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09화 (609/805)

609화

“무슨 일입니까.”

“어어, 유더 님 오셨군요. 그게… 여기서 일하던 사람 중 두 명이 갑자기 2성 관련으로 좀 일이 생겨서요.”

유더를 발견한 로벨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오넬에게 미열이 있었는데, 그게 2성 발현의 징조였던 모양이에요. 오늘 갑자기 발현을 일으켜 쓰러졌는데 하필 곁에 있던 마르손이 이곳의 유일한 2성 발현자여서… 영향을 받았는지 갑자기 날뛰는 걸 제압하느라 공사를 중단한 상황입니다.”

“설마 사고가 생겼습니까.”

유더가 빠르게 묻자 로벨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물이 파손되거나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기절 상태라 서로 먼 곳에 가두어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이에요. 마르손이 일시적으로 날뛴 거라면 몰라도 혹시 폭주를 일으킨 거라면 마병단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그나마 다행이군.’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웅성대고 있는 죄수들을 돌아보았다. 팔에 죄수의 표시로 팔찌를 하나씩 찬 그들은 마병단에 의해 잡힌 나한의 조력자들이었다.

한때는 마병단의 앞을 가로막으며 평범한 비각성자들을 죽이고 건물을 부수었던 이들이지만 지금 그들의 눈빛에서는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특히 자신들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각성자가 된 마티의 앞에서는 제대로 고개를 드는 이도 거의 없어 마치 다른 이들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이들을 감독하는 일을 마티와 로벨이 맡았다고 전에 듣긴 했었지.’

본래는 마티와 로벨에게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돌발 상황이 생긴 이상 확인과 해결이 급선무다. 유더는 그들의 얼굴을 한번 죽 돌아본 뒤 앞으로 나섰다.

“일단 먼저 하나 묻겠습니다. 마르손이란 사람이 알파였습니까, 오메가였습니까.”

“으음 그게…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

“알파? 아니, 오메가였나? 뭐였지?”

2성 발현자가 아닌 로벨이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쥐어짜는 동안 그의 등 뒤에 있던 죄수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입을 연 건 여태 가장 뒤에서 조용히 침묵만 지켰던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

“내가 알아. 알파라고 했어.”

“에르시!”

“그렇게 반말을 하면 저 마병단 사람이 널 어떻게 할 줄 알고…! 넌 그렇지 않아도 전에…….”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다른 각성자들이 기겁하여 속닥댔으나 에르시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유더를 어둡게 응시할 뿐이었다. 죄수들은 혹여나 유더가 그녀에게 무어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었지만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에르시에 대한 간략한 기억과 정보뿐이었다.

빌름 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다 결국 폭주했던 각성자 에르시. 에버가 직접 손을 쓴 덕에 죽지 않고 붙잡혔지만 그녀는 폭주의 여파에서 살아난 대신 능력을 대부분 잃었다.

엉망이 된 몸상태로도 자신을 찾아온 키시아르에게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하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지금의 에르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조용하고 침착했다.

‘제정신인 건 확실한 것 같고… 폭주의 여파도 이제 거의 사그라졌나.’

유더는 그녀의 상태를 날카롭게 살핀 뒤 입을 열었다.

“확실한가.”

“그래.”

“그렇다면 오넬은 오메가로 발현 중이겠군.”

“…….”

“로벨. 마르손 쪽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더가 고개를 돌려 묻자 로벨이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아… 오넬이 먼저가 아니고요?”

“그쪽은 수면제와 안정용 약을 주고 일주일쯤 격리해 두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발현자보다는 그 바로 옆에 있던 상대 2성 각성자 쪽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막 발현을 일으키고 있는 2성 각성자의 곁에 상대 2성 각성자가 접근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터져 나오는 향에 휩쓸려 동시에 본래의 주기도 아니었던 발정기가 이끌려 나올 수도 있고,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응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이전 생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이번 생의 키시아르는 참아 냈다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문에 최대한 빠른 확인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유더는 곧장 로벨과 마티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다른 죄수들도 쭈뼛대며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밖에 그대로 있으면 잠깐의 자유를 누리거나 혹은 탈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구 하나 망설임이 없었다.

“다 왔어요. 이쪽으로 가면 곧……. 유더 님?”

친절하게 감옥 내로 들어가 길을 알려 주던 로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대답 대신 유더는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생각대로군요. 저는 이 앞으로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예?”

“마르손이 날뛴 건 폭주의 전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발정기가 곧 다가올 것 같군요. 굉장히 여파가 강할 듯하니 오메가 발현자들은 아예 같은 건물에도 들이지 마십시오.”

“여기서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아!”

중얼거리던 로벨의 옆구리를 마티가 강하게 때렸다.

“유더 님도 2성 발현자야.”

“아아. 맞아요. 그렇지. 유더 님도 2성 발현자셨죠. 깜박 잊고 있었네요.”

유더와 키시아르가 일부러 일으킨 남색 소문의 발현지가 바로 이 서부다. 그는 현재 전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오메가 각성자였다.

하지만 알면서도 저 창백하고 싸늘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2성 여부 따위는 어느새 생각도 나지 않게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로벨이 욱신대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멀쩡하던 마르손이 갑자기 발정기라니… 2성 발현자끼리는 원래 이런 건가요? 이전에는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전부 다 이렇게 된다고 볼 순 없겠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다.

갑작스럽게 끌어내진 발정기만큼 위험한 건 없다. 유더는 피부와 코끝을 자극적으로 울리는 보이지 않는 타인의 향을 느끼며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아주 약간 닿았을 뿐인데도 손발이 따끔거렸다. 알파 발현자의 향이 오메가 발현자를 알아차리고 미친 듯 날뛰며 갈퀴처럼 유더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남의 향을 확실하게 느껴본 것도 오랜만이군.’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메우던 키시아르의 향에 비하면 약하긴 해도 느껴지는 감각으로 미루어 보아 마르손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유더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밑으로 내려가 본 결과, 그 짐작은 사실로 드러났다.

“마르손의 몸이 불덩이 같아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이름을 불러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 어떻게 하지? 다른 녀석들이 발정기를 겪을 땐 저 정도로 흥분하진 않았었잖아. 그런데 왜……!”

‘역시 오메가 발현자보다 알파 쪽이 급해. 빠르게 진정시켜야 한다.’

유더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다른 이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왜 가만히들 있습니까. 지체할 시간 없습니다. 오메가 발현자 쪽을 즉시 다른 건물로 분리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두 사람 모두에게 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여야 하니 그것도 가져와야 합니다.”

“그, 하지만… 다른 건물이라니……. 우린 죄수인데… 어디로 말…이에요?”

울상이던 죄수 각성자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이도 그에게 동조했다.

“그래. 여기에 약이 어디 있다고…….”

말끝을 흐리던 이가 유더의 긴 한숨을 듣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그들 모두를 향하여 다시 한번 분명하게 대답해 주었다.

“바로 옆에 마병단 지부 건물이 있는 건 놀고 있으라고 세워둔 게 아닙니다. 여태 마병단에서 치료를 받고 일을 했을 텐데, 그건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예? 아니, 어……. 그건, 그렇긴 했는데…….”

“로벨.”

유더가 어물대는 죄수들을 더 쳐다보지 않고 로벨을 불렀다.

“네!”

“당신이 오메가 발현자를 데리고 마병단으로 가십시오. 당신의 능력을 쓰면 금방 이동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거기에 있을 제 짐도 같이 가져와 달라고 하십시오.”

“유더 님 짐을요? 음, 알겠습니다.”

로벨은 바람의 힘을 통해 빠르고 가볍게 짐을 나를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두말없이 몸을 돌려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오넬이 있을 곳으로 뛰어가자 그 뒤에서 침묵을 지키던 에르시가 입을 열었다.

“페터. 짐. 너희도 따라가.”

“어?”

“저쪽 혼자서 오넬을 옮기게 둘 거냐? 멍청이들아,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너희 능력으로 도우라고! 약을 받아와!”

“아…… 알았어!”

찔끔하고 놀란 두 사람이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로벨이 뛰어간 곳을 향해 갔다. 유더와 에르시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으나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날 따라와. 약이 올 때까지 마르손의 상태를 지켜봐야겠으니까.”

잠시 후 에르시가 몸을 돌려 마르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남은 이들도 쭈뼛대며 그녀를 따라가자 위층에는 유더와 마티만이 남았다.

“알파 발현자의 발정기라면… 유더 님은 괜찮으세요? 오메가 각성자시잖아요.”

“여기 있는 정도면 괜찮습니다.”

밑에 있는 마르손의 상태가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완전히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영향이 거의 닿지 않을 만큼 먼 이곳에 있는 게 최선이었다.

긴장된 침묵 속에서 유더는 마티의 목에 걸린 각성자용 제어구를 보았다. 그것을 제대로 찬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제어구는 잘 쓰고 계시군요.”

“네. 이걸 쓰고 있을 땐 확실히 힘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마티가 목에 건 제어구를 만지작거렸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액세서리처럼 생겨서 마음에 든다는 말을 덧붙인 그녀가 잠시 후 유더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더 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뜻으로 눈길을 돌리자, 마티가 슬쩍 웃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다른 사람들이 늘 깨닫게 해 주시잖아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만.”

진심이었다. 각자 할 일을 하라고 내보낸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말을 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마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저 웃기만 했다.

“저 사람들, 처음에는 여기 와서도 일을 안 하려고 했었어요. 왜 이런 공사를 도와야 하냐고 소리치거나 일을 팽개치고 반항하다 가고는 했죠. 그랬었는데… 언젠가부터 조용해지기 시작했어요.”

“…….”

“여긴 타이누의 중심지에서 멀지 않죠. 일하다 보면 타이누에서 다치거나 죽었던 많은 사람들의 가족, 친구, 이웃들을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단 소리예요. 그리고… 그거 아세요? 저번 사건 이후로, 타이누에 각성자가 새로 굉장히 많이 생겼단 거요. 유족들이나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제법 많이 나왔다고 들었어요.”

타이누에서 목숨의 위기를 겪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새로이 각성을 했다. 마티와 비슷한 경우였다.

나한의 조력자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들이 부순 것들을 복구하면서 그런 이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머무는 감옥 바로 옆에도 마병단 지부가 있으니 더더욱 그런 소식들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것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악에 받쳐 있던 이들이 점차 조용해지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전 사실 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 여겼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들에게 이 일을 시킨 마병단장님의 생각을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죄수들에게 이 일을 시킨 건 키시아르였다. 그는 에르시에게 1년간 죄값을 치르게 한 뒤 다시 찾아와 예전의 생각이 변함없는지 묻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에르시는 마티의 말마따나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굴었었지만…….

“…….”

유더는 고개를 숙이고 짧게 웃었다.

“어… 유더 님? 혹시 방금…….”

“가져왔어요!”

그때 로벨과 다른 이들이 숨가쁘게 들이닥쳤기에 유더와 마티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수, 수면제하고 안정제, 종류별로 몽땅 주셨어요! 오넬은 그쪽에 맡겼고, 다른 마병단 분들도 곧 오신다고 하네요!”

“가지고 바로 내려가십시오.”

“아, 유더 님 짐도 가져왔습니다. 여기요.”

유더에게 가방을 넘겨준 로벨이 서둘러 내려갔다. 아래층이 떠들썩해졌다.

‘이대로 저 마르손이란 자가 잘 잠들면 괜찮겠지만… 과연 어떨까.’

유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로벨이 다시 올라왔다. 땀을 흘리며 찌푸린 표정만 보아도 결과는 짐작이 되었다.

“약이 효과가 없었습니까.”

“네. 가져온 약을 전부 먹였는데도 영 가라앉질 않네요…….”

마티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러나 유더는 침착하게 제가 들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가 무언가를 꺼내들자 로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건 뭡니까?”

“마병단 본부에서 시험용으로 제작한 2성 각성자용 안정제입니다. 발현과 발정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먼저 먹은 것보다는 좀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

“예? 그렇게 귀한 걸…….”

로벨이 몇 개 되지 않는 환약이 담긴 통을 보며 숨을 삼켰다.

“혹시 유더 님이 쓰시려고 가져오셨던 건 아니세요?”

“됐습니다. 급한 쪽부터 처리하는 게 맞으니 가져가십시오. 하나 먹여서는 안 될 것 같으니 전부 먹여도 됩니다.”

“하지만…….”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유더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자 로벨이 침을 삼키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로벨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또다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더는 미동 없이 선 채로 느껴지는 희미한 향에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몇 명의 서부 마병단원들도 더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그 사이에는 낯익은 이도 끼어 있었다.

“……단장님.”

“내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더니, 거짓말을 했어.”

로브로 얼굴을 감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이유는 들었네. 급한 일이 생겼다고.”

키시아르가 계단 아래를 향해 흘긋 시선을 보내고는 이내 유더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공기가 좋지 않군.”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향이 강하게 흘러나오며 공간을 채운 다른 향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무언가 갉작대던 것만 같던 껄끄러운 향이 사라지고 익숙한 향이 몸을 감싸자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거의 다 끝난 참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어떻게 그러겠나.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때에, 이런 일인데.”

곁에 있던 마티가 키시아르를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내 슬쩍 옆으로 물러나며 모른 척을 해 주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계속 흘렀다. 문득 아래층에서 계속 날뛰던 향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향은 점점 사라져 마침내 위층에서는 아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흩어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땀 투성이가 된 로벨과 다른 이들이 올라왔다. 에르시는 그들 사이에 없었다.

“로벨. 에르시는?”

“직접 마르손의 상태를 더 살펴야 안심이 될 것 같다고, 조금 이따가 올라온다고 했어.”

마티의 질문에 답한 로벨이 유더를 향해 보고를 했다.

“마르손은 이제 완전히 진정되었고, 방금 다시 잠들었습니다. 주신 약은 다 써버렸지만요…….”

“그건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 그래도……. 후우. 아무튼 다 끝났습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느꼈던 마르손의 향도 진정되었음을 알렸다. 마병단원들이 땀을 닦으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더는 그들에게 마르손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수면제와 안정제를 먹이라고 말했다.

모든 일을 끝낸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어느덧 해가 져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 외로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셈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감옥 정문 바깥에 짐을 실은 말들을 데리고 있는 나단 주커만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키시아르가 그냥 여기로 온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떠나면 될 준비를 다 하고 왔었군.’

“저는 이제 가 보려 합니다. 다음에 보지요.”

“아… 설마 벌써 떠나시는 겁니까?”

유더의 인사에 눈치 빠르게도 곧 떠나려는 기색을 알아차린 듯, 로벨이 크게 놀랐다.

“이렇게 바쁘게 가실 줄이야…….”

“이번에도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티가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로벨도 그녀를 따라 인사했다. 두 사람의 아쉬운 말들을 뒤로 하고 막 떠나려던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는 에르시를 보았다. 에르시는 팔짱을 낀 채, 그저 말없이 그를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짐이 그러더군. 당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등 뒤에 검은 꼬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고.”

“…….”

“마르손의 빚은 이걸로 갚는다.”

에르시는 그 말만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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