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아침인가……?’
눈동자를 움직여 쳐다본 문 바깥에서 가느다란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이 정확히 몇 시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흐릿한 색으로 미루어보아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나서야 드디어 제정신으로 마주하게 된 오두막집 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말린 짚 위에 천을 씌워 만든 간이침대는 본래의 형체를 잃고 여기저기 알맹이를 토해 낸 상태였으며 구석의 잡동사니들도 부딪혀 쓰러지거나 흐트러진 게 여럿이었다.
벽과 바닥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액체의 흔적이나 손가락 모양대로 움푹 파인 자국들은 또 어떠한가. 작은 공간을 완전히 절여 버린 두 개의 짙은 향까지 합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유더는 그 흔적들을 보며 문득 이전 생의 첫 2성 발현 때를 떠올렸다. 발정기의 열로 의식을 잃기 전, 불현듯 흐릿하게 떠올렸던 그 절망스럽던 단장실의 광경과 지금 눈앞의 오두막 모양새가 썩 비슷한 듯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유더는 폭풍이 지나간 듯 어지러운 저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도 그저 시원하고 무심한 현실 파악뿐이었다.
‘……치우는 건 나중에 하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만큼 온몸이 노곤하고 나른했다. 피로하다기보다는 배가 터지도록 무언가를 먹은 뒤 오는 포만감에 더 가까운 감각이었다. 비어 있는 위에서 느껴지는 허기와 몸이 느끼는 만족감 사이의 괴리감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신은 대체로 돌아온 것 같았다.
‘힘도……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고.’
굳이 능력을 써 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느껴졌다. 완전히 돌아온 느낌이 아닌 건 아직 발정기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여운이 덜 가셨다는 건 평소라면 배고프다고 느낀 즉시 일어나 움직였을 몸이 엉켜 있는 따뜻한 품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더는 뺨을 댄 가슴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를 몸 위에 올려 안고 있던 사내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일어났느냐는 질문 없이 몇 번 눈을 느리게 깜박인 키시아르가 유더의 몸을 추슬러 조금 더 가까이 끌어 올렸다. 가까워지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붉은 눈이 휘었다. 이내 자연스럽게 입술이 겹쳐졌다.
“음…….”
혀가 부드럽게 엉긴 순간 벌써 몇 번이나 느꼈었던 저릿한 감각이 혀뿌리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쭉 번졌다. 온몸의 힘이 빨려 나가는 듯한 나른한 쾌감 속에서 유더는 또다시 허리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배고프다는 생각이 다시 찾아온 건 긴 입맞춤이 끝난 직후였다.
“……배고프지는, 않으십니까.”
아주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어 본 기분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조금 따끔거렸다. 반쯤 쉬어 버린 목소리가 낯설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키시아르가 유더의 코끝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5일이 지났으니 허기질 만도 하지. 이제 좀 상태가 돌아왔나?”
그의 목소리도 유더와 마찬가지로 잠긴 상태였다. 하지만 평소에도 좋은 목소리를 지녔던 덕인지, 키시아르의 잠긴 목소리는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누군가의 잠긴 목소리가 성적인 감각을 자극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그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했다.
늘 힘 있고 명확한 목소리로 제 뜻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사내가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작게 말을 건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속 어딘가가 저릿했다. 아주 신기하고 특별한 광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그런데 며칠이 지났다고?’
유더는 다시 몸집을 키울 듯 슬쩍슬쩍 흔들리는 제 안의 남은 불씨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5일이 지났다고 하셨습니까?”
“여기 들어온 뒤로 해가 다섯 번 지고 떴으니 그렇겠지.”
“…….”
조금 당혹스러웠으나 열기 어린 기억 속에서 몇 번인가 뜨고 지던 해를 가늠해 본 뒤 유더는 이내 수긍했다.
‘배가 고플 만도 했군.’
발정기에 돌입한 각성자의 몸은 성욕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욕구와 반응을 극도로 죽인다. 끝날 때까지는 거의 자거나 먹지 않아도 신비하리만큼 타격을 느끼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강제로 잠드는 쪽을 택한 각성자들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며칠을 내리 자도 멀쩡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었다.
북쪽의 어떤 새들은 수십 일이나 되는 짝짓기 기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아남는다던데, 어쩌면 각성자들 또한 그 새처럼 발정기 기간에 평소에 쌓아 둔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키시아르는…….’
기억에 따르면 키시아르는 이곳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유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잠깐씩 선잠을 자던 짧은 시간에 나가서 뭔가를 먹고 오기란 아무리 키시아르라 해도 불가능했을 텐데, 괜찮은지 걱정되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마음을 읽은 듯 대답했다.
“나는 괜찮아. 고작 5일 정도로 널브러질 몸이라면 여태 버티지도 못했겠지.”
“그래도…… 이렇게까지 참을 필요 없이 그냥 저를 뿌리치고 나가서 드시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키시아르 정도의 능력이라면 뭐든 쉽게 잡아서 편히 먹을 수 있었을 터다. 혹은 어딘가에 있을 나단 주커만에게 중간중간 연락 겸 식량을 부탁해도 되었을 테고……. 아무튼 굳이 함께 굶을 필요까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워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키시아르가 짧게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 어떤 상태든 역시 너는 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설명이 이어졌다.
“5일 내내 내게 참지 말라고 무섭게 명하더니, 회복되고 나서도 왜 참았느냐는 말부터 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
그랬던가? 열로 들떠 있던 머리가 천천히 회전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긴 했군.’
말로, 몸으로, 혹은 향으로 유더는 내내 그의 벽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참으려 하는 기색이 보이면 사납게 달라붙어 전부 내보이라 종용했던 기억이 몹시 선명하게도 났다.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짐승처럼 굴었었다.
제가 무슨 뜻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아주 잘 이해가 되는데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한 것 같지 않은 것이, 이게 바로 발정기의 여파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이쪽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 참지 말라 말씀드린 것과 이번 건 지칭하는 바가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알아.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발정기를 함께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겠지.”
“…….”
유더가 눈썹을 꿈틀하며 입을 다물자 키시아르가 짐짓 억울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도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난 이번에 정말로 참은 적이 없네. 너와 나, 이 집의 꼴을 보고도 그리 말하면 조금 억울해져.”
‘너와 나’ 부분에서 키시아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액으로 얼룩진 하반신 쪽이었다. 몇 번이고 안에 뿌렸던 액체가 참지 않은 가장 중요한 표식이라고 말한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기는 했다.
‘이전에는 둘 다 발정기가 겹친 상태에서 한 게 아니라면 2성으로 인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 주었는데도 안에 한 적이 거의 없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유더는 그가 안에 사정하는 쪽이 더 좋았다. 정확히는 하나로 연결된 상태에서 키시아르가 절정에 달하는 걸 보고 느끼는 순간의 오싹함이 마음에 든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2성 발현자들이 생식 활동에 성공하는 확률은 어차피 극히 낮다. 근본이 되는 1성이 같으면 그 확률은 더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발정기가 겹친 상태에서 몸을 섞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지만, 그럴 일은 사실 별로 없었다. 스스로 살아남기도 급급한 세상에 그 드문 확률을 뚫고 아이를 낳으려 애쓰는 각성자를 찾기는 그보다 더 어려웠다.
아주 드물게 무계획 상태에서 발정기 시기가 겹친 상대와 잤다가 아이를 가진 각성자들도 이전 생에 있기는 했었지만, 그게 유더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때는… 키시아르 쪽이 그릇에 재차 금이 간 상태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제 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생의 키시아르는 확률이 없다는 걸 알아도 늘 조심스러웠다.
그랬던 그가 비로소 처음으로 그런 사항을 개의치 않고 바라는 만큼 안에 쏟아부었다.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낄 만큼 몸속 가득 열이 차오르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음… 임신이라…….’
저와 연결 짓기에는 너무나 다른 세상 같던 단어가 발정기를 겪은 여파 덕인지 난생처음 진지하게 느껴졌다.
제 삶에 피를 이은 아이가 존재하리라 생각해 본 적 따윈 한 번도 없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혈육이 필요하다 느낀 적도 딱히 없었고,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산적한 일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키시아르는 어떨까.
후사를 남길 수 없는 공작으로 사는 데 익숙했을 사내는 2성 발현을 한 각성자가 된 이후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유더는 몹시 막연한 기분으로 낯선 생각을 하다가 지웠다. 키시아르가 이어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거른 건 그걸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원하는 대로 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 내가 먹고 싶은 건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으니까.”
노골적으로 성적인 암시를 머금은 말인데, 동시에 언어 그대로 삼키고 싶은 뜻이 느껴지는 신비한 어투였다. 유더는 그가 한없이 핥고 빨며 삼키기를 반복했던 제 몸의 모든 곳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일순 훅 일어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나? 배고픈 것 외에 다른 이상은 없고?”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슬슬 일어나 볼까. 물은 이 안에 있지만 식사를 하려면 나머지는 밖에서 공수해 와야 할 테니…….”
몸을 일으키려던 키시아르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슴을 누르며 상체를 일으킨 유더 때문이었다.
“그 전에.”
유더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또다시 힘을 받기 시작한 성기를 내려다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검게 가라앉은 서늘한 눈동자 속에 서서히 불길이 어렸다.
“한 번 더 해결해야 할 게 있을 것 같군요.”
“……배가 고프다면서?”
키시아르가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제 위를 타고 오른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이미 몹시도 녹진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단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문제입니다. 불이 붙었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래……. 아직 여파가 다 가시지 않은 이에게 내가 잘못했군.”
키시아르가 유더의 엉덩이를 꾹 쥐었다. 살을 부드럽게 양옆으로 벌리자마자 뻐끔 벌어진 틈새를 타고 젖은 점액이 울컥 흘러나왔다.
유더가 치솟는 열기를 느끼며 이를 악문 것과 키시아르의 눈에도 불길이 옮겨붙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한 번을 더 하고 나서야 유더는 겨우 몸을 일으켜 집을 치울 의욕이 생겼다. 돌아온 능력은 평소의 반도 안 되었으나 그 정도만으로도 이런 작은 오두막 정도는 충분히 치우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서 물로 집 전체를 싹 씻어 내고 바람을 이용해 나머지 물건들을 옮기는 동안, 키시아르는 밖에 나갔다가 산더미 같은 생선과 과일을 가져왔다. 갈아입을 옷이 든 그들의 짐과, 웬 전서조 또한 함께였다.
“많이도 가져오셨군요. 전서조는 어디서 온 겁니까.”
“나단에게서 왔지. 5일 동안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일을 잘하고 있었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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