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검은 꼬리?”
“짐이 누구지?”
유더와 키시아르가 동시에 의문을 담아 중얼거린 뒤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로벨과 마티가 황급히 달려와 입을 열었다.
“짐은 에르시와 함께 노동 중인 죄수입니다! 아까 저와 함께 오넬을 옮기는 걸 도와주러 마병단 지부에 같이 갔던 두 사람 중 하나인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살피고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에르시가 그것과 관련해서 언급한 게 아닐까 싶어요.”
유더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합쳐 정리했다.
‘들으니 기억이 나긴 나는군. 아까 에르시가 짐과 페터란 자들을 따로 호명해 로벨을 도우러 가라고 했었지. 그 짐이란 자가 날 살피고 알려 주었던 걸 에르시가 말해 줬다 이건가?’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짐이란 자의 정확한 능력은 다른 사람의 상태를 살펴 평소와 다른 부분을 살피는 힘에 더 가까운 듯했다.
그 ‘다른 부분’의 범위가 생각 외로 넓어서 어떤 때에는 동료의 아픈 부위를 짚어 내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다른 각성자들이 몸에 사용한 보이지 않는 능력을 알아보기도 했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대충 에르시의 말뜻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적을 은밀히 추적할 때 보통 검은 꼬리를 붙인다고 말하곤 하지. 그렇다면…….’
“-누군가 추적 관련 능력을 사용해 우릴 은밀히 노리고 있는 걸 봤다는 뜻이겠군.”
키시아르가 유더의 생각을 정확히 입에 담았다.
짐이란 놈은 유더를 처음 봤을 때부터 검은 꼬리가 붙은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하 감옥에 오기 전부터 이미 추적이 붙어 있는 상태였을 확률이 높았다.
‘동부에선 아무 일도 없었으니 서부에 있는 동안 붙은 거겠지. 그게 가능하려면…… 답은 둘뿐.’
서부 지부의 동료들 중 변절한 간자가 있거나, 아니면 이번에 마주한 시험 지원자들 중 누군가가 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유더는 지부의 동료들이 변절했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판단했다.
‘지부에 있는 단원들 중에는 추적 관련 능력을 지닌 이가 없어.’
그들이 이런 짓을 하려면 외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부에서 유더의 눈에 안 띄고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지른다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부의 변절자라면 추적보단 암살을 시도하는 쪽이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그러므로 지금 간도 크게 유더에게 몰래 꼬리를 붙인 놈은 수없이 많았던 서부의 지원자 중 누군가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지원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는 수많은 기운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쳐 나조차도 모든 기운을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운 좋은 놈 하나 정도는 그때를 틈타 꼬리를 붙일 수 있었겠지.’
결론을 내린 유더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득였다.
“추적을 붙여 두고도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적은 저희가 이곳을 떠나 수가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사실조차 이제 저희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 되었군요.”
글로에의 축복 덕분에 출발이 하루 지체되었고, 그 때문에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난 순간에 지하 감옥에 방문하게 되면서 본래 예정했던 일정이 어그러졌다.
이곳에 하필 유더에게 꼬리가 붙은 걸 볼 수 있는 능력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자가 속삭인 말을 끝까지 비밀로 삼키지 않고 동료를 살려 준 데 대한 대가의 표시로 알려 준 에르시가 있었던 것도 모두 거기서 비롯된 행운이었다.
‘설마 이게 내 몸을 지킬 축복이었던 건가?’
에문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을 막아 내는 축복을 받았었다지만, 모든 축복이 그런 식으로 발현되지는 않을 터다. 유더는 알 수 없는 축복의 힘을 일단 머릿속에서 지운 뒤 평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주변 거리를 슬쩍 돌아보았다.
“굳이 여기서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을 듯하니, 나가서 그놈들의 낯짝을 직접 봐 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키시아르가 유더가 내릴 결론을 이미 짐작한 듯한 얼굴로 순순히 동의했다. 그들은 즉시 나단 주커만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해 말에 올라탔다. 떠나기 전, 키시아르는 로벨과 마티를 불러 서부 지부장 에문을 찾아가 몇 가지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시험 지원자 중 유더 아일이 직접 참관했던 이들과 2차 시험 직전 연락 없이 무통보로 도망친 자들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여 수상한 이들을 쫓으라 전하게. 나와의 연락 주기는 이전과 다름없이 유지하라고도.”
“알겠습니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유더는 빠르게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흘긋 본 뒤 곧바로 고삐를 당겼다. 세 필의 말이 빠르게 타이누를 빠져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누의 구석진 여관에서도 얼굴을 가린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괴물과 그 일행이 드디어 타이누에서 나갔습니다! 총 세 사람입니다!”
“좋아. 어제 렌보우 자작님이 모시는 현자란 분에게 들은 조언은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기다렸다가 해가 지면 신중히 뒤를 쫓는다.”
유더와 키시아르의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서부의 2차 시험 도중 유더의 손에 걸려 탈락했거나 정체를 들켰다고 여겨 시험조차 치지 않고 빠져나온 각성자들이었다. 십수 명이나 되는 이들의 살기 어린 눈빛에서 자신들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유더가 2차 시험 도중 직접 날려 보내 시험에서 떨어트린 각성자, 시커도 있었다.
“그 빌어먹을 괴물 놈. 서부의 험한 산지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목이 부러져 죽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곧 알려 주마.”
삼삼오오 흩어진 수상한 이들이 타이누의 각 성문으로 흩어져 도시를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울 따름이었다.
***
“우리는 카치안 황태자가 버섯을 정제한 마을 쪽으로 먼저 향할 거야. 포우안이란 이름을 지닌 아주 작은 마을이지.”
키시아르가 어둠이 내린 숲속을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가며 앞으로의 일정을 알렸다. 어둠이 내린 숲에서는 말을 탈 수 없기에 그들은 모두 내려서 걷고 있었다.
다만 세 사람 모두 평범한 인간을 한참 초월한 실력을 지닌 덕에 걷는 속도가 아주 빠르다는 게 특이점이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이 길에서 빠져 과나마르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습격자들이 우리를 뒤쫓는 중이라면 대충 그곳의 초입쯤에서 속도를 늦추고 기다려 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적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방심하기 좋을 만한 곳이군요. 허를 찌르기 좋겠습니다.”
유더가 중얼거리자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정석적이지. 하지만 혹 적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을 경우 미끼 역할을 하겠다거나 하는 말은 말게.”
정확하게 그 말을 하려 했던 유더가 잠시 멈칫했다.
“왜입니까. 추적당하는 목표물은 저이니 제가 교란하는 쪽이 맞지 않습니까.”
“타이누를 떠나기 전보다 향이 훨씬 짙어졌어. 느끼지 못했나?”
유더의 눈가가 움찔 움직였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얼굴에 묻어 보았으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이 모르겠다면 아직은 괜찮은 거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지. 미끼가 필요하다면 내가 할 생각이네.”
“예?”
“그간 나를 너무 걱정하여 부관과 보좌가 일을 하다 말고도 손을 놓을 정도였다는 걸 알았으니 어쩌겠나. 그 걱정을 사그라들게 해 주려면 스스로 건재함을 보여 주어야지.”
“…….”
나긋하게 중얼거린 키시아르의 말에 잠시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더의 눈이 스르르 움직이자 그의 시선 닿는 곳에 있던 나단 주커만이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통해 유더는 제가 없었던 동안 잠에서 깨어난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에게 그간 충직한 기사와 보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들었음을 확신했다.
그것 때문에 섭섭했다거나, 놀란 건 아닌 듯했지만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보여 주겠다’는 이유로 스스로 가장 위험한 일을 자처하겠다고 나서다니.
참으로 키시아르 라 오르다운 처세라서 기가 막혔다.
“모두 힘은 적당히 쓰고, 생포 후 정보를 캐고 나서 땅에 얼굴만 내놓고 묻어 두는 쪽으로 하지. 지부에 있는 이들이 주워 가기 좋게끔 손질해서.”
“……알겠습니다.”
나단과 유더의 어두운 대답을 들으며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약한 근질거림이 유더의 가슴 안쪽을 살짝 간지럽히고는 사라졌다.
숨겨 왔던 사실들을 들키고, 이전 생의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알게 된 이상 아무리 키시아르라 하더라도 조금쯤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라. 강제로 잠을 자고 일어나 한결 말끔해진 사내의 얼굴에 예상했던 그림자 따위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해사하고 여유로워진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싶어 저러는 게 아니다. 유더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걱정을 사그라들게 해 주기 위해’라는 말을 내뱉으며 유더를 흘긋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는 분명한 의지를 띠고서 ‘어제의 일로 인해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소리 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그걸 느끼고서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키시아르 라 오르는 가장 어두워질 거라 믿었을 때 오히려 예상치 못한 빛을 내보이는 사람이다.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유더는 다시 한번 어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소리가 들리는군요.”
드디어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나단 주커만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더 또한 이미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사람의 기척을 바람의 힘을 통해 어느 정도 느끼는 중이었다.
“인원수는 총 열여덟. 그중 특히 빠르게 다가오는 이들도 있군.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인가.”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보다 훨씬 세밀한 정보를 읊었다. 목소리에 긴장감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이들은 장애물이 많은 장소에서 싸울수록 능력이 반감됩니다. 산에 있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금방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자, 곧 오겠군. 준비하도록.”
유더의 정보에 짧게 감사를 표한 사내가 손을 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마자 어디선가 빛처럼 날아든 몇 개의 그림자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당도하며 멈추어 섰다. 그들은 등에 동료를 업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유더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지목하며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저기 있습니다!”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마병단의 괴물.”
“너흰 누구냐. 어떻게 나를 따라왔지.”
이미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어보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둠이 얼굴을 가려 준 덕에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적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추적 능력을 지닌 각성자는 처음 봐서 깜짝 놀란 모양이지? 그걸 걸려고 팔자에도 없는 시험을 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때 붙여 줬으면 그냥 빨리 죽고 끝났을 걸, 네놈의 그 같잖은 짓거리 때문에 더 늦고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됐다는 사실만 기억하도록 해라.”
“누가 보낸 놈들인지는…… 당연히 말할 생각이 없겠군.”
“당연하지.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래. 그건 곧 알아내면 될 테니 상관없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으마.”
“곧 알아내? 미친놈. 뭐라는 거냐.”
“너무 무서워서 돌아 버렸나 본데.”
유더의 침착한 모습에 적들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조금 늦게 도착한 다른 이들이 속속들이 그들의 곁에 집합하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더는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좋게 말할 때 투항할 놈이 있나? 셋을 셀 동안 나와서 엎드리면 그놈만은 살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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