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26화 (626/805)

626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키시아르 라 오르. 그저 그뿐.

그걸 잊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침착해졌다. 그는 제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지그시 마주 응시했다. 깊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며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키시아르 라 오르를 눈에 담았다.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잘난 얼굴이었다. 싱그러웠으며 따뜻했고, 변함없이 솔직했다. 단 한 번도 타인에게서 받아 본 적 없는 감정이 아름답고 존귀한 사내의 눈 속에서 넘실거리는 모습이 달콤한 꿈결처럼 매혹적이었다.

그가 과거의 키시아르 라 오르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가 무어라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곁에 있겠다고 맹세한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무얼 보고 걸어가야 하는지 제대로 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정리했다 여겼음에도 정작 이런 일이 닥치자 평소처럼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건 제 마음이 사실상 아직도 제대로 정리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그건…… 내가 과거의 키시아르와 같지 않은 지금의 키시아르를 보며 늘 안도하고 있었던 탓이겠지.’

단두대 앞에서 느꼈던 오래된 감정의 무게가 재차 느껴졌다. 오랫동안 쌓이는 줄도 모른 채 쌓이고 억눌려 온 그것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도 유더의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너무 무거워 스스로도 그 바닥을 다 파헤칠 수 없는 어둑한 늪을 유더는 새삼스레 들여다보았다.

애틋한 갈망. 차가운 미움.

존경과 동경. 원망과 분노.

까닭 모를 그리움. 살인자의 몸을 옥죄는 그림자.

그 모든 것을 뒤섞으면 키시아르 라 오르가 된다.

유더를 이렇게 뒤흔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

키시아르 또한 유더가 이 추측 앞에서 얼마나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는지 보았다. 유더가 이전 생의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을 대놓고 이야기했음을 알면서도 그 추측을 이야기하기가 그로서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감정을 배제하고 지극히 논리적으로 제 생각을 이야기한 건 그럴 만한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유더는 그가 그런 사내이기에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음을 잊지 않기로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슴 속 어딘가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에 홀려 진짜 중요한 것에서 눈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을 견디고 있는 건 저뿐만이 아니다. 키시아르 또한 유더를 위하여 낯선 고통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며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된 일들과 얽혀 가는 게 누구인들 좋을 리 없다.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이의 흔적이 모르는 사이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추측했을 순간도 결코 달갑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사내는 단 한 번도 유더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유더는 불현듯 손을 뻗어 키시아르의 뺨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음이 가는 대로 뺨을 매만지자 키시아르가 그 손을 가만히 쥐며 눈을 내리깔고 유순하게 얼굴을 비볐다. 서로 피부를 맞대고 있는 동안 두 개의 심장 박동이 거의 비슷한 속도로 울려 퍼졌다.

감정을 토해 내지 않아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소리만으로도 어떤 고통은 숨이 죽었다.

“……원망스럽지는 않으십니까?”

유더는 충동적으로 작게 물었다.

“생각해 보면 저와 괜히 얽혀 이런 이상한 일들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혀.”

키시아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은 그저 하나뿐이야.”

그게 무엇인 줄 알겠느냐고 사내가 속삭였다. 유더가 느리게 고개를 젓자 귓가에 그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도 잘 살아남아서, 내가 사랑하는 이의 귀한 웃음을 오래도록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

유더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뭐냐고 반문하고 싶다가도 드높은 파도가 철썩이는 것 같은 감각이 심장 어귀를 때렸다.

“……뭡니까, 그게.”

“뭐냐니. 심각한 문제지.”

키시아르는 평소 진짜 속내를 감추고 돌릴 때 그런 농담을 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정말 순전한 진심으로 보였다.

유더는 어이가 없어 웃음도, 한숨도 아닌 희한한 호흡을 흘리고 말았다.

“후…….”

“그래. 웃는 쪽이 훨씬 좋아.”

키시아르가 그린 듯 미소를 지었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이번에 일어난 일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긴 했지만, 결국은 지나간 일이야. 내가 아무리 이전 게임을 궁금해하더라도 그때와 같아질 수는 없어. 같은 패를 사용하여 게임을 한다고 같은 게임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지 않나?”

“…….”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나를 대신 이용하고, 미워하고, 원망해도 좋네. 네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아들일 테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일부러 비장하게 가라앉힌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우스웠으나 사실 유더가 진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는 정말로 기꺼이 받아들일 터였다. 유더는 그의 말을 부정하며 신기할 만큼 급속도로 부드러워지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꾸어 버린 건 키시아르의 힘이다. 홀로 고통을 풀어내는 방법을 모르는 유더를 그는 능숙하게 끌어안아 어느새 고민을 부드럽게 뒤로 밀어둘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얼마나 드넓은 마음을 지닌 이인지 이럴 때야말로 확실하게 느끼고는 했다.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발정기의 남은 잔불들이 재차 흔들거리는 감각 속에서 유더는 꿈속의 키시아르를 재차 떠올렸다.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늘 속에 홀로 서 있던 그 사내. 꿈속의 유더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고 쳐다보지 않았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키시아르는 그에게서 두려움을 읽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키시아르’가 거기서 읽어 낸 건 그저 그것뿐이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유더가 오랫동안 의문으로 여겨 왔지만 답을 알 수 없었던 질문들을 던진다면, 그는 답해 줄 수 있을까.

“단장님.”

“응.”

작게 부르자마자 곧바로 답이 들려왔다. 그도 유더처럼 자고 있지 않았다. 유더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이 살짝 실리며 들리는 심장 소리가 더욱 강해졌다.

유더는 그것을 지그시 들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의 말대로 이전 게임의 단장님이 정말로 단장복을 입은 저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면, 애초에 왜 저를…….”

“…….”

“아니, 아닙니다.”

애초에 왜 저를 마병단장에 올렸는지 궁금하다고 물으려 했지만 역시 같으면서도 다른 이에게 묻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답은 결국 그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냥 주무십시오.”

유더가 고개를 내저으며 도로 숨을 내쉬자 키시아르가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 쓸어 주었다. 오랫동안 그 동작을 반복하니 갑갑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유더가 눈을 몇 번 깜박이다 결국 완전히 감아 버린 뒤에도 변함없이 같은 행동을 이어 나가던 사내는, 작은 오두막 위로 또다시 짙은 어둠이 내렸을 때쯤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글쎄…….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지. 새 옷을 지어 주는 행위에는, 그 상대가 그것을 입고 제 생각을 해 주기를 바란다는 오래된 바람이 깃들어 있다는 것.”

오래된 전통에서 비롯된 이야기라 모르는 이들도 많지만, 키시아르는 알고 있었다.

그늘 속에 묻혀 웃음 속에 감정을 감추고 있던 그 남자도 분명히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키시아르는 발정기의 열기가 조금 남아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창백한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유더를 추슬러 안은 뒤 조그만 오두막 구석에서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부는 겨울바람도 그곳에는 침범할 수 없었다.

***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났다. 유더는 발정기의 여파가 완전히 가셨음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놀랄 만큼 가뿐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이대로 이 집을 들어다 통째로 날려 버리라고 해도 가능할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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