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많이도 가져오셨군요. 전서조는 어디서 온 겁니까.”
“나단에게서 왔지. 5일 동안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일을 잘하고 있었다는군.”
키시아르의 말에 의하면 혼자서 목적지에 도착한 나단 주커만은 그간 정체를 감추고 디아카가, 혹은 황태자와 관련된 정보가 없는지 캐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고작 5일도 되지 않아 목표했던 바와 관련된 뭔가를 잡아냈다는 듯했다.
“아직 더 알아보는 중이라며 길게 적지는 않았지만, 나단이 확신하고 있는 걸 보면 그저 그런 정보는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닥친 발정기로 인해 사라진 5일이 혹여나 전체 일정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행여나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심각했던 유더의 눈빛이 겨우 조금 누그러졌다.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과일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냇가까지 가 보니 근처에 콰론이 제법 많이 열렸더군.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것들로만 가져왔는데…… 먹어 보겠나?”
콰론은 산딸기와 비슷하게 생긴 겨울 과일로, 산짐승들의 좋은 겨울 식량 중 하나였다. 유더는 알알이 뭉쳐 있는 주홍색 과실을 받아 입에 넣었다. 조그만 알들이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며 말간 신맛이 났다. 사람이 키우는 과일과는 다소 다른 맛이지만 유더는 이 맛에 익숙했다. 어린 시절, 산에서 살던 때에는 그도 겨울에 콰론을 비롯한 겨울 과실들을 자주 따다 먹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괜찮나 보군.”
“……단장님께서도 드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키시아르가 주먹 가득 쥐고 있던 콰론이 어느새 다 사라졌다.
“나는 괜찮아. 모처럼 생선도 잡았으니 먹을 준비를 해야지.”
귀하신 몸께서 물고기를 잡아 왔는데 굽는 것까지 시킬 수 있겠는가. 키시아르가 잡아 온 물고기는 이 겨울에 냇가에서 혼자 잡아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많았다. 능력을 사용해 잡았다 해도 쉽지만은 않았을 양이었다.
유더는 한곳에 쌓인 물고기의 양을 가늠해 본 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할 테니 그냥 두시죠.”
“아직 향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그냥 쉬는 편이 나을 거야.”
“발정기가 온 것뿐이지 환자가 된 건 아닙니다. 제가 어디서 자랐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하는 쪽이 더 빨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뭐가 그리 인상 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는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원하는 대로 해 보게. 그래도 옆에서 보고 돕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지?”
물론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도울 틈 따윈 없을 것이다. 유더는 제 짐을 뒤져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단검을 꺼냈다. 이런 잡다한 일에 쓰기 위해 가져온 단검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물고기 몇 마리를 손질하고 물을 불러내어 세척한 뒤 썩둑썩둑 잘랐다. 그대로 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굽기까지의 모든 작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유더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불꽃은 물고기를 태우지 않고 정확히 의도한 정도로만 구운 뒤에 꺼졌다.
순식간에 잘 익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생선 위에 남은 콰론 즙을 휙 짜냈다. 콰론은 산딸기처럼 생기기는 했어도 신맛이 강한 편이라 물고기의 비린 맛을 잡는 데에도 그럭저럭 쓸 만했다.
마무리까지 끝나고 쌓인 생선 구이를 바라보며 키시아르가 물었다.
“끝난 건가?”
“네. 드시면 됩니다.”
“도울 틈도 없었군.”
그러니까, 그럴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더가 만든 생선 구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방식대로 만들었기에 미관상 아름답거나 맛이 특별하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키시아르는 유더가 건넨 생선을 아무런 사양 없이 전부 다 먹었다. 의자도, 탁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서 생선 구이나 먹고 있는 모습이 초라할 만도 하련만, 키시아르를 보고 있다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이런 작은 오두막과 볼품없는 식사에 익숙한 유더조차 뭔가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건 유더뿐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음…… 어쩐지 이게 다 사실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기분이야.”
“…….”
“5일 전에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네 향을 맡았을 때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호사스럽게도 직접 만든 식사를 대접받으며 아늑하게도 앉아 있지 않겠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꿈 같느냐고 하면 역시 이쪽이겠지.”
키시아르가 5일 전, 발정기가 막 터졌던 순간에 대해 입에 담은 건 처음이었다. 유더는 제가 찔러 처리했던 알파 각성자 용병에 대한 기억을 그제야 재차 떠올렸다.
‘그놈.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이를 갈며 처리하긴 했지만 아마 유더를 찾으러 온 키시아르가 보았을 풍경이 그리 보기 좋진 않았었으리라. 반사적으로 사과하려 했던 유더는 마주친 붉은 눈동자를 본 뒤 조용히 그 말을 삼켰다. 대신 제 몫의 생선을 그에게 돌려 내밀었다.
“……드십시오.”
“아.”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벌린 사내가 보란 듯 당당하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처음부터 이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기는커녕 오히려 우물대는 붉은 입술이나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에 자꾸 시선이 향하는 건, 이미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선을 지난 지 오래이기 때문이리라.
‘먹는 도중에도 뭔 이런 생각만…….’
아무리 발정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고는 해도 정말 대단했다. 제 안에 어떻게 이리 강한 욕망이 잘도 숨어 있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수많은 생선이 배 속으로 전부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부드럽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이리 요리하는 건 누구에게 배웠나?”
“요리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생선을 잡아 손질하는 방법은 할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살던 곳에서도 자주 이렇게 먹었던 모양이지?”
“네.”
“거긴 어떤 곳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재미없는 사항이라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더는 이전에 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이제는 더 감출 것도 없는데 그가 원한다면 가능한 한 솔직하게 답해 주고 싶었다.
“어떤 곳이냐고 해도…… 그냥, 이곳과 비슷한 산이었습니다. 아니, 더 높고 깊기는 했군요.”
몸의 나이로만 따지면 얼마 전이지만, 기억은 십 년도 전에 살던 곳이다. 유더는 어렴풋이 옛 기억을 더듬어 제가 살던 곳의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와 살았던 작은 집은 예전에 이런 식으로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사용했던 곳을 고친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가려고 해도 반나절은 넘게 내려가야 할 만큼 인적이 드물어, 사람보다는 동물이나 식물에 더 익숙했다.
산맥을 타고 흐르는 계곡과 강줄기에서 고기를 잡거나 약초와 나물을 캐는 게 일과였고, 가끔은 함정에 걸려 죽은 산짐승을 먹었다.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채집하고 나무를 하는 방법은 모두 할아버지에게 배웠다.
산속에서 어린 소년이 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건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할아버지 덕이었다.
“마병단에 올 때까지 혼자 살았다면, 무섭지는 않았나? 어린 나이였을 텐데.”
“평민들 사이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혼자 살 수 있는 나이입니다.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밤이 내리면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도 유더는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낡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도,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큰 산짐승과 마주해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이 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랬으니, 겁이 적고 외부의 자극에 예민하지 않은 건 천성이리라.
하지만 가끔은 그도 숲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위에 올라앉아 먼 곳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산 아래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들, 그보다 더 먼 곳에 보이는 들판과 새파란 숲을 보며 그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할지 한참 동안 생각해 보고는 했다.
각성한 뒤로 그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하늘길을 넘어 이동하는 해를 따라가면 그 너머에는 무료한 산속의 삶보다 대단하고 재미있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저 너머에는 저보다 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아주 많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태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들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산 아래 내려가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게 인생 최대의 여행인 채로 평생을 사는 건 재미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네.”
이야기를 들은 키시아르는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듯도 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아쉬워 보이시는군요.”
“얼마나 귀여웠을까 생각하니 아쉬울 수밖에.”
“말해 두겠습니다만…… 그런 단어가 어울릴 놈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순진했다 해도 유더는 유더였다.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그리 칭찬할 구석이 넘치는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거기에 수긍하지 않고 그저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유더는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제 그만 하던 집 정리를 마저 해도 됩니까.”
“그래. 모처럼 너에 대해 들어서 좋았어. 나중에도 더 이야기해 주게.”
정말 뭐가 재미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유더는 잠자코 일어나 쌓여 있던 잡동사니 일부 쪽으로 다가갔다. 이 오두막에 있는 물건의 대부분은 약초꾼들이 가져다 둔 것으로 짐작되는 것들이었다. 약초 캐는 데 쓰는 이 빠진 도구나 구멍 난 천조각, 비쩍 말라 상한 약초 더미가 든 자루 같은 것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굴러다녔다.
‘이건 태우는 게 낫겠는데.’
유더의 시선이 상한 냄새를 풍기는 자루들로 향했다.
그때였다. 무심코 눈길을 준 곳에서 무언가 익숙한 형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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