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났다. 유더는 발정기의 여파가 완전히 가셨음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놀랄 만큼 가뿐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이대로 이 집을 들어다 통째로 날려 버리라고 해도 가능할 듯한 기분이었다.
“정리를 벌써 다 했나?”
내부와 짐 정리를 모두 마치고 오두막 밖으로 나온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물었다. 그는 나단 주커만과의 연락을 위해 먼저 바깥에 나가 있던 상태였다.
“네. 피 묻은 두둘렘 버섯 자루 외에 특이한 물건은 없더군요. 내부에 배어든 향도 거의 씻어 냈으니, 며칠 내로는 전부 사라질 겁니다.”
물론 그사이에 같은 2성 각성자가 온다면 여기에 어떤 알파와 오메가 각성자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누가 있었는지 정체까진 알 수 없다. 유더는 오두막 주변에 남은 희미한 흔적까지 철저하게 모두 지웠다.
‘청소하는 것보다는 무너뜨리고 가는 게 더 쉽긴 했겠지만…….’
이 집에서 중요한 물건이 발견된 이상, 이곳은 증거를 위해서라도 잘 보존되어야만 했다. 멀쩡하던 오두막이 갑자기 무너지면 남들의 기억에 남을 테니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귀찮아도 이쪽이 옳았다.
“나단 경과 연락은 하셨습니까.”
“그래.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더군.”
나단 주커만 쪽에도 아직 아무 문제가 없었다니 잘된 일이다.
유더는 근 일주일 만에 비로소 마주한 바깥 풍경을 담담히 훑은 뒤 키시아르와 함께 오두막을 떠났다. 그들이 때려잡아 땅에 잘 묻어 두었던 용병 무리들은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그들이 오두막에 머무는 사이 서부 지부의 마병단원들이 나와서 전부 수거해 갔을 것이라 설명했다.
“이후로는 그자들을 지부에 구금하고 쓸 만한 정보를 더 캐내면 연락하라는 명을 전달했네. 그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자들에게 얻어 낸 정보를 너와 함께 제대로 의논할 시간이 없었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드디어 발정기가 지나 제대로 된 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본능이 이성보다 위에 선 시기에도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완전히 잃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지금처럼 복잡한 생각들을 나누어 할 수는 없었다.
그게 딱히 나쁜 건 아니란 걸 이번 경험을 통해 제대로 깨달았으나 유더는 평소대로 돌아온 지금이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용병들에게서 얻어 낸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키시아르와 나단이 그자들에게서 밝혀낸 정보는 유더가 알아냈던 것들과 거의 일치했다.
“이번 단원 모집을 틈타 간자를 밀어 넣거나 방해하려는 세력이 끼어들 거란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 다만 신중하길 좋아하는 디아카 공작 측에서 이리 대담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현자 쪽에서 나서겠다고 했다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확률이 높겠지요.”
“그래.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배후를 완전히 알아내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서부는 한번 찔러보려는 의도로 저질렀기에 용병을 썼겠지만, 진짜는 아마도 현자가 머물던 본거지가 있는 남부에서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거기까지 생각했나?”
“제가 그놈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그렇지. 진짜 공격은 언제나 척후병을 보내 적의 동태를 살핀 뒤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길 택하겠지.”
서로 생각을 공유하기라도 하듯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건 상당한 쾌감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기분 좋게 눈을 휘어 웃은 키시아르를 향해 유더는 현자에 대한 판단을 짤막하게 내뱉었다.
“이번 일로 현자란 놈이 나한만큼의 살인귀는 아닐지 몰라도 더 훌륭하거나 좋은 놈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래. 그자가 디아카 공작 측과 황태자 측, 양쪽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다소 대담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확실해.”
현자가 이번에 자신의 쓸모를 제대로 증명해 낸다면 아마도 그 뜻대로 되기가 크게 어렵진 않을 터다. 사람을 세뇌하여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닌 데다 다양한 힘을 지닌 나그란의 별 구성원들을 이용할 수 있으니 권력자들과 손을 잡는 즉시 얼마나 그 힘을 잘 써먹고 다닐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그건 이미 이전 생의 가짜 현자가 한번 비슷하게 해냈던 일이었으니까.
‘어림도 없지. 내가 그 꼴을 또 볼 것 같으냐.’
“황궁 침범의 증거는 몰라도, 이번 일의 증거는 용병들을 잡고 있는 한 문제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보이기 시작하는 마을의 흔적을 보며 조용히 선언했다.
“남부에 제대로 신경을 쓸 틈도 없도록 만들어 버리죠.”
놈이 마음대로 남부에 손을 쓰도록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없다. 직접 내려오지 않고 멀리서 수작을 부리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아주 잘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살기라 착각할 만큼 음산한 빛을 뿌리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며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새롭게 심장이 뛴다고 내가 말했었던가?”
“어차피 단장님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것 아닙니까.”
“맞아.”
키시아르는 유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도착하는 대로 서부 지부와 수도 본부에 보낼 전갈 내용이 이제 다 정해졌군. 아주 기대가 돼.”
***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광휘궁 구석.
아지헨 툼. 혹은 현자라 불리는 사내가 머무는 거처에 오늘은 손님이 방문했다. 디아카 공작을 따르는 귀족 중 한 사람인 렌보우 자작은 현자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얼굴을 가린 로브를 내리고 화가 난 얼굴로 속사포처럼 입을 열었다.
“이 더러운 서부의 용병 놈들. 본디 신의를 모르고 게으른 족속들임은 알았으나, 설마 임무 당일 이렇게 도망쳐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놈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렌보우 자작님.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진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놈들이 도망쳐서 입은 손해가 어마어마합니다. 현자님께서는 화도 안 나십니까? 현자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을 이 지경으로 망쳤는데……!”
“렌보우 자작님.”
렌보우는 나직하게 어깨를 잡는 현자의 손을 보며 움찔 입을 다물었다. 부드럽지만 묘한 힘이 느껴지는 웃는 얼굴로 현자가 속삭였다.
“화가 나신 마음은 이해하나 이곳은 황태자 전하의 궁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며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지요. 진정하시고 앉아서 차라도 드시며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건 어떠실지요.”
“아…… 그, 렇지요.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했군요.”
자존심이 강하여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기로 유명한 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렌보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숨을 고르며 현자의 앞에 앉아 따라 주는 차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용병들을 찾으려고 재차 고용한 다른 용병들에게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놈들의 흔적이 타이누를 벗어난 이후로 끊겼다고 합니다. 근처의 팔라마에서 놈들 중 몇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어 거기로 가볼 생각이라더군요. 아무래도 도망친 게 확실하지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현자님께서는 화도 안 나십니까. 이 일이 어떻게 될지 저는 벌써부터 너무나 초조하고 걱정이 됩니다. 그놈들이 혹 다른 곳에 가서 입을 나불대기라도 한다면……!”
“괜찮습니다.”
뜻밖의 말에 렌보우가 고개를 들었다. 현자가 그에게 새로운 차를 권하며 말했다.
“모든 일에는 실패의 여지가 언제나 있는 법임을 감안하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 사람은 오히려 자작님의 마음이 상하고 불편한 듯하니 그것이 더욱 걱정되는군요.”
“현자님…….”
인자하고 다정한 말을 들은 렌보우의 얼굴에서 스르르 노기가 걷혔다. 자작은 제3자가 보았다면 조금 이상하게 여길 만큼 빠르게 진정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도로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자들이 설령 입을 싸게 놀린다 해도 나불댈 것이나 있겠습니까.”
그가 진정한 기색을 확인한 뒤 현자가 나직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도망치는 게 가능한 일인지는 조금 궁금하군요. 너무 섣불리 확신하는 건 아니겠습니까.”
“용병들의 말로는 요즘 의뢰를 이런 식으로 작당하고 빼먹은 뒤 도망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더군요. 이보다 더 규모가 크고 대단한 의뢰를 하면서도 도망치는 게 특별한 경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이런 식으로 고용해 본 건 처음이라 너무 무르게 행동한 모양입니다. 역시 디아카 공작 전하의 말대로 믿을 수 없는 놈들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거겠지요.”
그 말에 현자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는 한층 더 온유한 얼굴로 렌보우의 손등을 토닥였다.
“디아카 공작 전하께서 혹…… 무어라 하셨습니까?”
“아뇨. 그분께서는 이 일을 그리 궁금해하지 않으십니다. 성공하고 돌아와야만 말을 들어 주실 생각이시겠지요. 그런 분이시니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나, 렌보우는 현자에게서 언제나 깊은 신뢰를 느꼈다. 처음에 뒤르망 남작 대신 이 일을 맡게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현자를 사기꾼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반대가 된 지 오래였다.
현자는 디아카 공작의 눈에 들고 싶어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그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었다. 그는 여태껏 렌보우가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 발설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언제나 현명하고도 적절한 조언을 해 주어 마음을 녹였다. 이런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따를 수 있을까?
렌보우는 모처럼 좀 더 한탄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때였다.
쿵쿵쿵. 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이야기 중이니 이따가 다시 와 주십시오.”
현자가 짧게 방문객을 거절했으나 문밖의 두드림은 더 거세졌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자님. 아무래도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네조가 밖에 나갔다가 수상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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