하는 세력을 조사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그 외부 인사들 명단인지 뭔지에 우리 나그란의 별의 이름이 있었답니다!”

    랭바튼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방 안에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렌보우 자작은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재차 생각해 보려는 듯 멍한 얼굴이 되었고, 현자의 입가에서는 평소 늘 띠고 있던 온화한 웃음이 사라졌다.

    “현자님. 나한이 분명합니다. 저희가 그들과 협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나그란의 별이 마병단과 힘을 합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히 나한이 그놈들과 손을 잡은 겁니다!”

    “……나그란의 별이라면 현자님과 당신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라 하지 않았었소? 그런데 나한이라니. 그건 또 누구요? 누군데 이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지은 렌보우 자작이 랭바튼과 현자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제야 웃음이 사라졌던 입꼬리를 스르르 다시 끌어 올린 현자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한 번의 호흡만으로 누구라도 금세 신뢰하고 싶을 만큼 상냥한 눈빛이 된 중년 사내는 먼저 랭바튼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랭바튼. 감정에 지나치게 흔들리면 상황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렌보우 자작님.”

    영문 모를 의문과 불쾌함으로 흔들리고 있던 렌보우 자작의 눈이 현자와 마주쳤다. 현자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처음 만났던 날 이후로 자작님과 저희 사이에는 줄곧 진정한 마음의 교류가 오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서로를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자작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리 말한 적이 있긴 했지요.”

    자작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여태까지처럼 서로를 믿는다면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믿고 오늘은 일단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의문으로 가득 찼던 렌보우 자작의 눈이 서서히 부드럽게 풀렸다. 의심 많은 귀족에서 신뢰 가득한 친구처럼 변한 사내는 현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니 일단은 돌아가서 이쪽도 나름대로 다시 주변을 살피도록 하지요. 혹 제가 도울 일이 생긴다면 무엇이든 이 렌보우에게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알려 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현자는 침묵 속에서 씨근거리며 불안과 분노에 찬 눈빛을 번득이는 랭바튼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랭바튼. 오늘은 마음이 많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현자님. 소식을 듣자마자 어서 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렌보우 자작이 저희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분은 다행히도 이 사람에게 깊은 신뢰를 주고 계십니다. 오늘 들은 일에 대해서는 기꺼이 함구해 주실 겁니다. 마음이 다급할 때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다음일 뿐입니다.”

    “현자님…….”

    랭바튼은 자신의 실수에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오히려 안심하게 해 주는 현자의 넓은 마음에 재차 감동을 받았다. 그는 치밀었던 감정들을 삼키며 아까 하려다 참았던 말들을 쏟아 냈다.

    “나한 그놈이 수도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거점 쪽에 아직 아무런 연락을 보내지 않은 모양이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얼마 전 일어났던 저희의 이전 숙소 침입자와 도둑 건이 그놈들 짓이 맞다면 그 의도를 더욱 좋게 판단할 수 없지요. 그런데 심지어 이번에는 마병단 협력자로 나그란의 별의 이름이 나온 상황입니다!”

    나한이 현자를 만나기 위해 수도로 왔다면 우선은 남부 거점 쪽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먼저 보내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리고 현자 측과의 접선 경로를 잡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자는 남부 거점 쪽에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았을뿐더러, 조금의 조심성도 보이지 않고서 현자가 머물던 숙소를 알아내어 멋대로 침입했다. 그 과정에서 남부 거점 측이 현자에게 보낸 서신이 유실된 걸 보면 나한이 현자의 뜻을 의심하고 멋대로 굴고 있다는 판단밖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오늘 새로이 터진 마병단의 협력자 명단.

    하필 현자가 직접 나서서 디아카 공작을 돕기 위해 움직이자마자 마병단에서 기다렸다는 듯 그런 소식을 퍼트린 게 과연 우연일까? 그것도 마병단을 방해하는 집단도 아닌 협력 집단에 나그란의 별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마병단이 저흴 잡아 가두면 가두었지 어떻게 협력이란 소릴 합니까? 저흰 그놈들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중 그자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굽니까. 나한 그놈뿐이지 않습니까!”

    마병단은 여태까지 나한을 포함하여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과 몇 번의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잡혀간 형제자매들이 제법 생겼으나 마병단 측에서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을 알린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 랭바튼은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한은 현자가 지금 누구를 돕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을 터다.

    황태자를 치료하고 디아카 공작을 돕는 중인 현자를 응징하고 방해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세력과 적대하는 황제의 휘하에 있는 마병단을 이용하는 것이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혹 여태 그들과 여러 번 마주쳤을 나한이 현자님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이전부터 몰래 연락을 주고받아 왔던 건 아니었을까요? 실은 서부에서 당했다던 동료들도 다 거짓말이고…… 나한 그놈이 수를 썼던 거라면요?”

    “하지만 랭바튼. 이 사람은 나한을 당신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보아 왔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라는 목표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해도 나한은 여간해선 귀족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놈이 귀족을 싫어하는 거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마병단은 죄다 평민 출신 각성자가 아닙니까?”

    “…….”

    랭바튼은 나한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현자에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했다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추측에 힘을 더할 요소를 찾아냈다.

    “현자님. 나한이 예전에 동부에서 다른 형제들을 구출하여 데려왔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몬스터를 다룰 줄 아는 꼬맹이 조쉬가 들어왔던 때 말입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마병단과 마주쳤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그때 이후로 나한이 여러 번 마병단과 부딪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한 그놈과 마병단 사이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전 저희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나한 그놈이 물론 진심으로 마병단과 손을 잡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자를 겁박하여 제 뜻을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이런 짓을 저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그놈의 목적은 모두 다 같이 이 제국을 떠나 자신들만의 땅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모두 이 나라에서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드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 누가 아는가?

    랭바튼은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놈이 아니라면 대체 우리 중 누가 미쳤다고 마병단과 협력을 하겠습니까? 거점에 숨어 매일매일 힘들게 지내고 있을 다른 형제자매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여기 있는 저희 중 누군가겠습니까? 누가 봐도 그놈입니다. 그놈이 분명해요!”

    현자가 눈가를 가렸다. 몹시도 심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랭바튼은 오늘의 소식을 듣자마자 네조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현자를 위로했다.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현자님. 당장 다른 거점들에 연락을 보내 이 소식으로 인한 혼란을 막고, 현자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시면 결국 바라시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겁니다. 저희가 그럴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다른 이들이 걱정되어도 수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나한을 직접 만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랭바튼은 간청했다.

    한참 뒤 손을 내린 현자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랭바튼을 토닥여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하지만 일단 나한과 접촉은 하지 않더라도 그가 어디에 있을지 찾아보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겠군요.”

    그건 즉 현자도 랭바튼과 네조의 추측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그 선량한 현자가 나한 놈의 시커먼 속내를 느끼고 어찌 여길까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이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것도 저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 녀석들이 어디 있는지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현자는 나그란의 별에 머무는 모두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힘든 일을 자처한 사람이다. 같은 편임에도 한없이 위험하고 머릿속을 알 수 없는 나한 놈이 마음대로 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랭바튼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현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다른 모든 일에서 잠시 거의 손을 놓고 나한을 쫓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손길이 닿을 예정이던 일들의 흐름 또한 뒤틀리게 되었다.

    ***

    “어서 오십시오. 드디어 회복되신 모양이군요.”

    유더는 무심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나단 주커만은 평범한 용병 같은 차림새로 마을의 빈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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