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좋게 말할 때 투항할 놈이 있나? 셋을 셀 동안 나와서 엎드리면 그놈만은 살려 주마.”
갑자기 주변의 분위기가 한없이 싸하게 변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적들과 유더의 사이를 휑하니 훑고 지나갔다.
“……저놈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누굴…… 살려 줘?”
“저놈, 눈깔이 어떻게 된 것 아냐?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적들이 마침내 웃음을 잃었다. 유더는 그중에서 유독 자신을 강하게 노려보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복수심으로 불타는 미움 어린 눈빛이 몹시도 익숙했다.
‘시커. 저놈도 저 사이에 끼어 있었나.’
이전 생의 시커도 간자이긴 했지만 이렇듯 동료들과 단체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또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게 그의 존재를 통해 느껴졌다.
‘오히려 잘되었군. 그때 경고만 하고 보낸 걸로는 이쪽도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유더는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하나. 둘.’
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동안 앞으로 나와 엎드리는 놈은 당연히도 없었다. 씨근덕대는 숨소리와 긴장감만 폭발하듯 높아졌을 뿐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 유더는 빠르게 늘어선 적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셋.’
“죽여!”
누군가 크게 외침과 동시에 유더의 몸에서도 힘이 몰아쳤다.
“억!”
“악! 뭐야?”
유더를 향해 달려오려던 자들이 순식간에 줄에 발이라도 걸린 자들처럼 덜컥 솟구쳤다가는 일제히 우르르 엎어졌다. 볼썽사납게 땅에 얼굴을 처박은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동안 언덕 위에서 차갑고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려 절하는 모습들이 참 잘 어울리는데.”
유더를 죽이기 위해 온 용병들은 그제야 유더가 땅의 힘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발바닥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과 셋을 세는 손가락 등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 제아무리 속도에 자신이 있고 땅을 박차고 뛰는 게 능력인 이들도 속절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노에 떨리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고개를 든 시커가 큰 소리를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새끼! 네놈의 목은 반드시 내가 따 버릴…… 어?”
“어디로 간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앞쪽에 서 있었던 유더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 함께 있던 두 명의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도망쳤다. 쫓아!”
“잠깐만. 땅에 묻힌 발이 안 움직여!”
“머리는 장식이냐, 멍청한 새끼! 신을 벗어!”
난리 속에서 겨우 가진 능력을 발휘하거나 신을 벗어 발을 뺀 이들이 유더가 있던 곳을 향해 뛰어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풀숲 여기저기에 짓밟힌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스락거리며 누군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이 있는 곳과 반대쪽 방향이었다.
“저기다!”
귀가 밝은 이들이 그 흔적을 쫓아 우르르 달려 나갔다.
“저 소리는 분명 함정이다. 발자국 쪽이 진짜야!”
또 다른 이들은 발자국이 남은 곳만을 좇으며 반대편 길로 향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놈이 도망친 상황에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반드시 내가 먼저 잡는다!’
그 생각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서로 뒤엉켜 뛰던 용병들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바로 유더에게 추적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한 용병의 존재였다.
“크, 커, 컥! 유, 유더 아ㅇ……!”
“조용히 해.”
유더는 모든 이들이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에게 속아 사라진 뒤 가장 높은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려 내려왔다. 그가 손을 휘젓자마자 용병들이 넘어진 흔적으로 엉망이었던 땅 아래가 열리며 산 채로 묻혀 있던 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키가 작고 왜소하여 어디를 보나 전투와는 거리가 먼 그 사내가 바로 유더에게 간도 크게 추적 능력을 사용한 자였다.
다른 이들이 일제히 넘어졌을 때, 그는 아예 전신이 땅 아래 부드럽게 묻혀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생매장을 당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추격전 때문에 다른 용병들은 그가 묻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전부 가 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추적 능력자는 몸을 떨며 입 안 가득 들어찬 흙을 토해 냈다.
설마 유더 아일을 찾자마자 이렇게 쉽게 제가 잡힐 줄은 몰랐다. 이렇다 할 전투 능력은 없어도 주변의 다른 용병들이 자신을 잘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게 꿈만 같았다.
‘아니야. 내가 없는 걸 깨달으면 다들 곧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만 용서를 비는 척하면서 버티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발이 그의 어깨를 도로 짓밟아 땅 아래로 파묻었다. 아주 느리고도 확실하게 어깨뼈가 부러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끄아아악!”
몸부림치는 그의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생각을 읽은 듯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라. 네가 기다리는 놈들은 여기로 못 돌아올 테니까.”
“무, 무슨…….”
그때, 어디선가 처절하고도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다가는 뚝 끊겼다. 뒤를 이어 다른 방향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몇 번인가 더 들려왔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 비명들이 전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는 사실에 추적 능력자는 기함했다.
그들은 이곳에 유더 아일이 왔다는 사실 하나만을 신경 썼을 뿐, 그와 함께 있던 다른 두 사람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이 일을 시킨 의뢰인도 그런 부분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이 상황은……!
“자, 잠깐만요. 투항하겠소. 아니, 투항하겠습니다. 추적도 풀어 드릴 테니까 저는 살려 주십……!”
“누가 그런 게 필요하다고 했던가?”
재빨리 제 한 목숨이라도 빨리 건져 보고자 의리 없이 입을 조잘거리던 놈의 머리 위에 또다시 발이 올라왔다.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그가 힘만 주면 몸이 즉시 땅 아래로 또다시 파묻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살고 싶었으면 셋 셀 동안 투항하라고 했을 텐데. 기회는 이미 사라졌어.”
유더의 발에 힘이 꾹 들어가자마자 추적 능력자의 몸이 늪처럼 땅속으로 재차 파고들었다. 짓눌린 머리 안쪽 두개골과 목뼈가 짓누르는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으아아……! 으욱! 커흑!”
비명을 지르려 벌린 입 안으로 흙모래가 가차 없이 파고들며 소리가 먹혔다.
“내가 너부터 처리하러 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추적 능력자는 겨우 눈물범벅이 된 눈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분노도, 그 외의 이렇다 할 감정도 보이지 않는 유더의 모습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기질적으로 한쪽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인간 같지 않아 너무나도 무서웠다.
경험으로 쌓인 본능이 외쳤다. 저놈은 분명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놈이 아니었다. 사람의 비명을 듣고 반응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원하는 만큼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 목숨을 질리도록 앗아 본 놈들만이 저런 눈빛을 했다.
‘말도 안 돼. 고작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어떻게……!’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이조차 오줌을 지릴 만한 한기 속에서, 드디어 죽음의 신 같은 목소리가 마지막 말을 이었다.
“네 능력 사용 조건과 의뢰인에 대해 아는 것들. 모두 말해.”
‘일단 가장 거슬렸던 한 놈부터 잘 처리했군.’
유더는 땅에 머리를 내놓고 곱게 묻힌 채 기절하여 고개를 꺾은 각성자를 뒤로한 채 나무 위를 달렸다. 바람을 밟고서 훌쩍 뛸 때마다 나뭇잎이 뺨을 스쳤다.
그가 추적 능력자부터 처리한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고는 해도 제게 추적 능력을 걸 정도의 각성자라면 그 힘을 잘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비슷한 놈이 또 왔을 때 쉽게 당하지 않고, 그런 놈이 단원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식으로 키울지 알 수 있지.’
이전 생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저를 죽이러 온 자들을 때려눕히고 흥미를 끄는 능력을 지닌 자들의 힘을 알아내어 마병단과 자신의 발전에 쏠쏠히 써먹었었다.
비록 방금 때려잡은 놈이 추적 능력 외에는 너무 별 볼 일 없는 자였던 탓에 의뢰인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 조금 아쉬웠으나, 그건 이제부터 또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아직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이 모든 놈들을 다 해치우진 않았어야 할 텐데.’
놈들의 인원을 한껏 분산하여 처리하기로 한 건 키시아르의 생각이었다.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의 정체와 힘을 적절히 감추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외부에서 결코 알 수 없도록 처리하기에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당하는 적들 자신조차 스스로 누굴 상대하는지조차 모른 채 쓰러져 갈 이런 전투는 설령 칸나 완드가 온다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읽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들이 상대할 적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반영한 전투였다.
유더는 말 그대로 ‘자신의 건재함’을 완벽하게 보여 주었던 키시아르의 지시를 떠올리며 이런 전투에 익숙했던 과거의 마병단장으로서, 그리고 키시아르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자로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나왔군. 어디 보자…… 두 놈인가.’
유더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여 유유히 걷는 그의 모습이 숲의 어둠 사이로 먹히듯 사라졌다.
“…….”
또다시 근처에서 한 놈의 기척이 사라졌다. 시커는 어깨를 움찔 떨며 풀숲에 몸을 숨겼다가는 이내 이를 갈며 빠져나왔다.
떨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손이 떨렸다. 움켜쥔 단검 손잡이가 땀에 젖어 어쩔 수 없이 옷에 땀을 문질러 닦아야 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공포가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대체 뭐냐고!’
유더 아일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다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발자국을 뒤쫓아 가다가 함께 뛰던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아주 오랜만에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들을 뒤쫓으며 하나씩 사라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뭉쳐 다니며 적을 찾았지만 적은 유령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떤 놈들은 같이 다니는 자들을 믿을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상대하겠다며 다른 곳으로 뛰쳐나갔다가, 얼마 뒤 비명 소리만 남기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어둠이 내린 산에서는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가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흡……!”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땅을 데굴데굴 구르다 뭔가에 걸려 멈췄는데, 고개를 들자 보인 건 아까 사라졌다 생각했던 다른 용병의 시체였다.
“……!”
자세히 보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시커의 눈에 그 상처투성이 몸뚱어리는 그저 시체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반쯤 돌아 버린 채 물러나려다가, 자신이 쥐고 있던 단검마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어딜 갔지? 내 검. 내 단검……!’
“자. 여기 있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손에 검을 쥐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쥔 시커는 일순 안심했다가, 이내 싸하게 등줄기를 훑는 공포를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낯선 얼굴의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누…… 누구냐.”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을 때, 어떤 이들은 변하지만 어떤 이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지. 살 기회를 먼저 얻었었는데도 결국 다시 돌아와 여기에 선 걸 보면 자네는 후자겠군.”
너무나 여유롭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자와 이전부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던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단검을 겨누었다.
“무슨…… 개소리야. 너, 마병단이지!”
“왜 그런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하나?”
“제기랄! 마병단이냐고 묻잖아!”
“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시커가 뭐라고 외치든 변함없이 제 할 말만을 한 사내가 조용히 손을 올렸다.
“나는 그리되고 싶지 않다는 것.”
그의 손끝에서 뭉쳐진 작은 빛의 구슬 같은 것을 본 게 시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전신을 타격하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그는 단검을 떨구고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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