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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25화 (625/805)

625화

“그때는 환상 자체가 문제로 여겨졌기에 그 부분까지는 그리 깊이 생각지 않았어. 그저 네가 단장복을 입고 나왔다는 것만 인식했었지. 하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옷을 환상 속에서 먼저 보았다는 건 대체 무어라 생각해야 할까?”

유더는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 모든 어긋남이 서로 들어맞을 만한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무엇을 생각해도 결국 억측으로만 느껴질 뿐, 확신을 갖기는 어려웠다.

생각에 잠긴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말했다.

“일전에도 말했었지만, 나는 그 환상이 조금도 두렵다 여긴 적이 없었어. 어쩌면 나한 그자가 내게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이 아닌 다른 환상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보기도 했었지.”

그 생각은 유더도 해 본 적이 있었다.

키시아르가 본 환상 속에 등장했던 단장복 차림의 유더.

그건 사람이 마음속에 숨긴 공포를 끄집어내어 과장되게 드러내는 게 장기인 나한의 환상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보기에는 대단히 뜬금없는 결과물이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단 한 번도 단장 자리를 노린다고 의심하지도, 그것을 무섭다 여긴 적도 없다고 말했다. 유더 또한 해당 부분에서 그의 뜻을 달리 느낀 적이 없었다. 때문에 키시아르 본인은 당시 그 원인을 페투아멧을 상대하느라 죽을 뻔했던 유더를 보고 난 후 불안했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한은 일전에 동부에서 유더가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 알고 있는 자였다. 피투성이 단장복을 입은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유드레인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전 생을 모르는 나한의 입장에서는 유더가 사실 제 단장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두렵게 여긴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키시아르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이간질을 하기에 단장복을 입은 유더는 썩 괜찮은 선택이 아닌가.

키시아르의 말마따나 대상자의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사실 나한이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다는 추측은 당연한 결과였다.

키시아르가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전혀 두렵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점도 그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하지만 그 추측이 사실이 되려면, 환상 속 유더가 입고 있던 단장복이 키시아르의 단장복이어야 말이 된다. 유드레인 아일의 단장복은 키시아르의 말마따나 그의 것과 아주 비슷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꿈속에서 이전 게임의 나를 보았을 때.”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의 시선이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흐릿하게 응시했다.

“홀로 들어서는 너를 보는 표정 속에서, 나는 내가 같은 모습을 보며 느낀 적이 없었던 바로 그 두려움을 느꼈어.”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머리를 거세게 두드리는 천둥처럼 느껴졌다.

유더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키시아르도 보았으니 알 것 아닌가. 단장 임명식 내내 그때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취했던 태도는 어느 모로 보아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듯 보이지 않았다. 설령 다른 감정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두려움이라니?

그게 어딜 봐서 두려움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나?”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유가 없다.”

유더의 말을 반복하여 따라한 키시아르는 잠시 침묵했다. 유더는 그가 제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자신의 숨결이 상당히 빨라져 있었음을 인지했다.

그가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키시아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하나 묻겠네. 꿈속의 네가 입었던 그 옷은 누가 만든 것이었지?”

유더는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는 듯한 사내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때의 단장님입니다.”

당시 유더는 단장 자리에 오를 예정이라 해서 제 몫의 단복을 새로 맞춰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어차피 키시아르가 안 입게 될 단장복이 여러 벌 나올 테니 그걸 얻어서 줄여 입으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그런 그를 붙잡아다 치수를 재고 옷 소재와 자수 모양까지 다시 지정하여 유더를 위한 단복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유더는 그것이 아마도 키시아르의 체면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옷을 만들기 위해 불려 나가는 게 짜증 나서 이런 데다 시간과 돈을 낭비하느니 그냥 평소 입던 옷을 계속 입는 게 낫겠다고 몇 번을 반발했던가.

그러나 결국 임명식 당일에는 키시아르가 만들어 두고 간 옷을 입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유더의 단장복은 그때 만들어진 도안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첫째로는 단복을 바꾸는 데 쓸 신경이 있으면 다른 데 쓰는 게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오래 입어도 그리 욕을 듣지 않을 만큼 유행과 상관없는 생김새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더의 대답을 들은 사내의 얼굴 위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지워졌다.

“두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네. 본능에 새겨진 직관적인 생명의 공포. 혹은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막연한 상상의 공포. 그 외에도 제법 많지. 나는 목을 누르는 칼이나 귀신이 무섭지는 않지만, 단 하나. 짐작 가능하지만 막연한 미래를 앞둔 상황은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제법 있어.”

짐작이 가능하지만 막연한 미래. 일견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이를테면 내가 언젠가 터져 죽게 되리라는 상황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자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혹은 주기가 다가오는 걸 느끼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던 순간.”

“…….”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건 선황 폐하의 장례식 때였지. 앞으로 나와 내 형제에게, 그리고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몹시 분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만큼 무력하고 두려운 건 없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유더의 꿈속 광경 또한 어쩌면 그때의 키시아르에게 비슷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는 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단장복을 입은 저를 보며 뭔가를 두려워한 게 정말이라 해도, 정작 단장 자리를 내려놓고 먼저 떠난 건 그쪽이 아닌가. 이제 와 생각하기에는 너무 오래 지나 버린 일인데…….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키시아르가 유더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굳이 이제 와 다시 이전 게임의 나에 대해 생각해 보라든가, 뭔가를 바꾸라고 말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는 아니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럼, 무슨 결론을 위해 이야기하신 겁니까.”

“만약 나한 그자가 내게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을 쓴 게 맞았고, 내가 본 너의 환상이 이전 생의 모습인 것도 모두 부합한다면… 어쩌면 거기엔 ‘나’이지만 지금의 ‘나’는 아닌 이의 두려움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네.”

일순 유더의 심장이 거세게 조였다.

그러니까… 나한 쪽에서는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 능력을 그대로 썼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키시아르가 아니라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느꼈을 ‘공포’의 환상이 튀어나온 게 아니느냐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토대로 차례차례 생각해 보게.”

키시아르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급할수록 생각할 틈 없이 익숙한 길로 가려 하지. 나한은 당시 내게 어깨를 찢기고 잡히기 직전이었어. 그런 상황에서는 수도 없이 많이 써서 익숙한 힘을 썼을 확률이 높아. 여태까지 우리가 본 바로 그건 바로 대상의 공포를 자극하고 드러내는 환상이지.”

그 말대로 나한이 여태까지 적을 상대로 가장 많이 사용한 힘은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이었다. 키시아르 정도 되는 이를 상대하며 순식간에 붙잡힐 뻔했던 상황에서 뭔가를 생각해서 짜낼 만한 틈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그 옷을 입은 네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 하지만 너의 꿈에서 본 그 사내는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을 것 같았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그 일이 이미 일어났고,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면 가능성을 열어 두는 쪽이 맞지 않겠나?”

죽고 나서 과거로 되돌아온 사람도 있는데 다른 일이라고 못 믿을 건 무엇인가. 키시아르는 유더가 되돌아온 이라는 사실을 믿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을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적용해 본 듯했다.

“내가 그동안 기억하지 못한 채 꾸었던 꿈들. 함께하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는 듯한 우리 사이의 기이한 연결…….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게. 어쩌면 그 환상도 그와 연관되어 일어난 것일지도 몰라.”

그 말을 듣고 유더가 반사적으로 먼저 떠올린 것은 일전에 키시아르가 잠든 채 잠꼬대로 ‘유드레인’을 불렀던 때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날의 기억. 그때는 충격이 너무 커서 더 나아가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또한 이번 생의 키시아르보다는 이전 생의 키시아르 쪽과 더 연관된 현상이었다.

‘…환상, 그리고 잠꼬대……. 공통점이 존재할 수 있는 현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사실은 있었던 건가.’

말도 안 된다고 여겨 치밀었던 감정들이 먹먹한 통증과 함께 스르르 녹아내렸다.

유더는 여태까지 이번 생의 키시아르와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같지만 다른 이들이라 생각해 왔다. 이번 생의 키시아르가 이전 생의 키시아르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될 수 있다는 생각 따윈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망령인 유더가 이미 여기에 있고, 그들 사이의 불가사의한 연결이 존재하는 이상 키시아르도 거기에 얽혀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일까.

지금의 키시아르의 보이지 않는 내면 어딘가에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 여겼던 이전 생의 무언가가 존재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너무나 이상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마치 목이 타고 눈 안쪽이 쓰린 듯도 한 묘한 감각.

그렇지만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조금 아파 보이면서도 흔들림 없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유더는 이내 그 감각을 꿀꺽 삼켜 버렸다.

‘……그래.’

확실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설령 추측이 확신이 된다 할지라도, 결국에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키시아르 라 오르. 그저 그뿐.

그걸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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