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송구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손님의 옷을 갈아입히고 땀을 닦아 내었으나, 갈수록 열이 내리지 않아 해열제를 세 번 드렸습니다. 심한 고통에 시달리시는 듯하여 진통제도 함께 드렸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두 시종이 번갈아 고개를 숙이며 유더의 상황을 키시아르에게 보고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고통과 열로 인해 유더의 온몸에는 내내 땀이 흥건했다. 그것을 정성스레 닦아 주고 약을 반복하여 먹여도 그가 겪는 고통은 나아지지 않는 듯 보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열꽃이 더 피어나더니 심지어는 전신에서 묘한 향까지 흘러나왔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땀을 흘릴 때 날 만한 눅눅한 냄새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귀부인들이 뿌리는 향수 냄새 같지도 않았다. 몬스터 중에는 온갖 향을 뿜어내어 사냥감을 유혹하는 놈들이 있다지만, 멀쩡한 사람의 몸에서 어찌 이런 기이한 향이 난단 말인가. 궁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수많은 일들을 겪어 온 나이 든 시종들조차도 이 상황 앞에서는 평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의사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을지요.’
시종들의 보고를 들은 키시아르의 시선이 계속해서 몸을 흠칫흠칫 떨고 있는 이쪽으로 향했다.
유더는 그쪽으로 향할 듯 잠시 움칫거렸던 키시아르의 손끝이 잠시 후 꽉 그러쥔 주먹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다. 이건 2성 발현을 일으킨 각성자에게만 일어나는 증상이니까.’
‘그 발현이란 것이 본디 이리 심각한 일입니까.’
키시아르가 2성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나이 든 시종들의 눈가에 가슴 아픈 기색이 일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키시아르는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네. 아무래도 내 보좌는 발현 과정이 다른 이들보다 좀 격한 모양이야. 열과 향은 발현과 함께 발정기가 겹쳤기 때문인 듯하니 더 고통스럽겠지.’
흔한 경우는 아니나 그것이 꼭 비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다. 탈피하는 곤충들도 제각기 다른 속도로 껍질을 벗지 않던가. 이전에 없던 것이 새로이 완성되는 과정이니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것이 끝난 이후까지 그런 건 아니다. 탈피를 끝낸 존재는 비로소 성숙을 얻는 법이니까. 자신이 바로 그 좋은 증거라며 키시아르가 짐짓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었다. 시종들은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고 덩달아 웃었다.
‘확실히 전하께서 각성이란 것을 하신 뒤로 훨씬 늠름하고 성숙한 분이 되어 돌아오시기는 하셨지요. 아무튼 그렇다 하시니 다행입니다만…….’
‘그런데 전하. 계속 그 바깥에 서 계시는 이유가 있으실지요? 들어와 앉아서 편히 지켜보시지요.’
유더의 침대 주변에 선 시종들과 달리, 키시아르는 침대에서 떨어진 첫 번째 보호벽 너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모습이 다소 희한했다.
‘……아니. 나는 여기에 있겠네.’
‘곧 다시 나가셔야 할 일이 있으십니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쉬시는 것이 좋지 않을지요.’
‘…….’
키시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시종 중 한 사람이 새로운 수건과 따뜻한 물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키시아르가 서 있는 곳에 가까워진 순간, 키시아르가 별안간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 문으로 나가 주게.’
‘예?’
반사적으로 의문을 표했던 시종이 이내 키시아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전하. 언제부터 그리 땀을 흘리셨던 겁니까? 맙소사. 저기 계신 손님만큼이나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키시아르의 이마와 목은 완전히 땀 범벅이 된 상태였다. 한눈에 보아도 보통 상태가 아닌데 어떻게 티도 내지 않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기겁하는 시종에게 손을 내저은 키시아르가 길게 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괜찮네. 그보다 저 사람의 상태가 더 시급하니 그쪽을 살펴 주었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서는 직접 돕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아쉽군.’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어찌 귀하신 몸께서……. 염려하실 필요가 없도록 움직이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전하께서도 계속 이곳에 있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파티 내내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셨을 텐데 요깃거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내일이면 아페토 공작가의 첫 재판이 열려. 내 생각대로라면 제대로 열리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가야 하니 오래 있진 못할 거야.’
‘그러시다면 더더욱 굳이 여기에 더 계시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으실지요?’
‘……조금만 더 지켜보겠네. 괜찮아질 때까지만.’
‘전하…….’
‘조금만 더.’
키시아르는 한사코 시종들을 물리고 그들이 유더보다 자신을 더 신경 쓰지 못하도록 막았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시선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줄곧 침대에 누운 유더의 상태를 조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시종들은 키시아르에게 가서 쉬라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그는 원하던 대로 계속 보호벽 앞의 같은 자리에 서서 유더를 지켜보았다.
몸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고통에 질려 창백해진 뺨을,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굳은 팔다리가 경련하는 모습을, 그러다 열에 지쳐 죽은 듯 늘어지는 모습까지도 모두 남김없이 눈에 담았다.
그리고 유더 또한, 희미한 감각을 통해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지금 저리 견뎌 내고 있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비각성자 시종들은 모르겠지만 그만은 알았다.
발현과 발정기를 동시에 겪는 중인 상대 2성 각성자가 내뿜는 향을 견뎌 내는 건 단순한 인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거리를 두고 있다 해도 어마어마한 충동을 참아야만 했을 터였다.
막 발현한 유더를 이곳에 옮겨 오기 위해 나섰을 때처럼 급한 상황도 아니고, 꼭 그가 이곳에서 지켜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 고통을, 본능을 이겨 내면서까지 굳이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건 어째서인가.
새벽이 다 가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자 시종들은 마침내 귀한 얼음까지 가져왔다. 그러나 얼음이 다 녹아도 유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음이 닿은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보이는 착각이 일 정도로 엄청난 열이었다.
결국 아침 해가 밝아올 무렵,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포네사를 사용해야겠어. 이곳에 저장된 분량이 있는가.’
‘예? …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궁을 떠나신 이후로는…….’
‘그렇다면 얻어 와야겠군.’
‘궁의와 황궁 제약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포네사 가루를 얻어 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약청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시간이어서…….’
‘굳이 열리지도 않은 먼 제약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시종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한때 이 궁에 살았던 전설적인 장난꾸러기 황자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던 자들이었기에 주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해 냈다.
‘설마…… 황궁 온실 벽을 넘어 직접 포네사를 가지러 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
‘전하!’
그때 유더가 또다시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녹은 얼음물을 적셔 그의 얼굴과 팔다리를 한바탕 닦아 내는 전쟁을 벌인 뒤 고개를 들었을 때, 키시아르는 이미 서 있던 곳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아이고, 맙소사……. 이런 세상에. 정말 가신 건가.’
‘그곳은 황후 폐하께서 직접 가꾸시는 곳 아닌가. 예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단단한 보호 마법을 설치하는 걸 내가 직접 보았는데…… 혹시라도 거기에 당하여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어쩌면 좋을지.’
‘대체 이분이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까지…….’
그들의 시선이 유더의 얼굴로 향했다.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중하게 변화한 그 시선들 속에서, 유더는 그저 혼미하게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유더의 의식이 또다시 스르르 추락해 내려갔다.
두 번의 발현. 두 번의 발정.
시작도 끝도 완전히 달랐지만 그래도 무언가는 같았다.
몸속 어딘가, 육신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 불꽃 같은 낯선 욕망의 곁에 같은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때는 절망으로 존재했고, 한때는 묵묵하게 곁에 있어 주는 보호의 벽처럼 곁에 있었던 이.
그리고 지금은…….
‘……더.’
혼탁한 의식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유더.’
연기처럼 부유하던 유더의 의식이 그 부름에 이끌리듯 어딘가를 향하여 떠올랐다.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전신의 감각이 선명해지며 외부의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유더!”
유더는 눈을 떴다.
몽롱한 시야 너머, 제 몸을 받쳐 안은 키시아르가 보였다. 그들은 발아래가 휑한 낭떠러지 위, 허공에서 버티고 있었다. 유더의 몸 주변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빛이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
“축복이 제 일을 제대로 해냈더군.”
몽롱히 눈을 깜박이는 유더를 향하여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굴렀다면 낭떠러지 아래로 완전히 떨어졌을 거야.”
그제야 대상의 안전을 확인했다는 듯 유더의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유더는 희미한 기억에서처럼 땀을 흘리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것을 무슨 뜻이라 여겼는지 키시아르가 깊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보좌의 은신 능력을 내가 너무 얕보았던 모양이지…….”
“…….”
“짐을 가지러 나단이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게. 일반용 수면제와 안정제는 가지고 왔으니 그걸 먹으면…….”
키시아르는 드물게도 말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유더가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어진 향이 동시에 키시아르를 감쌌다. 놀랄 만큼 뜨겁고 농염한데도 주인을 닮은 솔직함만은 잃지 않은 향이었다.
키시아르는 금방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유혹을 떨치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참기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으면…….”
“……참고 있는 건 제가 아니겠지요.”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맞닿은 시선 속에서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속삭였다.
“제 앞에서는, 이제 참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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