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유더.”
그 목소리는 묘하게 흐릿한 다른 이들의 소리와 달리 몹시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실체 없이 흐늘대는 유령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진짜와 마주친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마치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열기가 손끝을 타고 쭉 퍼지는 이상한 감각을 느끼며 유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천히 눈을 돌렸다.
‘…….’
그러나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가.
‘곧 문이 열릴 겁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새를 못 참고 시종장이 또다시 재촉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고 등을 쭉 폈다. 사지를 바로 하고 턱을 당기자 몇 번이고 가르침을 받았던 그대로, 완벽한 자세가 완성되었다.
시종장이 무어라 더 말하려다 저보다 높은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새카만 시선을 마주한 순간 입술을 멈칫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이 평민 출신을 상대로 위압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당혹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가십시오.’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유더는 제 앞에 놓인 붉은 바닥을 따라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열린 문 안쪽에서부터 찬란한 빛이 흘러 들어온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위에 그려진 온갖 성화의 인물들과 천사 조각이 홀로 들어서는 이를 미소 띤 얼굴로 굽어보고 있었다.
유더는 옥좌에 앉은 젊디젊은 카치안 황제를, 그리고 그 주변에 서 있는 몇몇 이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훑었다. 그의 임명식이지만 그중 유더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다운 차림새를 한 그들은 그저 눈앞의 새로운 마병단장의 가치를 재보는 눈빛을 하고 있을 뿐, 축하의 박수나 웃음 따위는 건네지 않았다.
본디 영광의 홀에서 이루어지는 임명식은 황궁기사단장이나 궁중마법사청장, 혹은 제국군 장군 정도에게나 주어지는 명예로운 기회다. 드넓은 홀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유더의 임명식에는 몇 사람 참여하지 않았다. 그조차도 대부분은 황제에게 잘 보이고자 참여한 이들이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 함께 와서 자리를 채울 마병단원들조차 없었기 때문에 홀은 그 어느 때보다도 휑하게 느껴졌다. 꾸며 놓은 장식이라 할 만한 것도 거의 없었기에 더 그랬다. 구색만 갖추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대신 유더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가 나아가야 할 붉은 길 끝,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그 때문에 도리어 강하게 의식하는 중이란 사실만 잘 느껴졌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껑충 큰 장신은 그런 식으로 못 본 척한다고 가려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키시아르 라 오르.
마지막 남은 이전 황가의 자손은 오늘 그리 화려하지 않은 짙은 색 옷을 걸쳤다. 그런 옷도 그에게는 몹시 잘 어울렸지만 그동안 워낙 흰 단장복을 입은 모습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유더에게는 그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혹여나 그와 시선이 마주칠세라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이 자리에 당도한 이여, 무릎을 꿇으시오.’
마침내 긴 길이 끝이 나고 옥좌 앞의 계단에 다다랐다.
유더는 시키는 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했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카치안 황제가 머리 위에 화려한 관을 쓴 채 유더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표정 역시도 유더의 가치를 재어 보려는 다른 귀족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보다 좀 더 미약한 호기심과 경계, 그리고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눈빛 속에서 얼핏 엿보였을 뿐이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유더를 그리 보고 있든, 유더는 물을 수도 없고 답을 궁금해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황제는 마병단이 새로운 단장을 맞이하여 앞으로 오르 제국의 안위와 미래를 지키는 더 큰 기둥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말을 길게 읊었다. 유더가 부단장으로서 여태 쌓아 온 업적 같은 건 그 안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고상하고 우아한 언어들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뜻은 간결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단장이 될 이는 솟아오르는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를 수 있도록 아래를 받치는 산처럼, 물고기가 헤엄칠 수 있도록 길을 내어 주는 바다처럼 제국을 위한 일에 진심으로 응해야 할 것이다.’
황제는 태양을, 물고기는 백성을 의미한다. 즉 황제와 제국을 위하여 두말없이 헌신하여 충성을 증명하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받은 과분한 대접에는 그만한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걸 잊지 말아라. 마병단의 이름을 지키고 싶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황제의 뜻이 아주 잘 느껴졌다.
긴말들이 끝나고 나서 카치안 황제는 시종장에게서 보검을 받아 몸소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유더의 어깨에 검을 두 번 내려놓은 뒤 축복의 말을 읊었다. 유더는 그에 응하여 황제의 옷자락 끝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영원히 그를 섬기겠다는 충성의 맹세였다.
카치안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인다. 유드레인 아일.’
처음으로 황제가 임명자의 이름을 불러 모두에게 널리 공표하는 순간.
그 순간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당초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이름에 조금 놀라 서로 눈짓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직접 이름을 하사하신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누가 들어도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이름이다. 본명과도 비슷하여 신경을 써서 지었다는 느낌이 났다. 그야말로 이런 자리에서 황제가 새로운 신하가 된 이에게 내리기에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태도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놀랄 만한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불어 그대에게 백작위를 수여한다. 지금부터 그대는 유드레인 아일 백작으로서 이곳에 서게 될 것이다.’
‘백작?’
‘백작위라니. 경의 호칭 정도가 최대일 거라 하지 않았던가.’
‘단승 남작위 정도라면 모를까, 단숨에 어찌 백작위를…….’
‘이런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젊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 온 이들이었기에 목소리가 그리 크지 못했다. 충격과 불만이 잔뜩 뒤섞인 표정들을 짓고도 고작해야 서로 속삭이는 게 전부였다.
젊은 황제와 그의 뒤에 있을 디아카 공작가는 사실 새로워질 마병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인가? 조촐해 보였던 단장 임명식은 사실 큰 상을 내리기 전에 주변의 눈속임을 하기 위한 장치였던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뜻을 두고서 소리 없이 정치적 함의가 담긴 눈빛과 신호들이 난무했다.
유더는 그 신호들에 단 하나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담담히 서 있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황제가 새로운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그가 직접 이름을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을 몰랐기에 어떤 식으로 오해가 빚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더라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차피 전임 단장이 된 이가 지어 준 새로운 이름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사용되지도 않을 형식적인 이름 따위, 누가 짓고 누가 하사하든 무슨 상관인가. 백작위를 받으리란 사실까진 짐작하지 못했기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작위를 받는다고 사는 곳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앞으로 할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작위가 가진 무게보다는 자신이 지닌 능력을 보여 주고 바뀐 태도로 차이를 실감하는 게 더 확실한 삶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 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유더에게 이름과 작위를 내린 카치안 황제는 미세하게 비뚜름한 미소를 띤 채 눈을 돌렸다. 그늘 속에 조용히 서 있는 펠레타 공작이 황제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를 표하는 듯도, 혹은 비로소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듯도 한 그 태도에 카치안 황제의 입술에 맺혀 있던 미소가 몹시 짙어졌다. 그는 볼 것을 다 보았다는 듯 몸을 돌려 나가려 하는 펠레타 공작의 뒷모습을 주시하다 문득 크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대 단장의 퇴임식도 했어야 했는데… 워낙 그간 나라가 어지러워 미처 그럴 틈이 없었군. 아쉬운 일이야.’
젊은 황제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로 쏠렸다. 나가려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르고, 사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찰나의 텀에 주변 귀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으나, 정작 얼굴을 드러낸 사내는 모욕이 모욕인 줄도 모르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이 정도 버티고 있었으면 충분히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퇴임식 같은 건 나이가 많아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오늘도 힘들게 서 있었으니 이제 그만 한시라도 돌아가 어제 들어온 70년산 쿨라뱅 주를 마시고 싶군요.’
그 표정이 얼마나 멍청하고 느긋해 보이던지, 이전 황가에 대한 충심이라곤 조금도 없던 귀족들조차 다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저 바보 같은 자가 과연 이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는 한 걸까? 이제 초대 황제의 직계 황손은 유일하게 자신만 남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로 인해 쏟아질 경계와 무게 또한 알고는 있을까?
그는 이제 자신이 쥐고 있던 유일한 무기라 할 만했던 마병단장 자리조차 놓아 버렸다. 펠레타 공작은 그의 정부란 소문이 파다했던 후임 마병단장에게조차 이렇다 할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저 먹고 마시며 놀 생각으로만 가득해 보이는 저 얼굴을 보면 후임 마병단장과 놀아났다는 소문이 거짓 같을 지경이었다.
‘하…… 하하.’
카치안 황제 또한 비슷한 감정이 엿보이는 눈으로 웃었다.
황제가 웃자 귀족들 또한 눈치를 보다 말고 제각기 어색하고도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점차 전염되듯이 커졌다.
‘그래도 이대로 보내기에는 후임 단장이 아쉬울 텐데, 인사라도 나누고 가는 건 어떠한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더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다시 웃었다.
‘뭐, 인사가 필요하다면 해야겠지요.’
유더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입꼬리를 올린 사내가 과장된 태도로 유더의 앞에 고개를 숙이더니,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손등에서부터 손가락 끝으로 내려가며 미끄러지듯이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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