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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22화 (622/805)

622화

그때였다. 무심코 눈길을 준 곳에서 무언가 익숙한 형태를 발견했다.

‘저건…….’

유더는 태우려 했던 것들 사이에 곧바로 손을 넣어 더러운 자루 하나를 끄집어냈다. 거무튀튀한 검붉은 얼룩이 묻은 데다 찢어져 구멍까지 난 자루 사이로 얼핏 말라비틀어진 갈색 덩어리들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서는 원 형태가 뭔지 알기 어려운 생김새였으나 유더는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루를 열었다.

‘역시.’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자루에 묻은 거무스름한 얼룩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숙였다. 오래되긴 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자루의 얼룩은 안에 든 내용물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었다.

발정기가 가시지 않아 아직도 반쯤 나른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듯 번쩍 명료해졌다.

“유더?”

“단장님.”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가 걱정스러운 듯 이름을 부른 키시아르와 유더의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유더는 키시아르보다 먼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말려서 정제한 두둘렘 버섯이 든 피 묻은 자루가 하필 이런 곳에 버려져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듯 키시아르의 눈이 멈칫하며 가늘어졌다. 유더는 자루를 그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자루 안에 든 건 말려서 정제한 두둘렘 버섯이었다. 카치안 황태자가 이용했던 가루 형태의 독으로 만들기 직전의 형태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오래 방치된 탓인지 상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본디 희었을 색은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먼지 구덩이 사이에서 구르느라 반쯤 썩었는지 냄새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루 내부에 남아 있는 일부 멀쩡한 것들을 보면 정체를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이전에 키시아르가 에이셰스 샨 아페토에게 넘기기 전 보여 주었던 말린 두둘렘 버섯의 원형 덕분에 알아보는 건 쉬웠다. 그러나 여기서 유더의 시선을 한 번 더 사로잡은 건 그것이 든 자루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었다.

처음에는 내용물이 썩으면서 묻어난 액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아까 능력을 써서 집을 청소할 때 튄 물에 젖어 든 부분에서 오래되어 썩은 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자루가 있던 주변의 다른 물건들 중에는 같은 얼룩이 있는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카치안은 몇 달 전 이 근처의 마을에 시종을 보내 정제한 두둘렘 버섯 독을 몰래 들여왔었지. 그리고 하필 이곳의 약초꾼들이 이용했을 휴식용 쉼터에 섞여 있던 피 묻은 두둘렘 버섯 자루…… 이게 우연일까.’

그럴 리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유더는 이 방면에서만큼은 칸나가 없어도 완벽하게 확신이 가능했다. 이건 분명 그때 카치안이 일으킨 일과 무언가 연관이 있는 물건이리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유더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키시아르 또한 자루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같은 서늘함이 맴돌았다.

“……그때 독버섯을 정제하여 가지고 왔다가 추후 들키자마자 모든 건 제 죄라고 자백한 뒤 자살했던 시종의 당시 행방은 나단이 지금 쫓고 있을 사안 중 하나지. 어쩌면 그때 그자와 거래를 했을 이의 정체를 추측할 물건을 우리가 먼저 찾은 걸지도 모르겠군.”

사실 유더는 이 버섯을 캤을 자가 아직 살아 있을 것 같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루에 묻은 핏자국과 여태까지 아무도 이것을 찾지 않고 방치했다는 사실이 그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

“카치안 황태자라면…… 정제한 버섯을 얻자마자 그것과 관련된 이들을 전부 죽여 입을 다물게 했다 해도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전 생과 달리 아직 어린 카치안은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분명 비밀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로 인해 풍기는 피비린내까지는 영원히 감출 수 없다.

비정상적으로 사라진 자의 흔적은 오래도록 그림자처럼 남아 살인자의 등 뒤를 따라다닌다. 그토록 대단했던 유드레인 아일조차도 그 그림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자루는 그렇게 사라졌을 누군가가 일부러 숨겨 두고 간 ‘흔적’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다른 잡동사니들 사이에 묻혀 하마터면 이런 걸 알아보지 못하고 태울 뻔했다. 유더는 자루를 내려놓으며 이곳에 있을 다른 물건들도 다시 한번 더 살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열에 들떠 키시아르와 함께 있는 동안 느슨하게 풀렸던 마음이 오래되어 굳은 핏자국 앞에서 재차 단단하게 굳었다.

그가 막 주먹을 움켜쥐며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아직 남은 나른함을 완전히 쫓아 보내려 했던 바로 그 순간.

뻗어 나온 큰 손이 손목을 잡아 올리더니, 느릿하고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도로 하나하나 펴 주었다.

“이번엔 내가 말할 수 있겠군.”

키시아르가 저를 올려다보는 유더의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지금 급한 일을 발견했으니 몸상태가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았어도 참고 떠나는 쪽이 맞다고 생각했겠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기면서?”

정곡을 찔린 손끝이 움찔했다. 키시아르가 제 손에 잡힌 유더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게.”

“…….”

“아직 괜찮아지지 않았어. 완전히 나아질 때까지는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돼. 설령 다른 이가 괜찮다 해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작게 중얼거리자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마주하고 있는 이의 가슴까지 아릿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강한 눈빛이 유더의 가슴 속까지 꿰뚫을 듯 쏟아졌다.

“날 믿어. 카치안이 저지른 일을 뒤쫓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이 정도는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간접적으로 움직이는 걸로도 충분해. 나단과 나로는 이 일을 처리하기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를 보며, 유더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키시아르가 평소 부르던 대로 황태자가 아니라 카치안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여 부른 건 분명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이구나.’

이전 생을 떠올리면서 무언가 태도에 티가 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을 속일 자신은 있어도, 키시아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유더의 머릿속에서 이전에 키시아르가 자고 있는 동안 창문을 통해 보았던 스스로의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때와 같은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이제 카치안의 명으로 자신이 유더의 손에 죽은 적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유더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유더는 침묵 속에서 제가 여태 느끼고 있던 줄도 몰랐던 차갑고 무거운 감정들을 인식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키시아르가 그제야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참지 말라고 말하려면, 유더 역시 여태까지 당연하게 참아 왔던 것들을 풀어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유더는 결국 그날도 오두막집에서 나가지 않고 키시아르에게 안긴 채 그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입을 벌려 뻐끔대던 제 안의 빈 구멍들이 차츰 조금씩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아직까지도 가라앉지 않은 열이 원망스럽지 않았던 건 그 소리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내부에서 억지로 내리누르려다 겨우 다시 자유를 되찾은 열이 안온한 온기 속에서 그렇게 천천히 사그라져 갔다.

***

유더는 흐릿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었지. 멍하니 생각하며 내려다보자 흰색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금실로 자수를 놓아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 옷의 정체를 그는 곧바로 알아보았다.

유드레인 아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마병단장복.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보는 듯한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곁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임 마병단장, 영광의 홀로 들어가십시오.’

카치안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상대를 향한 한 점의 온기조차 내보이지 않는 눈빛을 마주하자 비로소 이 상황이 무엇인지 파악되었다.

이건 그의 단장 임명식이었다. 임명을 위해 모인 이들이 바로 눈앞의 문 너머에 있었다. 유더는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숨을 들이마셨다.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속닥이는 목소리들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냉혈하기 그지없는 자라더니 과연 그러해. 전혀 기뻐 보이질 않는군.’

‘냉혈한 게 아니라 주눅이 든 거겠지. 평민 주제에 감히 이런 자리에 서서 겁을 먹지 않을 이가 있겠나.’

유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니 오히려 더욱 마음이 고요해져서, 주눅은커녕 지겨운 감정이 벌써부터 샘솟았다.

‘마병단장.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시종장이 조금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유더가 막 그를 향해 입을 열려 했던 순간, 등 바로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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