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화
유더는 땅에 파묻힌 채 머리만 내놓고 기절한 자들을 내려다보았다. 키시아르가 주문한 대로 제 손에 걸린 놈들을 잘 다져 땅에 심어 두기는 했는데, 역시 꼴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보기만 해도 눈이 썩고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번 놈들에게선 수확이 있었어.’
방금 쓰러트린 놈들은 유더가 시커를 날려 보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2차 시험을 포기하고 도망쳤던 간자들이었다. 눈치가 빨랐던 만큼 자신들의 의뢰인과 이번 일의 전후 상황에 대해서도 제법 아는 바가 많았다.
놈들의 말에 따르면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본래부터 유더를 노리고 지원 시험에 온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용병 일을 하다 그만두고 마병단에 지원서를 내어 순수하게 합격을 노린 자들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원해 보니 지원자가 너무 많은 데다 거친 용병 출신이란 과거는 거기서 조금도 장점이 되지 못했다. 누구라도 살인과 욕설에 익숙한 용병 출신 따위보다야 때가 묻지 않고 집안이 좀 더 좋은 자들을 붙이지 않겠는가? 귀족 출신 각성자들까지 마병단에 지원한다는 소식이 그들의 불안과 실의를 부추겼다.
그렇게 초조함에 사로잡혀 용병들이 자주 머무는 술집이나 숙소 등에 박혀 있던 이들에게 ‘의뢰인’의 하수인이 접근했다. 의뢰인은 수도에 있는 귀족으로, 마병단 내부의 정보가 필요하기에 그들을 도와 합격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유혹의 손을 잡은 자들이 바로 여기에 모인 놈들이었다는 소리지.’
의뢰인은 용병들의 과거를 지우고 지원서를 대신 작성해 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1차 합격을 받아 내면서 처음에는 모든 일이 다 잘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더가 시커를 시작으로 수많은 간자들을 골라내며 그들 또한 2차 시험에서 합격할 길이 요원해졌다. 불합격하거나 도망친 용병들에게 의뢰인은 새로운 임무를 하달했다.
바로 그들을 불합격시킨 마병단의 샛별, 떠오르는 영웅이라 불리는 각성자 유더 아일이 서부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그를 뒤쫓아 생포하거나 죽이라는 명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병들은 의뢰를 받은 이가 자신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두 번째 임무를 수락하고 나서, 실은 자신 같은 이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집채만 한 괴물도 홀로 상대할 만큼 강하다는 유더를 상대로 싸울 방법은 의뢰인이 소개해 준 또 다른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의뢰인은 그자를 ‘현자’라고 소개했는데, 그는 유더의 능력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유더가 자연의 힘을 비롯하여 검도 잘 쓴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한 뒤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중에는 전투에 약해도 추적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2차 시험장에 잠입해 능력을 쓰는 데 성공하였으니, 유더 아일이 서부를 떠날 때 뒤를 쫓으십시오. 여러분 각각은 그보다 약할지 몰라도 수가 많다면 쥐도 사자를 이길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의 말에서는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18인의 용병들은 어차피 물 건너간 마병단 시험 대신 힘을 모아 유더 한 사람을 해치우고 돈이라도 벌기로 마음먹었다.
놈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했던 의뢰인의 정체를 렌보우 자작이라 말했다. 유더는 그놈의 이름을 이전에 현자의 숙소를 뒤졌던 엘더 남매와 가케인 덕에 미리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자의 숙소에 드나들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귀족. 디아카 공작 측 귀족일 텐데도 현자와 이 정도로 가깝게 엮여 있는 모습과 태도를 보면…… 그놈도 이미 세뇌당했겠지.’
현자가 유더의 능력을 알고 있는 건 동부와 서부에서 이미 그의 능력을 보았던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에게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일 터다. 그간 그자가 나한과 과연 얼마나 다를지 의문이었는데, 오늘부로 결론을 내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은 나한과 같은 신념을 지닌 놈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화주의자도 절대 아니고.’
나한이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른 각성자들을 이용해 유더를 먼저 공격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우선 목표는 언제나 제 맘에 들지 않는 비각성자 귀족들이었으니까.
모두가 그토록 입을 모아 선량하다 말했던 현자가 디아카 공작을 위하여 유더 아일을 먼저 해치울 계획에 입을 보탰다는 걸 나그란의 별들은 알고 있을까. 유더의 눈에 서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내가 놈이라면 진짜 간자들은 남부에서 준비해 두고 이번은 그저 렌보우를 앞세워 시험 삼아 낚아 본 것뿐일 거다. 그러다 예기치 못하게 나타난 내 소식을 듣고서 한번 찔러나 보자 싶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일회용밖에 안 되는 용병 출신들을 썼을 리가.’
만약 이 일에 실패하더라도 유더와 마병단이 현자와 렌보우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내보일 수 있었을 대담함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린 이미 네놈에 대해 알고 있지.’
유더에게 걸린 놈 중 하나가 완전히 기절하기 전, 현자가 마지막에 몇몇 각성자들을 남겨 무언가를 더 언질했다고 말했다. 놈들은 거기에 해당되지 못하여 정보를 몰랐기에 알아내려면 아는 놈을 따로 더 찾아야만 했다. 얼마나 급조된 관계인지, 놈들은 서로의 이름과 인적 사항조차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굳이 몇 놈만 남겨 언질할 사항이라. 나에 대한 건지, 아니면 다른 정보인지 궁금하니 반드시 알아내긴 해야겠는데.’
이제 슬슬 정리가 끝나 가는 모양인지 남은 놈들의 기척을 찾기가 어려웠다. 과장 좀 보태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근처 어딘가에 분명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도 있을 텐데 이 정도로 기척이 안 느껴지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유더는 자신도 그 기척 없는 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넘기고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찾기 어렵다면 반대로 이쪽에서 미끼를 던져 남은 놈들이 찾아오게 해 주는 방법이 제일 좋겠지만…….’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스스로를 미끼로 삼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때문에 유더는 잠깐의 갈등을 이내 접었다.
어쩌겠는가. 그 길이 가장 쉬워 보여도 키시아르 라 오르가 다른 길을 바란다면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발정기가 가까워지지만 않았어도.’
키시아르가 반대했던 이유가 떠올라 무심코 크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재차 숨을 들이마셨을 때, 유더는 문득 어디선가 조금 낯설고 희미한 단내를 느꼈다. 잔뜩 묵은 술통 주변에서 풍기는 오래되어 시큼한 냄새와 비슷한 향이었다.
이 코가 썩을 듯한 향이 설마 내 향인가. 의심하며 손목을 코끝에 가져다 대려던 순간,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 하아… 하아……. 찾아, 찾았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용병 한 놈이 유더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마병단의 괴물은, 오메가라지… 암컷 냄새가 나는 놈… 그래…… 너뿐이야……. 내가 먼저 찾았어……!”
그놈이 입을 연 순간, 유더는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짙고 시큼한 단내를 맡았다. 방금 맡았던 향과 똑같은 향이었다. 거칠고 진득한 향이 놈의 몸에서부터 줄기줄기 뻗쳐 나오는 중이었다.
‘알파 각성자.’
그 정체를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나는 알아. 네놈, 발정기지……? 아무리 숨으려 해도 이 암내는… 절대 못 숨기지. 난 코가 좋거든……. 역시 나는, 운이 좋아……!”
- 쿵.
몸 전체를 두드리는 듯한 박동과 함께 별안간 유더의 몸에서도 향이 폭발하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무슨…….’
마치 불쾌한 침입자를 당장에 밀어내려는 것처럼 주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튀어나온 향은 거침없이 상대의 향에 달라붙어 사납게 기 싸움을 벌였다. 유더는 재빨리 그것을 도로 갈무리하려 했지만, 그 무엇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일순 모든 힘이 쭉 빨려 나가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간 제 몸에 얼마나 존재하는지조차 체감되지 않았던 향이 전신의 땀구멍이란 땀구멍에서 모두 방출되는 듯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치솟는 열기와 식은땀,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온몸을 뒤덮어 찌르는 것만 같은 소름 돋는 감각.
유더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는 바로 곁의 나무에 무너지듯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우욱……!”
동시에 비틀거리면서도 유더에게 다가오려 했던 상처투성이 용병도 허리를 꺾으며 땅바닥에 무너졌다. 이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던 듯 당혹한 얼굴이었다.
그의 향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지만 유더의 향에 대응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좁고 약했다.
사내의 눈알이 흰자위 위로 돌아가며 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변했다. 그의 바지 앞섶이 불룩하게 부푼 채 줄줄 흐르는 액체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 액체에서는 오줌과 전혀 다른 비린내가 풍겼다.
그게 무엇인지 유더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발정기에 돌입한 오메가 각성자를 만난 알파 각성자가 흩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짙고 많은 정액이었다.
기분 나쁜 시큼한 향과 비릿한 정액 냄새가 뒤섞여 유더의 전신을 미친 듯 두들겨 냈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내쫓기 위해 바람의 힘을 일으키려 했다.
“…….”
하지만 아주 작은 바람만 한번 들썩했을 뿐, 원하던 힘은 아무것도 발휘되지 않았다. 불도, 물도, 땅도 마찬가지였다. 시도하면 할수록 마치 물이 콸콸 나오던 샘의 안쪽이 막힌 듯한 갑갑함이 들며 반대로 스스로의 심장을 조이는 통증을 선사했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발정기에 막 돌입했을 때의 각성자들은 대부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본능 이외에는 모든 것이 잠자듯 가라앉고 심한 이들은 기억의 경계마저 흐려져 그 어느 때보다도 힘 조절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외부의 공격에도 한없이 취약해졌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힘조차 발휘되지 않는 이런 경우는 유더도 처음으로 보았다.
‘기억도 제대로 안 나는 발현 때 말고 제대로 된 발정기는 처음이니 알 턱이 있나.’
눈에 보이는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코와 피부를 통하여 느껴지는 이 기분 더러운 향은 여기서 멀어지는 것 외엔 답이 없다. 유더는 제어되지 않는 향을 억누르려 미친 듯 노력하면서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가 멀어지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용병이 꿈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끄으…… 끄……!”
그 눈에는 더 이상 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그저 새빨간 성욕뿐이었다. 평소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그 욕구가 지금의 유더에게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인식되었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오메가 각성자를 붙잡아 내리누르고 싶다는 본능이 그자의 상처 입은 몸에 갑자기 불가사의한 활력을 부여했다.
놀랄 만한 속도로 바닥을 기어 온 자가 유더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상대가 두른 향이 더욱 가까워지자 유더의 몸에서 폭발한 향 또한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유더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억누르기 위해 나무를 붙잡은 채, 제가 떨어트린 검의 위치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것은 경사진 언덕 아래까지 굴러떨어지지 않고 그 경계에 걸쳐 있었다. 그는 휘청이며 그곳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미친 듯이 휘젓던 알파 각성자의 손이 마침내 유더를 뒤쫓아와 그의 발뒤꿈치를 움켜쥐려 했던 그때, 유더 또한 바닥으로 무너지며 검 손잡이를 쥐는 데 성공했다.
“끄……헉!”
유더를 향해 몸을 내던지려 했던 사내가 그보다 먼저 제 등 위로 찔러 내리는 검에 꿰뚫려 비명을 질렀다. 등과 복부를 관통한 검 손잡이를 쥐고 땅 아래로 망설임 없이 깊이 찔러 내리면서, 유더는 전신에 퍼지는 열기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피로 젖은 손과 몸에 비릿한 철 냄새가 뒤엉켰다.
‘설령 내가 발정기 때문에 힘을 쓸 수 없다 해도, 네까짓 놈 하나 손보지 못할 것 같았다면 오산이다.’
고통조차 잊고 붙잡으려 하는 자와 칼로 찌르는 자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향들이 용솟음쳤다. 부릅뜬 눈 사이로 살기가 뻗쳤다. 유더는 용병의 손이 제 발을 놓을 때까지 검을 쥔 손을 놓지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몇 발짝 걸으려 했으나,
그 순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솟구친 엄청난 열기가 눈앞을 흐렸다.
“…….”
유더의 몸이 그대로 휘청 고꾸라졌다. 그는 검이 걸쳐져 있었던 경사진 언덕 아래로 속절없이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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