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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24화 (624/805)

624화

황족 출신 공작이 평민 출신 애송이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기도 전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더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불에 덴 듯한 움직임으로 손을 거세게 빼냈다.

‘…….’

거부감. 당혹. 분노.

그 외에도 숨길 줄 모르고 드러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부릅뜬 눈동자 속을 휩쓸고 지나가는 거친 감정이 모두의 앞에서 송두리째 드러났다.

서서히 주변의 웃음이 잦아들며 고요해졌다.

유더가 짓씹고 있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토해 냄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별안간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싫었나? 이젠 마병단장님이 되었으니 이런 인사를 받을 만도 한데 말이야. 장난 한번 쳤다가 거한 답을 받았군.’

도로 고개를 든 펠레타 공작의 입술 끝에 생긴 긁힌 자국을 본 이들이 제각기 숨을 삼켰다.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는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문지른 사내는 태연한 얼굴로 이 이상 무얼 더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겨우 한마디를 더했다.

‘음…… 그러면 유드레인 아일 백작. 좋은 마병단장이 되기를 멀리서 기원하겠네. 뭐, 누구라도 나보다야 성실히 하겠지만. ……아무튼 잘 지내게.’

성의 없는 인사와 함께 눈을 휘어 빙긋 웃은 키시아르는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등을 돌렸다. 그는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카치안 황제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러면 해방된 이는 이제 정말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곧 펠레타로 떠날 참이라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군요.’

정말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먼저 자리를 비움을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고상하면서도 한량다운 말투를 들은 카치안 황제가 서늘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겠군.’

예를 표한 키시아르가 물러났다. 그의 등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입을 다물고 있던 귀족들이 그제야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며 웃기 시작했다.

가볍기 그지없는 펠레타 공작이 아무 생각 없이 과한 행동을 발휘하여 구설수에 오른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평민 출신을 놀려 먹으려다 입가에 피를 본 펠레타 공작이라니. 너무나 그다워서 오히려 우스울 뿐이었다.

‘대체 신임 단장이 펠레타 공작의 후광을 입고 이 자리에 섰다는 건 누가 한 말인가. 저런 원수가 또 없어 보이던데.’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만은 제법 오래 가지고 노는 듯하다더니, 그것도 결국 이 정도뿐이었던 거겠지.’

몇 마디 평을 내놓은 뒤 사람들은 빠르게 그에 대해 잊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끈이 완전히 떨어진 이전 황가 대신 확실하게 위엄 있는 모습과 흔들림 없는 권력을 보여 준 새 황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모두가 마병단을 해체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젊은 황제는 오히려 새로운 마병단장에게 큰 상과 기회를 내렸다. 평민 출신 따위도 받는 상을 황제에게 충성할 새로운 인재들이라고 받지 못하겠는가? 여태까지 가문의 힘이 모자라 권력의 중심에서 억울하게 밀려나 살았던 자들도 카치안 황제의 치세 아래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꿈꾸어 볼 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귀족들은 역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눈치 빠르게 찾아온 자기 자신을 장하다 여기며 제각기 계산을 돌렸다. 카치안 황제 또한 그들의 욕심 어린 눈빛을 기꺼이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두 예상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평민 출신의 애송이 각성자가 분에 넘치는 작위와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사실 따윈 더 이상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리고 유더는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가 막 문을 열고 홀로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

이것이 키시아르 라 오르와의 마지막일까.

딱히 아름다운 마지막을 상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이 될 거라고 예상했던 적은 없었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치밀어 올랐으나 서툴기 그지없는 젊은이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해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유더는 한 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문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내의 등을 노려보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대로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려 반대편 출구로 향하려 했을 때였다.

“주먹을 그렇게 강하게 쥐면 손이 상할 수도 있어.”

유더는 귀신을 본 것 같은 기분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방금 사라졌었던 사내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유더가 놀라 경계하는 얼굴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사내가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연약하면서도 아파 보이는 미소였다.

유더가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럼에도 아주 익숙한 미소를 짓고서 낯선 키시아르 라 오르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보이나? 자. 내가 누구지?”

‘……키시아르, 라 오르.’

“그래.”

유더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사내가 걸친 옷은 방금까지 앞에 있었던 펠레타 공작의 차림새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여행이라도 떠나려는 것처럼 간단한 차림이었으며 낯빛과 눈빛도 아까와는…… 무언가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좀 더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니 여전히 떠들고 있는 귀족들이 보였다. 카치안 황제는 시종장과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은 방금 사라졌던 펠레타 공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났음에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굴었다. 여기에서 키시아르를 보고 있는 건 오직 유더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사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꿈에서 함께 깨어나야지.”

꿈이라고?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차 고개를 돌린 곳에 있던 귀족들과 황제의 얼굴이 그 순간 기이하게도 흐릿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딛고 선 영광의 홀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발아래가 순식간에 새카만 어둠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앞의 사내를 붙잡았다. 사내는 유더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품에 단단히 끌어안아 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서로의 몸을 강하게 동여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품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을 맡은 순간, 유더는 비로소 어렴풋이 머릿속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방금까지 보았던 그 모든 건 그가 이미 한번 겪었었던 일이었다…….

그 즉시 까마득한 추락감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무저갱을 향하여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유더는 끌어안은 몸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눈을 번쩍 떴다.

“…….”

헐떡이며 몰아쉬는 숨결 너머로 허름한 오두막집 벽이 보였다.

‘꿈…….’

과거의 꿈을 꾼 건 여태까지 여러 번 겪어 보았었지만, 이번 꿈은 다소 이상했다. 단장 임명식 때 상황이야 그렇다 쳐도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키시아르는 뭐란 말인가?

꿈속에서 중간부터 별안간 난입한 키시아르는 지금 유더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이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여태까지 과거의 꿈을 꾸는 동안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발정기의 여파일까?

유더가 눈을 감고 있는 사내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키시아르의 속눈썹이 잘게 흔들렸다. 잠시 후 눈꺼풀이 열리며 잠기운이 없는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유더의 이목구비를 말없이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어째서 같은 의미로 행한 행동인데 받아들이는 너의 반응은 전혀 다른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더랬지. 이마나 뺨에 하는 입맞춤은 기꺼워하면서도 손등에 했던 입맞춤은 꺼려 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어서.”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시아르가 눈을 내리깔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그 답을 알게 되었군.”

“단장님. 설마 방금 꿈에서…….”

차마 말끝을 잇지 못한 유더의 몸을 키시아르가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 나였어.”

같은 꿈을 꾸었던 것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인데, 이번에는 아예 유더가 꾸는 꿈속에 키시아르가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함께 들어왔다니.

아무리 이전 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직접 보는 건 너무나 큰 차이다. 자신이 죽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야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이들 몰래 잠조차 자지 않고 끝없이 전술 게임을 복기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

“나는 괜찮아.”

유더가 느릿하게 입을 열자마자 키시아르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게 너의 꿈속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물론 조금 놀라기는 했지. 불러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뒤를 따라다니면서 지켜보았어. 이전 게임의 나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했던 사내가 이내 피식 웃었다.

“……직접 보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해야 할까.”

시원이라니. 유더가 생각했던 그 어떤 반응과도 다른 감상이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면 정말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는 향과, 미약하게 연결된 감각을 총동원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유더는 조심스럽게 확인해 보았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저번 일로 정말 신뢰를 많이 잃긴 했군. 역시 무너뜨리는 건 쉬워도 쌓는 건 어렵단 말이지.”

짐짓 가슴 아픈 얼굴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키시아르가 방금보다 조금 더 선명한 미소를 띠고서 유더의 머리를 작게 토닥였다.

“하지만 정말이야.”

“…….”

“그때의 네 기분이 어땠는지 같은 건 따로 묻지 않겠네.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감상 정도는 이야기하고 질문을 해도 되겠지? 키시아르가 물었다. 유더는 낯선 기분 속에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난스레 말했던 것과 달리 키시아르가 첫 말을 꺼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유더의 머리칼과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예쁘더군, 그 옷.”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내 것과 같은 옷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계속 보다 보니 자수 모양이나 옷감 재질이 내 것과는 달라 보기보다 차이가 제법 있다는 걸 알겠더군. 그런데…… 그러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겠나?”

“무엇입니까.”

“일전에 나한의 환상 속에서 단장복을 입은 너를 본 적이 있었다고 했었지.”

키시아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때 보았던 옷이 꿈속의 그 옷과 같았어.”

“……그건…….”

“그때는 환상 자체가 문제로 여겨졌기에 그 부분까지는 그리 깊이 생각지 않았어. 그저 네가 단장복을 입고 나왔다는 것만 인식했었지. 하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옷을 환상 속에서 먼저 보았다는 건 대체 무어라 생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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