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15화 (615/805)

615화

나단 주커만은 말 등에서 짐을 끌어내어 그대로 둘러맨 채 험한 산길을 날듯이 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전까지 나누었던 주군과의 대화가 어른대는 중이었다.

‘-제가 맡았던 구역에 들어온 놈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아일 경은 아직입니까.’

‘그런 듯해. 남겨 두고 간 흔적만 먼저 찾았는데, 아마 근처에 있겠지.’

나단 주커만이 키시아르와 합류한 것은 예상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용병들을 제압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으나, 기척을 숨기고서 활보하는 주군을 찾느라 시간이 조금 소요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주군은 땅에 묻힌 버섯처럼 얼굴만 내밀고서 기절해 있는 용병들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게 바로 키시아르가 말한 나머지 한 명의 일행, 유더 아일의 흔적이었다.

‘참 잘 묻어 두지 않았나? 오늘 처음 해 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아.’

묻혀 있는 자들을 보고 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감탄사였으나, 사실 나단 주커만 또한 주군의 의견에 동의하기는 했다.

유더 아일이 묻어 두고 간 자들 주변에는 전투의 흔적이 제법 많았다. 각성자끼리의 전투 흔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뒷골목에서 일어난 개싸움의 흔적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 흔적들은 이 용병들이 온갖 수단을 사용해 적에게 처절히 저항하려 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흔적 중 유더의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 모든 저항들이 결국 쓸모없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유더 아일은 혼자서 각성자 용병 둘을 철저하게 가지고 논 뒤 여기에 묻어 두고 간 것이다.

이유 없이 시간을 끄는 짓을 할 이는 아니니 아마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이리했으리라.

‘목적을 이토록 빠르게 완수하면서 자신의 흔적은 빈틈없이 감추고, 내가 지시한 부분도 잊지 않고 완벽하게 수행했지. 추적 능력을 사용한 자를 먼저 처리하고 오느라 우리보다 뒤늦게 출발했을 텐데도 말이야.’

‘이곳의 흔적만 보고 누가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건 확실히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겠지.’

동의의 말을 내뱉은 키시아르가 관찰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방향을 가늠하듯 주변을 둘러보던 키시아르가 이내 한곳을 향하여 느긋하게 걸었다.

‘자…… 그래서, 네 쪽은 어땠지 나단?’

나단 주커만은 용병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간단히 보고했다. 그들의 배후가 렌보우 자작이라는 사실과, 어제 그쪽에서 연락을 해 온 이가 현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등을 들은 키시아르는 자신도 거기까지는 알아냈다고 가볍게 대꾸했다.

‘예상대로라 크게 놀라운 게 없군. 아, 각성자들을 상대하는 건 할 만했고?’

‘예.’

나단 주커만이 상대한 용병들은 제법 귀찮은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었기에 잡기가 쉽지 않았다. 호산라 정도는 아니어도 단거리를 이동하는 능력자가 있었고, 바람을 사용하는 능력자가 기척을 혼란하게 만드니 산에서 도망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때문에 나단은 때마침 발견한 약초꾼들의 쉼터용 오두막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유더의 기척을 남기는 척하며 유인책을 교묘히 사용하자 결국 놈들은 스스로 그곳에 들어와 나단 주커만의 제물이 되었다. 장애물이 많은 산에서라면 몰라도, 좁고 꽉 막힌 실내에서 나단을 막을 자는 없었다.

‘사전에 아일 경이 알려 준 정보들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두막에 쓸 만한 도구도 많아서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유더는 용병들이 몰려들기 직전, 대표적인 각성자들의 유형에 맞추어 나단 주커만이 상대할 수 있을 방법들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마치 나단 주커만의 전투 방식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조언들이었다.

그 방법을 몰랐더라도 상대하는 데 크게 지장은 없었겠으나, 알고서 움직이니 일을 처리하기가 몇 배는 편했다.

새삼스럽지만 유더 아일은 소름이 돋도록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이전의 나단 주커만이라면 그런 기분을 느낄 때 유더 아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기에 최근 겪은 사건들이 영향을 다소 미쳤다는 건…… 솔직히 부정하기 어려웠다.

‘많이 친해진 것 같구나.’

키시아르가 별안간 묘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구와 누가 말씀이신지요.’

‘너와 내 보좌가.’

장난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키시아르는 언제나 그런 말 속에 알 수 없는 함의를 담아두는 이다. 유더 아일에 한해서만큼은 평소와 다른 행각을 보이는 주군을 여태 몇 번이나 보았기에 나단 주커만은 이 질문을 허투루 넘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하지 않습니다.’

‘그래?’

‘아까도 말씀드렸으나 이번 일은 아일 경 쪽에서 먼저 조언을 요청했고, 거기에 제가 조금 동참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적을 상대할 만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대화를 좀 나누었다고 해서 친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까라는 건 유더 아일이 없을 때, 잠에서 깨어난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을 불러 그간 있었던 일들을 기어이 듣고 만 일을 뜻했다. 눈치가 비상한 사내는 제 보좌가 그간 자신의 이상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관과 서로 협력했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하고 있었다.

‘흐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아무리 몰려들어 만나자고 해도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내 보좌와는 같이 차도 마시고, 간식도 내어주고, 몰래 쑥덕대며 나를 감시하기까지 했다면서 친하지 않다……. 나단 너의 친함의 기준은 아무래도 세간의 상식과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렇게 물으니 또 말문이 조금 막혔다. 나단 주커만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자신의 주군이 뜬금없는 질문을 할 때의 대처법을 발휘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듣고 싶으신 답이 있으시다면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이 정도론 이제 안 넘어가는구나.’

입술 끝을 비죽 올린 사내가 나단 주커만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단 주커만의 키가 거대한 전나무처럼 자란 뒤에도 주군은 그를 때때로 작고 어린 시종 다루듯 할 때가 가끔 있었다.

‘나단. 이전에 너는 유더를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그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 알고 싶었다.’

역시나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예상치 못했던 부분을 담고 있었다. 사실 해당 사항은 그간 나단 주커만이 상당히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묵묵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경계 자체는 지금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떤 부분에서는 아일 경만큼 믿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판단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의 조언을 따르고 함께 의견을 나눈 건 그래서일 뿐, 친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 판단을 하지?’

‘공작 전하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키시아르의 눈이 슬쩍 휘었다.

‘그건 즉 경계하고 있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는 소리군.’

‘…….’

‘그럼 만약 내가 유더 아일을 지금부터 믿지 말라고 명하고, 유더가 반대로 네게 내가 이상해졌으니 함께 조사하자고 부탁한다면 이번엔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나단 주커만의 눈빛이 변했다. 주군의 뜻을 가늠해 보듯 눈을 내리깔았던 남국인 기사는 잠시 후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일로 인해 전하와 관련된 부분에서라면 최소 한 번은 아일 경의 말을 믿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참입니다. 저 나름대로 두 말씀의 근거를 확인하여 판단할 것 같습니다.’

그건 유더에게도 했던 발언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르기로 유명한 기사가 내린 결론이라기엔 엄청나게 놀라운 말이기도 했다. 키시아르가 정답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단. 그토록 변치 않았던 네가 드디어 변하는 날이 오기는 하는구나.’

‘…….’

‘나는 네가 늘 그런 답을 할 수 있는 이가 되길 바랐었지. 하지만 지금까지 너는 한 번도 이런 답을 한 적이 없었어. 그렇지 않았더냐?’

그랬었다. 나단 주커만에게 있어 키시아르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므로.

물론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자신만큼이나 맹목적으로 키시아르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누군가의 존재를 새로이 인정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터트렸던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키시아르는 나단보다 앞서 걸으며 비로소 한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네게 변화에 대해 물은 이유가 궁금하겠지.’

‘…….’

‘예전의 나는 변하는 것이 곧 죽음이었던 삶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지금의 나를 보아라.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하나?’

‘많이 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병단을 만든 뒤로는…….’

‘정확히는 ‘유더 아일을 만난 뒤로는’이겠지. 그것을 제외하면 변한 것이 없어. 나의 성정도, 본질도 펠레타에 있을 때와 비교하여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차 없이 스스로를 평한 사내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전히 인내와 부동이 변화보다 값진 가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기대받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해 놓고도 정작 어떻게 변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하는 일이 변한다고 그것이 본질의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 키시아르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한결 부드럽게 녹았다가 다시금 스르르 단단해진 눈빛만이 그런 말을 했을 상대의 정체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더 이상 참지 말라고 하더군.’

‘…….’

‘스스로를 억누르지 말라고. 솔직하게 굴어도 좋다고.’

이번에도 누가 그랬는지는 생략되었다. 하지만 나단 주커만은 이번에도 사라진 주어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가르쳐주는 답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나이를 먹고서도 아직껏 몰랐던 사실인데, 솔직해진다는 건 마치 옷을 벗고서 세상 앞에 나서는 느낌이더라고.’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키시아르가 불현듯 쓰게, 그리고 사랑스러운 것을 떠올리듯이 웃었다.

‘그런 어려운 일을 숨 쉬듯 해내는 이도 있으니 나도 이제는 변해야겠지.’

‘…….’

‘나단. 나는 변하고 싶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단 주커만의 귀에 그 말은 천둥보다도 크게 들렸다.

‘그리고 너도, 앞으로 계속해서 변하기를 바란다.’

나단 주커만이 정확히 어떻게 변화하기를 바라는지 그의 주군은 명하지 않았다. 나단 주커만은 자신이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의 뜻에 대해 생각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 그때,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키시아르가 고개를 퍼뜩 어딘가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좀 더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으리라.

‘……유더?’

‘예?’

‘향이 느껴지는군. 뭔가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키시아르의 표정이 갑자기 무섭도록 굳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불꽃처럼 색을 달리한 눈동자를 한 사내가 어둠이 내린 산속을 향하여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나단 또한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두 사내는 나무가 부서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엄청난 속도로 좁은 길을 헤쳐 나갔다.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며 거침없이 빠져나가던 키시아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단 주커만은 키시아르를 따르던 도중 두어 명의 사내들이 더 땅에 박혀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험난한 언덕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난생처음 맡는 묘한 향이 나단 주커만의 코끝을 자극했다.

키시아르의 어깨가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그도 이 묘한 향들을 인지한 게 틀림없었다. 급속도로 말이 없어진 사내의 얼굴 위로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 온 나단 주커만에게조차 낯선 감정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 처참한 현장이 드러났다.

등에 검이 꽂힌 채 쓰러져 있는 어느 낯선 사내와 그 주변을 메운 피.

묘한 향은 그 주변에서 가장 강하게 풍겼다.

사내의 등에 꽂힌 검의 손잡이만 보고서도 나단 주커만은 그것이 누구의 검인지 알 수 있었다.

‘전하!’

나단 주커만의 외침보다 빠르게 키시아르가 그곳으로 향했다. 검이 꽂힌 사내를 무시하고 나아간 사내가 어둠 속에 묻힌 언덕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잠시 후 새카맣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이로 명이 들려왔다.

‘나단. 여기 있는 자를 회수하기 쉬운 곳에 묻어라. 그리고 돌아가서 말에 실린 짐을 찾아. 내 짐에 챙겨 두라 사전에 명한 약이 있다. 그것들을 가져오되…… 만약 내 상태가 좋지 않다면 그 약은 네가 유더 아일을 데리고 아까 찾았다고 말했던 오두막까지 가서 먹이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키시아르는 거침없이 아래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1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